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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라시대에 고달(高達)이라는 승건이 창건했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 + | *신라시대에 고달(高達)이라는 승건이 창건했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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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꾼이던 고달은 사슴 한 마리를 사냥하게 되었는데, 화살을 맞고 사슴이 달아나게 되었다. 사슴의 핏자국을 따라가다 보니 불상을 모신 굴이 있었고, 그 불상에 화살이 꽂혀 있었다고 한다. 고달은 그 불상을 보며 부처님이 자신이 살생을 많이 하는 것을 훈계하기 위해 부처님이 사슴으로 변신해서 자기를 인도한 것임을 깨닫고, 그 자리에서 활과 살을 꺾어버린 뒤 수행하여 스님이 되었다고 한다. <ref>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3371</ref> | 사냥꾼이던 고달은 사슴 한 마리를 사냥하게 되었는데, 화살을 맞고 사슴이 달아나게 되었다. 사슴의 핏자국을 따라가다 보니 불상을 모신 굴이 있었고, 그 불상에 화살이 꽂혀 있었다고 한다. 고달은 그 불상을 보며 부처님이 자신이 살생을 많이 하는 것을 훈계하기 위해 부처님이 사슴으로 변신해서 자기를 인도한 것임을 깨닫고, 그 자리에서 활과 살을 꺾어버린 뒤 수행하여 스님이 되었다고 한다. <ref>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3371</ref> | ||
+ | *고달원 입구‘신털이봉'이 생긴 사연 | ||
+ | 원종대사 찬유는 중국에 수기설법을 유학하고 돌아와 선풍을 진작시켰다. 그는 고려 태조, 혜종, 정종, 광종으로부터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 특히 고려 광종의 개혁에 큰 힘을 보태어 953년(광종 4) 국사로 책봉되었다고 한다. 만년에 고달사로 내려와 머물면서 대찰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수기설법(隨機說法)은 마치 깊은 골짜기에서 부는 회오리바람 소리와 같고, 인연 따라 감응하는 것은 맑은 못에 비치는 달그림자와 같았다,“누더기를 입은 납자(衲子)가 바람처럼 찾아오고, 대중공양을 올리기 위해 오는 이가 구름과 같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수많은 스님이 이곳을 찾아올 때 고달원 입구 500m 전에서 짚신을 턴 흙이 쌓여 신털이봉이 생겨났다고 한다.<ref>http://www.ibulgyo.com</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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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 10일 (일) 16:36 판
건축물 정보
“20년 전이 한바탕 꿈이었구나, 젊은 시절 벗들은 반이나 황천객(黃泉客)이 되었는데 지금 고달(高達) 옛 절에 온 것은 원통(圓通) 큰 복전이 있기 때문이라네. 사면의 산은 병풍처럼 절을 둘렀는데, 한 개 비석은 푸른 하늘에 기대었네. 웃음꽃 피운 이야기에 밤새도록 되돌아갈 길 잊었으니, 그때는 관음보살과 함께 있었기 때문이라네.”-<신증동국여지승람> 문신 한수(韓脩,1333-1384)의 시
건축시기 및 위치
고달사는 신라 경덕왕 23년(764),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에 세워졌다. 하지만 통일신라 당시에는 큰 기능을 하지 못했었다. 고려시대 광종이후, 고려 초 3대 사찰 중 하나가 되었으며 대찰(大刹)로서 기능했다. 현재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고달사 소속 많은 석탑과 석등 등의 유물은 대부분 고려시대에 만들어졌다. [1]
특징
우리나라의 석탑은 대부분 화강암으로 만들어진다. 하지만 경천사 10층 석탑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으며 높이는 13.5 미터이다. 석탑의 기단부와 탑신석 1층에서 3층까지의 평면은 한자 아(亞)자의 형태를 띄고 있는데 이는 당시 원나라에서 유행했던 석탑 형식이다.[2] 이러한 원나라의 특징이 드러나는 이유는 경천사 10층 석탑이 고려 말기 원나라 황제의 건강과 원나라의 기원을 빌며 지어진 석탑이기 때문이다. 원나라에서 넘어온 석공들이 만들었기에 석탑의 모양과 형태가 기존 고려의 석탑과는 다른 점이 많다. 기단부부터 3층까지는 원나라의 양식을, 4층부터 10층까지는 고려시대 석탑의 양식을 따라 만들어졌다. [3]
보유 석탑
- 여주 고달사지 승탑
- 여주 고달사지 석조대좌
-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
-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
- 여주 고달사지 쌍사자 석등
설화
- 신라시대에 고달(高達)이라는 승건이 창건했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사냥꾼이던 고달은 사슴 한 마리를 사냥하게 되었는데, 화살을 맞고 사슴이 달아나게 되었다. 사슴의 핏자국을 따라가다 보니 불상을 모신 굴이 있었고, 그 불상에 화살이 꽂혀 있었다고 한다. 고달은 그 불상을 보며 부처님이 자신이 살생을 많이 하는 것을 훈계하기 위해 부처님이 사슴으로 변신해서 자기를 인도한 것임을 깨닫고, 그 자리에서 활과 살을 꺾어버린 뒤 수행하여 스님이 되었다고 한다. [4]
- 고달원 입구‘신털이봉'이 생긴 사연
원종대사 찬유는 중국에 수기설법을 유학하고 돌아와 선풍을 진작시켰다. 그는 고려 태조, 혜종, 정종, 광종으로부터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 특히 고려 광종의 개혁에 큰 힘을 보태어 953년(광종 4) 국사로 책봉되었다고 한다. 만년에 고달사로 내려와 머물면서 대찰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수기설법(隨機說法)은 마치 깊은 골짜기에서 부는 회오리바람 소리와 같고, 인연 따라 감응하는 것은 맑은 못에 비치는 달그림자와 같았다,“누더기를 입은 납자(衲子)가 바람처럼 찾아오고, 대중공양을 올리기 위해 오는 이가 구름과 같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수많은 스님이 이곳을 찾아올 때 고달원 입구 500m 전에서 짚신을 턴 흙이 쌓여 신털이봉이 생겨났다고 한다.[5]
출처
- ↑ 신라시대에 세워졌음에도 고려시대 건축물로 넣은 이유는 고려 광종 이후 큰 절로 성장하였기 때문이며, 고려의 3대 사찰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또한 석탑들은 대부분 고려시대 때 만들어졌다.
- ↑ https://www.museum.go.kr/site/main/relic/recommend/view?relicRecommendId=16858
- ↑ 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jsessionid=T35KoUR6Mlbc23z3N9BBlaadK5nFfis3aRPd1AjacNC1kRsynB4zgMqyseonQcGC.cpawas_servlet_engine1?pageNo=1_1_2_0&ccbaCpno=1111100860000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3371
- ↑ http://www.ibulgy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