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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척불정책에 의하여 수덕사는 전대에 비하여 운영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고, 사세도 많이 위축된 것으로 보인다. 대웅전을 제외한 건축물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것이 그 결과로 보인다. 1920년대 신문 취재 기사에서는 예산의 대표적 사찰로서 수덕사 대신 인근의 정혜사와 보덕사가 소개될 정도였다. 이러한 점에서 수덕사가 현재의 위상을 회복하게 된 데에는 승려 경허(鏡虛)[1846~1912]와 만공(滿空)[1871~1946]<ref>경허의 문하인 만공은 특히 간화선(看話禪) 중심의 한국 불교계를 중흥시킨 대표적 인물이다.</ref>의 공이 절대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ref>http://www.grandculture.net/yesan/toc/GC06601034</ref> | 조선시대 척불정책에 의하여 수덕사는 전대에 비하여 운영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고, 사세도 많이 위축된 것으로 보인다. 대웅전을 제외한 건축물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것이 그 결과로 보인다. 1920년대 신문 취재 기사에서는 예산의 대표적 사찰로서 수덕사 대신 인근의 정혜사와 보덕사가 소개될 정도였다. 이러한 점에서 수덕사가 현재의 위상을 회복하게 된 데에는 승려 경허(鏡虛)[1846~1912]와 만공(滿空)[1871~1946]<ref>경허의 문하인 만공은 특히 간화선(看話禪) 중심의 한국 불교계를 중흥시킨 대표적 인물이다.</ref>의 공이 절대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ref>http://www.grandculture.net/yesan/toc/GC06601034</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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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화=== | ||
+ | 창건설화는 두 가지가 전해지고 있다. | ||
+ | 수덕도령과 덕숭낭자 이야기 | ||
+ | 수덕이라는 도령이 사냥을 갔다가 먼발치에서 덕숭낭자를 보고 상사병에 빠진다. 끈질긴 청혼에 덕숭낭자는 자기집 근처에 절을 지어달라는 조건을 내건다. 수덕도령은 욕심속에 절을 지었으나 완공 직전에 불이 나서 절이 소실되게 된다. 절을 짓기를 반복하다 세번째는 탐욕을 내려놓고 부처님만 생각하여 절을 완공하였다. 그런데 약속대로 결혼은 하였으나 낭자는 도령의 손길을 거부하였다. 도령이 덕숭낭자를 끌어안는 순간 뇌성벽력이 일면서 낭자는 사라지고 버선 한쪽만 쥐어 있었다. 낭자는 관세음보살의 화신이었으며 그 자리는 바위로 변하고 옆에는 하얀 버선꽃이 피어난다. 그 후 수덕사는 도령의 이름을 따고 덕숭산은 낭자의 이름을 따서 덕숭산 수덕사라 하였다는 전설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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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중창불사에 관련된 이야기 | ||
+ | 절은 백제시대에 창건되어 통일신라에 이르러서는 대대적으로 보수공사를 해야 할 정도로 오래되었다. 당시 스님들로서는 불사금 조달이 어려운 와중에 묘령의 여인이 공양주를 자청하여 절에 찾아왔다. 그런데 미모가 뛰어나 많은 이가 찾아오게 되었고 대부호의 아들인 정혜라는 청년이 청혼을 하기에까지 이르렀다. 불사가 완성되면 청혼에 응하겠다고 말하자 청년은 가산을 보태어 불사기간을 앞당겼다. 낙성식 후 하산을 재촉하자 잠시 시간을 달라며 여인이 방을 나가려고 하기에 그녀를 잡았는데 순간 옆에 있던 바위가 갈라지며 여인은 버선 한짝만 남기고 사라졌다. 그로부터 봄이 되면 버선꽃이 피어나게 되었고 관세음보살의 현신이었던 그 여인의 이름을 따서 수덕사라 하였다고 전해진다. | ||
==소속 문화재== | ==소속 문화재== |
2023년 12월 8일 (금) 18:46 판
수덕사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여기로
사찰 소개
개요
수덕사(修德寺)는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덕숭산에 있으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7교구 본사로 충남 일원의 36개 말사를 관장하고 있다. 수덕사는 백제 때에 창건되어 내려오는 유서깊은 고찰이며 내포땅 가야산의 가장 이름 높은 명승지이기도 하다. 수덕사 뒤 덕숭산 정상부에는 선방인 정혜사와 여러 토굴들이 산재해 있다. 그 가운데 하나인 금선대에서는 경허, 만공, 혜월스님의 영정이 모셔져 있으며, 덕숭산 꼭대기에 위치한 전월사는 만공스님이 말년을 주로 보낸 곳이라 한다. 그 근처에 세계일화라고 쓰여진 탑이 만공스님 부도탑으로 대한민국 등록문화재 제473호이다. 또한 우리나라 4대 총림의 하나인 덕숭총림(德崇叢林)이 있으며, 많은 수도승들이 정진하고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백제의 중 혜현이 이곳에서 삼론을 공부했다고 전해진다. 산 위에는 비구(남자 중)가 거처하는 정혜사가 있으며, 서쪽에 비구니(여자 중)가 사는 총림이 있다. 관음 바위, 미륵 석불, 만공탑, 전원사 등이 있다. 특히 담징이 그린 대웅전 벽화가 유명하다.
