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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년기에는 중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광복군 일원으로 활약했고, 이후 대한민국에서 중국사와 공산주의 연구에 평생을 바친 학자로 고려대학교의 영원한 총장이자 큰 스승으로 기억되는 사람이다. | 초년기에는 중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광복군 일원으로 활약했고, 이후 대한민국에서 중국사와 공산주의 연구에 평생을 바친 학자로 고려대학교의 영원한 총장이자 큰 스승으로 기억되는 사람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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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23년 8월 26일 평안북도 강계군 시중면 외시천동 254 (現 자강도 시중군 시중읍) | *출생: 1923년 8월 26일 평안북도 강계군 시중면 외시천동 254 (現 자강도 시중군 시중읍) |
2023년 12월 5일 (화) 10:54 판
목차
목차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사학자, 교육자. 본관은 충주(忠州).
초년기에는 중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광복군 일원으로 활약했고, 이후 대한민국에서 중국사와 공산주의 연구에 평생을 바친 학자로 고려대학교의 영원한 총장이자 큰 스승으로 기억되는 사람이다.
정보
- 출생: 1923년 8월 26일 평안북도 강계군 시중면 외시천동 254 (現 자강도 시중군 시중읍)
- 사망:2011년 6월 7일 (향년 87세)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동 고려대학교 안암병
- 본관:충주 김씨
- 학력:신의주고등보통학교 (졸업)
게이오기주쿠대학 문학부 (예과 / 중퇴)
국립중앙대학 문학원 (사학 / 석사 중퇴)
국립타이완대학 문학원 (사학 / 석사 수료) - 직업:독립운동가, 교육
- 종교:무교
- 가족:아내 민영주, 외동아들 김홍규
- 묘소: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397호
- 훈장:건국훈장 애국장
국민훈장 무궁화장추서
중국어언문화우의장
생애
1.일제강점기
1923년 평안북도 강계군 시중면 외시천동 254번지(현 자강도 시중군 시중읍)에서 직조공장을 경영한 대지주 김종걸(金宗傑)과 모친 홍종식 사이의 4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나 비교적 유복한 유년기를 보냈다. 형제 많은 집의 막내아들이다 보니 부모님과 윗형제들로부터 많은 사랑과 귀여움을 받았다고 한다. 그의 선대는 조선 성종 때 이래로 평안북도 벽동군에 세거하였는데, 조부 김봉구(金鳳九) 대에 이르러 강계군으로 이주하여 살아왔다. 독립운동가였던 둘째 형의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항일의식을 길렀다. 강계에서 소학교를 마친 뒤 1935년 신의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는데 압록강 건너 안동을 자주 왔다갔다 했다. 김준엽이 중국에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 중 하나가 됐다. 파일:대학생김준엽.pngl200pxlcenterl일본 게이오기주쿠대학 유학시절
1944년 일본 게이오기주쿠대학 문학부 예과 재학도중 학도병으로 강제 징집되었다. 일본군으로 중국 장쑤성 쉬저우시에 배치된 뒤 단독으로 탈영, 같은 조선인 출신 학병 장준하와 합류하여 수천 리를 걸어(장정, 長征) 충칭에 위치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갔다. 이때가 일제가 패망하기 몇 달 전. 이후 이범석 장군의 부관이 되는 등 광복군에서 활약하며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또한 장준하 등과 더불어 미국 첩보국(OSS: CIA의 전신)의 특수훈련을 받으며 임정근 등과 함께 강원도반에 편성되어 강원도반 반장으로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하였다.
파일:광복군김준엽.pngl200pxlcenterl광복군 시절의 모습
일부에선 실질적으로 독립운동에 기여한 게 거의 없다고 폄하 하지만, 일본군에서 탈출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 등 항일독립운동단체에 합류하는 것만으로도 목숨을 거는 일이다. 일본군에 걸리면 무조건 처형이고, 국민당이든 공산당이든 중국군에 잡혀도 일본 간첩으로 오인되면 죽은 목숨이다. 뭐 다행히 한복을 입으신 어머니와 찍은 사진 덕에 오해 없이 잘 끝났지만. 이 사람은 탈출하기 위해 징집 전 나침반을 마련하여 갈 정도로 광복군에 합류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던 인물이다.
