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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 |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 | ||
*여주 고달사지 쌍사자 석등 | *여주 고달사지 쌍사자 석등 |
2023년 12월 10일 (일) 17:11 판
“20년 전이 한바탕 꿈이었구나, 젊은 시절 벗들은 반이나 황천객(黃泉客)이 되었는데 지금 고달(高達) 옛 절에 온 것은 원통(圓通) 큰 복전이 있기 때문이라네. 사면의 산은 병풍처럼 절을 둘렀는데, 한 개 비석은 푸른 하늘에 기대었네. 웃음꽃 피운 이야기에 밤새도록 되돌아갈 길 잊었으니, 그때는 관음보살과 함께 있었기 때문이라네.”-<신증동국여지승람> 문신 한수(韓脩,1333-1384)의 시
건축물 정보
건축시기 및 위치
고달사는 신라 경덕왕 23년(764),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에 세워졌다. 하지만 통일신라 당시에는 큰 기능을 하지 못했었다. 고려시대 광종이후, 고려 초 3대 사찰 중 하나가 되었으며 대찰(大刹)로서 기능했다. 현재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고달사 소속 많은 석탑과 석등 등의 유물은 대부분 고려시대에 만들어졌다. 고달원(高達院)이라고도 한다. [1]
보유 석탑
- 여주 고달사지 승탑
각 부분의 조각들에서 고려 특유의 기법을 풍기고 있어 고려시대 전기 10세기 즈음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거북이를 사이에 두고 네 마리의 용이 새겨져 있으며, 나머지 공간에는 구름무늬로 가득 채워져 있다. 가운데 돌을 중심으로 그 아래와 윗돌에는 연꽃무늬를 두어 우아함을 살리고 있다. 지붕돌 꼭대기에는 둥그런 돌 위로 지붕을 축소한 듯한 보개(寶蓋)가 얹혀져 있다.
-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
-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
- 여주 고달사지 쌍사자 석등
설화
- 신라시대에 고달(高達)[2]
사냥꾼이던 고달은 사슴 한 마리를 사냥하게 되었는데, 화살을 맞고 사슴이 달아나게 되었다. 사슴의 핏자국을 따라가다 보니 불상을 모신 굴이 있었고, 그 불상에 화살이 꽂혀 있었다고 한다. 고달은 그 불상을 보며 부처님이 자신이 살생을 많이 하는 것을 훈계하기 위해 부처님이 사슴으로 변신해서 자기를 인도한 것임을 깨닫고, 그 자리에서 활과 살을 꺾어버린 뒤 수행하여 스님이 되었다고 한다. [3]
- 고달원 입구‘신털이봉'이 생긴 사연
원종대사 찬유는 중국에 수기설법을 유학하고 돌아와 선풍을 진작시켰다. 그는 고려 태조, 혜종, 정종, 광종으로부터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 특히 고려 광종의 개혁에 큰 힘을 보태어 953년(광종 4) 국사로 책봉되었다고 한다. 만년에 고달사로 내려와 머물면서 대찰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수기설법(隨機說法)은 마치 깊은 골짜기에서 부는 회오리바람 소리와 같고, 인연 따라 감응하는 것은 맑은 못에 비치는 달그림자와 같았다,“누더기를 입은 납자(衲子)가 바람처럼 찾아오고, 대중공양을 올리기 위해 오는 이가 구름과 같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수많은 스님이 이곳을 찾아올 때 고달원 입구 500m 전에서 짚신을 턴 흙이 쌓여 신털이봉이 생겨났다고 한다.[4]
출처
- ↑ 신라시대에 세워졌음에도 고려시대 건축물로 넣은 이유는 고려 광종 이후 큰 절로 성장하였기 때문이며, 고려의 3대 사찰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또한 석탑들은 대부분 고려시대 때 만들어졌다.
- ↑ 고달은 가족들이 굶어 죽는 줄도 모르고 불사에 혼을 바쳤다고 한다. 이라는 승건이 창건했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3371
- ↑ https://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2203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