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대회"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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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월 20일과 7월 21일에도 보안회는 한어학교에서 또다시 대규모 시민대회를 개최했다. 이 대회에는 회원뿐만 아니라 수천 명의 서울 시민들이 모여들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시민대회의 연단에 오른 연사들은 일본의 대한 제국 산림·천택·원야·진황지 개간 이권 요구를 격렬하게 성토하고, 송수만과 송인섭을 일본 측에서 부당하게 체포 구금하고 있는 것을 강력하게 규탄했다. | ||
7월 21일 시민대회에서 획기적이었던 일은 보안회가 서울에 있는 각국 공사관들과 외교 활동을 전개한 것이다. 보안회는 시민대회의 결의를 대한 제국 정부뿐만 아니라 미국·영국·프랑스·독일 등을 비롯한 각국 공사관에도 알리고 협조를 요청했다. 국제 외교활동을 통한 투쟁은 일본 공사관이 가장 두려워하던 활동이었다. 일본 공사관은 이날 무장한 일본군 약 100여 명을 대회장에 투입하여 모인 군중들을 위협했다. 보안회의 민족운동이 격화되고 비판과 공격의 화살이 대한 제국 정부로 날아들자 외부는 7월 20일자로 일본공사에게 보낸 회답문을 공개했다. 외부는 이 회답문에서 일본 공사에게 한국 정부는 어떠한 외국인에게도 한국의 황무지 개간권을 허여(許與)하지 않겠다는 뜻을 전했다. | 7월 21일 시민대회에서 획기적이었던 일은 보안회가 서울에 있는 각국 공사관들과 외교 활동을 전개한 것이다. 보안회는 시민대회의 결의를 대한 제국 정부뿐만 아니라 미국·영국·프랑스·독일 등을 비롯한 각국 공사관에도 알리고 협조를 요청했다. 국제 외교활동을 통한 투쟁은 일본 공사관이 가장 두려워하던 활동이었다. 일본 공사관은 이날 무장한 일본군 약 100여 명을 대회장에 투입하여 모인 군중들을 위협했다. 보안회의 민족운동이 격화되고 비판과 공격의 화살이 대한 제국 정부로 날아들자 외부는 7월 20일자로 일본공사에게 보낸 회답문을 공개했다. 외부는 이 회답문에서 일본 공사에게 한국 정부는 어떠한 외국인에게도 한국의 황무지 개간권을 허여(許與)하지 않겠다는 뜻을 전했다. | ||
− | + | 7월 22일 열린 한어학교의 시민대회 도중 일본 경찰이 들어와 보안회원들을 총으로 위협하며 원세성, 심상진 등 회원들을 체포했다. 일본군이 무력을 이용하여 한어학교를 완전히 폐쇄하였으나, 보안회원들은 이에 굴복하지 않고 종로로 나와 시민들과 함께 가두 투쟁을 시작했다. 일본 기마헌병대들이 권총과 일본도를 휘두르며 위협하였으나 보안회 회원들과 시위 군중들은 전혀 해산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더욱 분노하여 격렬한 가두 투쟁을 계속했다. 날이 어두워져도 가두 투쟁의 열기는 식지 않았다. 황제가 칙령을 내려 밤이 늦었으니 해산하도록 설득했으나 군중은 듣지 않고 투쟁을 계속했다. 결국 이날 밤 11시가 되자 일본 헌병대는 수백 명의 무장한 헌병들을 추가로 출동시켰고, 보안회는 어둠 속에서 무장한 일본 헌병대와 충돌하면 살상자가 발생할 것을 염려하여 일단 해산을 결정했다. 7월 22일 오전 9시부터 밤 11시까지 이어진 집회와 시위, 가두 투쟁은 보안회의 민족 운동이 절정을 이룬 것이었으며, 또 일본군 정면으로 가장 격렬하게 대치한 운동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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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 11일 (월) 20:44 판
7월 20일과 7월 21일에도 보안회는 한어학교에서 또다시 대규모 시민대회를 개최했다. 이 대회에는 회원뿐만 아니라 수천 명의 서울 시민들이 모여들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시민대회의 연단에 오른 연사들은 일본의 대한 제국 산림·천택·원야·진황지 개간 이권 요구를 격렬하게 성토하고, 송수만과 송인섭을 일본 측에서 부당하게 체포 구금하고 있는 것을 강력하게 규탄했다. 7월 21일 시민대회에서 획기적이었던 일은 보안회가 서울에 있는 각국 공사관들과 외교 활동을 전개한 것이다. 보안회는 시민대회의 결의를 대한 제국 정부뿐만 아니라 미국·영국·프랑스·독일 등을 비롯한 각국 공사관에도 알리고 협조를 요청했다. 국제 외교활동을 통한 투쟁은 일본 공사관이 가장 두려워하던 활동이었다. 일본 공사관은 이날 무장한 일본군 약 100여 명을 대회장에 투입하여 모인 군중들을 위협했다. 보안회의 민족운동이 격화되고 비판과 공격의 화살이 대한 제국 정부로 날아들자 외부는 7월 20일자로 일본공사에게 보낸 회답문을 공개했다. 외부는 이 회답문에서 일본 공사에게 한국 정부는 어떠한 외국인에게도 한국의 황무지 개간권을 허여(許與)하지 않겠다는 뜻을 전했다. 7월 22일 열린 한어학교의 시민대회 도중 일본 경찰이 들어와 보안회원들을 총으로 위협하며 원세성, 심상진 등 회원들을 체포했다. 일본군이 무력을 이용하여 한어학교를 완전히 폐쇄하였으나, 보안회원들은 이에 굴복하지 않고 종로로 나와 시민들과 함께 가두 투쟁을 시작했다. 일본 기마헌병대들이 권총과 일본도를 휘두르며 위협하였으나 보안회 회원들과 시위 군중들은 전혀 해산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더욱 분노하여 격렬한 가두 투쟁을 계속했다. 날이 어두워져도 가두 투쟁의 열기는 식지 않았다. 황제가 칙령을 내려 밤이 늦었으니 해산하도록 설득했으나 군중은 듣지 않고 투쟁을 계속했다. 결국 이날 밤 11시가 되자 일본 헌병대는 수백 명의 무장한 헌병들을 추가로 출동시켰고, 보안회는 어둠 속에서 무장한 일본 헌병대와 충돌하면 살상자가 발생할 것을 염려하여 일단 해산을 결정했다. 7월 22일 오전 9시부터 밤 11시까지 이어진 집회와 시위, 가두 투쟁은 보안회의 민족 운동이 절정을 이룬 것이었으며, 또 일본군 정면으로 가장 격렬하게 대치한 운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