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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에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1632 개벽사]에서 취미와 가벼운 읽을거리를 위해 창간한 월간잡지인 『별건곤(別乾坤)』을 설명하는 페이지이다.</br>
 
1926년에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1632 개벽사]에서 취미와 가벼운 읽을거리를 위해 창간한 월간잡지인 『별건곤(別乾坤)』을 설명하는 페이지이다.</br>
개벽사는 기존의 방탕하고 비열한 내용만을 수록한 잡지를 극복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창간되었다. 『별건곤』에 「조선 자랑호」, 한용운(韓龍雲), 이상협(李相協) 등의 「생활개선안」과 「교육계·독서계·문단·공업계·종교계 등의 최근 10년간의 변천」(5권 1호), 언론계 등 각계의 인사들의 「조선은 어디로 가나?」라는 글이 실렸다는 점에서 『별건곤』이 단순한 취미 잡지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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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벽사는 기존의 방탕하고 비열한 내용만을 수록한 잡지를 극복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별건곤』을 창간하였다. 『별건곤』에 「조선 자랑호」, 한용운(韓龍雲), 이상협(李相協) 등의 「생활개선안」과 「교육계·독서계·문단·공업계·종교계 등의 최근 10년간의 변천」(5권 1호), 언론계 등 각계의 인사들의 「조선은 어디로 가나?」라는 글이 실렸다는 점에서 『별건곤』이 단순한 취미 잡지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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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 7일 (목) 18:54 판

『별건곤』 창간호

개요

1926년에 개벽사에서 취미와 가벼운 읽을거리를 위해 창간한 월간잡지인 『별건곤(別乾坤)』을 설명하는 페이지이다.
개벽사는 기존의 방탕하고 비열한 내용만을 수록한 잡지를 극복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별건곤』을 창간하였다. 『별건곤』에 「조선 자랑호」, 한용운(韓龍雲), 이상협(李相協) 등의 「생활개선안」과 「교육계·독서계·문단·공업계·종교계 등의 최근 10년간의 변천」(5권 1호), 언론계 등 각계의 인사들의 「조선은 어디로 가나?」라는 글이 실렸다는 점에서 『별건곤』이 단순한 취미 잡지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의의

「대구사회단체개관」

시인 이육사는 1930년 10월에 이활(李活), 대구이육사(大邱二六四)라는 이름으로 수필 「대구사회단체개관」을 기고했다.

전문

대구사회단체개관 이활(대구 이육사)

전국적으로 폭풍우가 치밀려오는 탄압이 나날이 그 범위가 넓어지고 그 수가 앙양됨을 따라 일찍이 보지 못하던 수난기에 있는 조선의 사회운동이란 것이 일률적으로 침체라는 불치의 병에 걸려있으니 다같이 관심하는 바와 같이 이 간난고극한 국면을 대국적으로 어느 신방향에 타개하기전에는 혹 지방을 따라 다소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도저히 활기있는 진출을 보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럼으로 이 대구에 있는 사회단체를 제목과 같이 개관적으로나마 소개하려함에 무엇보담도 먼저 필자의 흥미가 십분이나 감살되는 것은 너무나 소침된 현상이 가히 이렇다고 할만한 무엇을 매거할 수 없으리만치 한산해서 그 지도인물들도 혹 필사의 노력으로 진영을 지키다가도 마침내 세궁역진해서 칠영팔락이 되어 몇 개 단체의 회관이란 마치 전후의 황원과 가이 소조낙막한 감이 없지 않으니 대체로 이 침체라는 것은 그 원인을 두 곳에서 가려 볼 수가 있는 것이니 그 하나를 외래의 억압이라면, 다른 하나는 자체의 부진이란것도 피할수 없는 엄연한 한 사실이다. 그러나 자체의 부진과 외래의 억압이 양면적으로 한 침체의 현상을 이룬 것을 가지고 이 두가지 중에서 어느 것이 근인이 되며 어느 것이 원인이 되는 것을 가리는 것은 마치 닭과 달걀의 선후를 가리는 것과 같이 심히 어려운 일이나 서북선의 일반사회운동이 남선의 그것보다 얼마나 더 활기있는 진출을 하고 있다는 것을 들을 때 다 같은 억압의 밑에서도 남북의 이만한 차이가 있다는 것은 남조선지방의 전투분자가 아직도 그 보무가 용감치못한 자체의 부진이란 책임을 안질수가 없는 것이다. 항상 전위에 나선 용자가 희생을 당하면 잇닿아 있는 곳 진영을 지키고 후임을 계승할만한 투사가 끊어져 투의 몇을 소개한다면 아래와 같다.

