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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석재 서병오는 흥선대원군 문하에 드나들며 서울의 문사들과 교류하기 시작했다. 1901년을 전후하여 중국 상해로 가서 그때 그곳에 망명중이던 민영익과 친밀히 교유하면서 중국인 서화가 포화, 오창석 등과 가까이 접촉하여 많은 영향을 받기도 했다. 김진만, 배효원, 서동균과 성재휴가 그의 영향을 받은 제자이다. | |
==영향 및 평가== | ==영향 및 평가== |
2023년 12월 8일 (금) 20:51 판
인적사항
이름 = 서병오
한문 = 徐丙五
호 = 석재(石齋)
출생지 = 대구
출생연도 = 1862년
사망연도 = 1935년
본관 = 달성(達城)
생애
유년시절
서병오는 3남 중 차남으로 태어나 숙부인 서상혜에게 양자로 입양되었다. 그는 어린시절 명민한 개구쟁이로 동네에 소문이 자자했으며 아버지의 엄한 훈육하에 매일 전지에 글씨 쓰는 심부름을 하며 자랐다. 동화사에 시주한 석재의 집안으로 어린 석재는 맑은 경치를 벗삼아 호연지기를 길렀다. 13세가 되던 해에 허훈, 곽종석, 서석지 등을 선생으로 모셔 그는 시작과 글씨에 상당히 능하게 되었다.
관직생활 및 활동
석재는 29세에 성균관 진사에 급제한 뒤 1896년에 서병오는 대구부 주사에 임명되어 관직 생활을 했다. 그러나 그동안의 학예에 전념하고 자유분방했던 생활을 해온 그는 적응하지 못하고 행정치적을 쌓지 못해 취임 후 얼마 뒤 공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대구를 중심으로 국내에서도 다양한 활동을 했다. 1906년 대구의 자강운동단체인 대구광문사 설립에 참여했고, 농공은행의 전무이사를 역임했다. 1907년에는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했다. 1908년에는 대한 협희의 대구지회 평의원으로 활동했다. 이후 신녕군수로 10여 일간 재직했으며 남한제정합자회사 설립 추진, 공호상회 설립, 대구은행 감사 역임 등의 활동을 했다.
작품 활동
주요 작품
관련 인물
석재 서병오는 흥선대원군 문하에 드나들며 서울의 문사들과 교류하기 시작했다. 1901년을 전후하여 중국 상해로 가서 그때 그곳에 망명중이던 민영익과 친밀히 교유하면서 중국인 서화가 포화, 오창석 등과 가까이 접촉하여 많은 영향을 받기도 했다. 김진만, 배효원, 서동균과 성재휴가 그의 영향을 받은 제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