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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서울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로, 회(會)의 명칭은 ‘보국안민(輔國安民)’을 뜻한다. <ref>“나라 일을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뜻으로 최제우(崔濟愚, 1824~1864)가 동학을 창도할 때에 외세로부터 국권을 지킬 것을 강조한 계책이다.</ref></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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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7월 13일, 서울 종로 백목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로, 회(會)의 명칭은 ‘보국안민(輔國安民)’을 뜻한다. <ref>“나라 일을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뜻으로 최제우(崔濟愚, 1824~1864)가 동학을 창도할 때에 외세로부터 국권을 지킬 것을 강조한 계책이다.</ref></br>
창립 이후 단 1개월 정도의 짧은 기간 동안 활동했음에도 민중의 폭넓은 지지를 얻으며 일제의 무력 위협에 대항했다.</br>보안회의 민족 운동은 대한 제국 정부를 움직여 결국 일제의 황무지 침탈을 저지하는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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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안회 회원들은 일제의 황무지 침탈을 저지하는 목적을 달성했으므로 창립 당시 강령에 따라 보안회를 사실상 해체하여 종결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이 원세성 등을 체포하고 석방하지 않는 것을 보고, 보안회의 속개를 준비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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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9일 전동의 입전 도가(立廛 都家)에서 약 70여 명의 속개 준비 회원들이 모여 이건석(李建奭)을 회장을 선출하며 보안회를 다시 열었다. 그러자 곧바로 일본 헌병대와 경관들이 와서 ''회장 이건석을 체포''하였다. 일본군 헌병사령관은 새로운 회명을 짓고 사전허락을 받을 것을 요구했고, 회원들은 새로운 출발의 의미로 9윌 11일에 회의 명칭을 ‘협동회(協同會)’로 개칭하여 운동을 계속하기로 결의했다. 협동회의 활동은 일제의 견제를 받아 점차 위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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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 보안회 기사.png|400px|center|황무지 개간 반대 운동을 주도한 보안회의 신문 기사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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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 이후 단 1개월 정도의 짧은 기간 동안 활동했음에도 민중의 폭넓은 지지를 얻으며 일제의 무력 위협에 대항했다.</br>보안회의 민족 운동은 대한 제국 정부를 움직여 결국 '''일제의 황무지 침탈을 저지하는데 성공'''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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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안회가 대한 제국 정부의 금령과 일제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성공함으로써, 그 뒤를 이어 애국계몽운동 단체들이 연달아 창립되고 '''구국 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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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 6일 (수) 15:39 판

보안회 (保安會)

정의

1904년 7월 13일, 서울 종로 백목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로, 회(會)의 명칭은 ‘보국안민(輔國安民)’을 뜻한다. [1]


설립 배경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일어난 뒤 전세가 일본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자 일본은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 체결을 강요하고, 이어서 각종 이권을 탈취하는 등 경제적 침탈을 강화하였다.

6월에 나가모리(長森藤吉郎)가 어공원(御供院) 소관의 산림, 천택(川澤)과 황무지 개간권을 이양 받고자 일본공사를 통해 대한제국 정부에 압력을 가해왔다. 이에 유학(幼學)과 품관(品官)들은 반대 상소운동을 벌였고, 각 언론기관도 반대 사설을 실어 여론 형성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일제가 이 계획을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보다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반대운동을 벌여야 할 필요성을 느낀 송수만(宋秀萬), 심상진(沈相震)등이 1904년 7월 13일서울 종로 백목전(白木廛)에서 중민회의(衆民會議)를 열어 보안회를 발기하였다.



활동

해산

일본의 황무지 점탈 계획이 저지당한 뒤, 일본군은 회장 원세성과 회원 신형균·이범석 등을 다시 체포하는 등 보안회에 대한 보복을 자행했다. 또한 한국 국민들을 위협할 목적으로 8월 1일 저녁 서울 시내 중요한 거리에 일본군 병참사령부 표목을 박았다. 서울이 일본군 지배하에 있음을 한국 국민들에게 상기시키고, 1904년, 한일의정서에 따라 일본군이 군사상 필요한 토지를 수용할 수 있다고 위협하기 위한 행위였다.
보안회 회원들은 일제의 황무지 침탈을 저지하는 목적을 달성했으므로 창립 당시 강령에 따라 보안회를 사실상 해체하여 종결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이 원세성 등을 체포하고 석방하지 않는 것을 보고, 보안회의 속개를 준비했다.

8월 29일 전동의 입전 도가(立廛 都家)에서 약 70여 명의 속개 준비 회원들이 모여 이건석(李建奭)을 회장을 선출하며 보안회를 다시 열었다. 그러자 곧바로 일본 헌병대와 경관들이 와서 회장 이건석을 체포하였다. 일본군 헌병사령관은 새로운 회명을 짓고 사전허락을 받을 것을 요구했고, 회원들은 새로운 출발의 의미로 9윌 11일에 회의 명칭을 ‘협동회(協同會)’로 개칭하여 운동을 계속하기로 결의했다. 협동회의 활동은 일제의 견제를 받아 점차 위축되었다.


역사적 의의

  • 보안회에서 벌인 황무지개척 반대운동은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를 방불하게 하는 민중 구국운동이었다. 이로 인해 일제는 1908년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설치될 때까지 황무지개척권에 관한 거론을 유보하게 되었다.


황무지 개간 반대 운동 사진이다.
황무지 개간 반대 운동을 주도한 보안회의 신문 기사 사진이다.
  • 창립 이후 단 1개월 정도의 짧은 기간 동안 활동했음에도 민중의 폭넓은 지지를 얻으며 일제의 무력 위협에 대항했다.
    보안회의 민족 운동은 대한 제국 정부를 움직여 결국 일제의 황무지 침탈을 저지하는데 성공했다.
  • 보안회가 대한 제국 정부의 금령과 일제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성공함으로써, 그 뒤를 이어 애국계몽운동 단체들이 연달아 창립되고 구국 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각주

  1. “나라 일을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뜻으로 최제우(崔濟愚, 1824~1864)가 동학을 창도할 때에 외세로부터 국권을 지킬 것을 강조한 계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