1. 대구청년동맹

1927년 7월 24일에 창립하였으니 당시에 전선적 합동운동이 농후한 기운에 따라 대구청년회, 아구청년동맹 서울신우단, 청년동맹, 무산청년회 등이 합동해서 대구청년동맹이 창설되고 제1세집행위원장으로는 현하제4차공청년사건으로 재감중인 張赤宇군이 취임해서 회원이 약 130명 가량으로 허다한 활약을 하다가 마침내 그 사건으로 영어의 몸이 되고 또한 언론집회의 자유를 점점 상실함을 따라 일체의 집회와 심지어 위원회까지 잘 열지못하게 되어 거의 폐문태로 현하는 朴明基씨가 집행위원장으로 있으나 아무 사회적 능솔을 낼 수가 없이 그냥 침묵상태로 있다. 그러나 대세의 소장하는 한토막만으로서 장구한 미래를 결정할 수는 없는 것이 오늘날의 일시적 침체로서 달팔십을 그대로 기다릴수는 더구나 없는 것이니 모름직이 필사적 노력으로 이 한산한 진용을 활기있게 정돈해서 간난한 국면을 타개해 나가기를 바래서 마지 아니하는 것이다.

2. 대구소년동맹

1924년 7월 27일에 소년혁영회, 개조단, 노동소년회, 현조단의 4개단체가 합동해서 대구소년동맹이 창립되는데 그 중에 대구소년회는 金英波군의 합동의 주지를 불긍히 여겨 중도에서 탈한 일도 있었으나 대구소년동맹은 회원 150명으로서 제1세 위원장을 孫基埰군으로 하여 대중적 훈련과 자체교양 같은 데에 많은 노력을 해오다가 지금은 朴柄喆군이 집행위원장으로서 다소의 활약을 하니 역시 비전해서는 매우 침체한 상태로 별로 매거할 역할을 하지 못하는 중이다.

3. 신간회대구지회

1927년 9월 3일에 창립되었으나 민족적 단일당의 총역량을 집중하는 신간활동의 맹렬한 기세가 전국적으로 파급될 때 창립당시 회원이 200명으로서 제1세 회장 李慶熙씨가 통솔하고 대중적 훈련에 자못 활기를 뻗치다가 이 또한 점점 위미부진한 상태에 이르러서 지금은 회원수가 호왈 백만의 감이 없지않으며 대회석상같은데는 임석경관과 집합회원의 수효가 거의 비등할만한 영성한 상태로서 일찍이 어느 임시대회때 서기장 柳淵述씨가 눈물을 흘리며 비장한 어조로 한산한 진영을 통탄한 일도 있었으나 마침내 더 진전됨이 없이 위원장 宋斗換씨의 꾸준한 노력으로 그냥 추과해 나가나 역시 회원자체의 명확한 의식과 견인한 용기를 고무해서 엇지튼 현단계의 대중을 수용하는 신간운동을 의식적으로 지지하는 질적으로 충실한 회원이 늘어가기를 바라는 것이다.

4. 근우회 대구지회

1928년 2월 27일에 창립되여서 회원수가 약 150명 가량으로 위원장 李春壽씨의 은인자중하는 노력으로 현하의 난국면을 당해서도 그냥 회원을 통솔해 나가며 사회적으로 대서특서할만한 공과를 낳아내지는 못하였으나 회원자체내에 있어서는 월례토론회 같은 자체교양에 매우 주력하며 이번 팔공산 일대의 수해에는 다른 단체보다 먼저 솔선해서 회원들끼리에게 모은 의복수 70여점을 가지고 위원45인이 산로사십여리의 화해지를 발섭해서 일반나화민에게 분배해준 일도 있었으며 여하튼 불항불소한 활동이 그다지 침체하지는 않으니 이 현상으로나마 훨씬 더 일반가정부인에게 근우운동을 침수시켜서 거기에 혁고한 진세를 베푸는 것이 일책이 아닐까 한다.

5. 경북형평사 대구지사

1912년에 창립되었는데 회원은 약50명 가량에 불과하나 자체의 통일에 있어서는 어느 단체보다 제일 성적이 좋다고 하며 지사장 金春三씨의 운신적 열성으로 창립이래로 지금까지 사무를 장리하며 부내에만 있는 수육판매점의 수가 3백을 초과하니 모두 단결과 통일이 매우 혁고히 되어있다니 그만한 역량으로 좀더 사회적 능솔을 내기를 바란다.

6. 경북청년연맹

1928년 1월 7일에 경북 김천에서 기자동맹이 창립된 직후 곳 인해서 경북청년연맹이 되니 경북에 있는 각 청년동맹과 또 세포에 포용되었던 전위분자들의 총결속인지라 가장 전투적 기세로 제1세 위원장 洪甫容씨가 취임하야 여하의 활약을 하다가 ML당 사건으로 투옥됨에 간부들은 모두 영락되고 간판조차 부지불식중에 뉘손으로 띠어지고 말었으니 이것은 정식으로 해체한 일도 없이 인제는 대구인의 기억에 조차 사라진 요사단체가 있다.

여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