수덕사는 완만한 산의 구릉을 따라 삼단과 석축을 쌓고 가장 위쪽에 대웅전을 배치한 전형적인 산지형 가람으로 도입·전개·결과의 연속성과 상승효과를 통한 대웅전을 강조하고 있다. 도입부는 속세로부터 사찰로 들어서는 것을 의미하며 전개부는 시계의 갑작스러운 변화를 유도하여 시선을 집중시킨다. 그리고 결말부는 핵심공간으로 역할과 기능을 강조하는 대웅전이 위치해 있으며 동선의 배치와 뛰어난 구조미로 완성된다. [1]
역사
창건에 대한 뚜렷한 기록이 없어 창건설화가 분분하나, 사기(寺記)에는 백제 말에 숭제법사(崇濟法師)에 의하여 창건되었다고 하며 제30대 무왕 때 혜현(惠現)이 『법화경』을 강론하였고, 고려 제31대 공민왕 때 나옹(懶翁)이 중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 척불정책에 의하여 수덕사는 전대에 비하여 운영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고, 사세도 많이 위축된 것으로 보인다. 대웅전을 제외한 건축물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것이 그 결과로 보인다. 1920년대 신문 취재 기사에서는 예산의 대표적 사찰로서 수덕사 대신 인근의 정혜사와 보덕사가 소개될 정도였다. 이러한 점에서 수덕사가 현재의 위상을 회복하게 된 데에는 승려 경허(鏡虛)[1846~1912]와 만공(滿空)[1871~1946][2]의 공이 절대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3]
일화
창건설화는 두 가지가 전해지고 있다.
수덕도령과 덕숭낭자 이야기 수덕이라는 도령이 사냥을 갔다가 먼발치에서 덕숭낭자를 보고 상사병에 빠진다. 끈질긴 청혼에 덕숭낭자는 자기집 근처에 절을 지어달라는 조건을 내건다. 수덕도령은 욕심속에 절을 지었으나 완공 직전에 불이 나서 절이 소실되게 된다. 절을 짓기를 반복하다 세번째는 탐욕을 내려놓고 부처님만 생각하여 절을 완공하였다. 그런데 약속대로 결혼은 하였으나 낭자는 도령의 손길을 거부하였다. 도령이 덕숭낭자를 끌어안는 순간 뇌성벽력이 일면서 낭자는 사라지고 버선 한쪽만 쥐어 있었다. 낭자는 관세음보살의 화신이었으며 그 자리는 바위로 변하고 옆에는 하얀 버선꽃이 피어난다. 그 후 수덕사는 도령의 이름을 따고 덕숭산은 낭자의 이름을 따서 덕숭산 수덕사라 하였다는 전설이다.
대중창불사에 관련된 이야기 절은 백제시대에 창건되어 통일신라에 이르러서는 대대적으로 보수공사를 해야 할 정도로 오래되었다. 당시 스님들로서는 불사금 조달이 어려운 와중에 묘령의 여인이 공양주를 자청하여 절에 찾아왔다. 그런데 미모가 뛰어나 많은 이가 찾아오게 되었고 대부호의 아들인 정혜라는 청년이 청혼을 하기에까지 이르렀다. 불사가 완성되면 청혼에 응하겠다고 말하자 청년은 가산을 보태어 불사기간을 앞당겼다. 낙성식 후 하산을 재촉하자 잠시 시간을 달라며 여인이 방을 나가려고 하기에 그녀를 잡았는데 순간 옆에 있던 바위가 갈라지며 여인은 버선 한짝만 남기고 사라졌다. 그로부터 봄이 되면 버선꽃이 피어나게 되었고 관세음보살의 현신이었던 그 여인의 이름을 따서 수덕사라 하였다고 전해진다.
소속 문화재
그 외 다수
각주
- ↑ https://www.yesan.go.kr/tour/sub01_01_01_01_01.do 예산군_수덕사
- ↑ 경허의 문하인 만공은 특히 간화선(看話禪) 중심의 한국 불교계를 중흥시킨 대표적 인물이다.
- ↑ http://www.grandculture.net/yesan/toc/GC066010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