그가 탈출한 츠카다 부대는 조선인 탈영병이 나오지 않은 아주 혹독한 부대였는데, 김준엽은 그 부대에서 최초로 탈출에 성공한 조선인 병사였다. 김준엽은 훗날 그의 회고록 "장정"에서 일본군 시절 작은 실수로 인해 상관으로부터 뺨을 맞은 후 상당한 모욕감을 느꼈다고 기술했다. 김준엽은 이 때가 태어나서 뺨을 처음으로 맞은 것이었다고 언급했다. 아마 일본군의 강제징용된 한국인 병사에 대한 차별적 대우와 가혹행위의 경험이 김준엽으로 하여금 츠카다 부대를 탈출하여 광복군에 합류하는 또 다른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광복군 시절 이범석의 부관으로 있으면서 이범석의 비서였던 민영주 여사와 만나 결혼한다. 두 사람의 결혼식 주례는 이범석이 맡았다. 민영주의 집안은 독립운동가 명문인데, 아버지 민필호는 임시정부에서 김구의 판공실장(비서실장)을 지냈고, 외할아버지는 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지낸 신규식이다. 또한 민영주의 오빠 민영수도 독립운동가로 활동했다. 김준엽은 이런 처가의 이력을 긍지로 여겼다.
2.광복이후
해방 후에는 임정 요인들과 바로 귀국하지 않고 중국 난징의 국립동방어문전문학교[22]에서 한국어 강사로 근무하면서 중앙대학[23] 대학원에서도 중국사 공부를 하다가, 국공내전이 발발하면서 1949년 귀국하여 고려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부임했다.[24] 1951년 잠시 국립타이완대학에 유학했다가[25] 1955년 완전히 귀국한다. 이후 후학 양성에 힘써 1957년 교내에 아세아문제연구소를 세웠다. 이듬해 아세아문제연구소 내에 공산권 연구실을 설치했는데 한국 최초의 공산주의 전문적 연구기관으로 그는 공산주의 연구의 선구자가 되었다. 공산주의를 연구한 이유는 '통일을 위하여'. 북한과 중국의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알아야 통일을 이룰 수 있지 않겠냐는 이유였다. 그의 노력으로 아세아문제연구소는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공산권 연구기관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26][27]
또한 중국에 대해서도 생전에 깊이 연구하였고 중국에서도 인정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중국통[28][29]으로 꼽힐 정도였다. 고려대학교에 중어중문학과와 노어노문학과를 신설하기도 하였다.[30] 중국에서도 한중 관계에 대한 김준엽의 공로를 인정해 중국어언문화우의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중국 정부가 훈장을 준 최초의 사례였다.
대외활동에도 적극적이어서 1961년, 1962년, 1974년 세 차례 유엔 총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했고, 5.16 이후에는 국가재건최고회의[31]의 고문 자격으로 외교사절단의 일원으로 인도를 방문하여 자와할랄 네루를 만나기도 했다. 1955년 대만에서 귀국한 이후에는 광복군 시절의 동지 장준하가 창간한 사상계의 주간을 맡기도 했다.
정계 진출 요청이나 장관 제의를 여러번 받았으나, 학자로서 후학 양성에 집중하겠다며 모두 고사한 바 있다. 박정희 정부 시절, 민주공화당 사무총장, 국토통일원(현 통일부) 장관직을 제의받았으나 모두 사양했다.
1972년 11월, 대한적십자사 자문위원으로 평양을 방문하였다. 이때 북한에서 만난 김중린 당비서가 낯이 익어서 고향을 묻다가 신의주고보 1년 후배임을 알게 되어 회후하였다.
3.고려대총장 시절
파일:총장김준엽.pngl200pxlcenterl취임식에서 연설하는 김준엽 1982년 김상협의 뒤를 이어 고려대 총장이 되었으나, 전두환 정권의 여러가지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사사건건 맞서다 결국 1985년 졸업식과 함께 강제로 퇴임하게 된다. 총장이었을 때의 일화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하 CBS 기사 참조. 1) 하루는 학교 서무과에 노인 한 분이 방문해 "실례합니다"라고 인사하며 서무과 직원에게 뭘 부탁하려고 했다. 서무과 직원이 달갑잖은 표정을 지으며 "죄송하지만 지금 신임 김준엽 총장 취임식이 있어 저희가 정신이 없어요."라고 응답했다. 그 때 그 노인이 "그러시군요, 제가 그 김준엽입니다"라고 대답하는 통에 학교가 발칵 뒤집히기도 했다. 총장 취임을 그렇게 하신 양반이다. 2) 1983년 가을, 고려대생 수백 명이 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은 학생회관으로 들어가 출입문을 걸어 잠그고 바리케이드를 치고 농성에 들어갔다. 언제 경찰이 들이닥쳐 연행해 갈지 모르는 상황에서 두렵고 배고픈 밤이 깊어 가는데 30분마다 김준엽이 확성기로 외쳤다. "다치거나 아픈 학생 있으면 내보내라. 앰블런스가 대기하고 있어 바로 병원에 데려갈 것이니 걱정 말고 내보내라. 학생 제군 몸을 다치지 마라." 학생들은 총장이 자기들을 지켜주고 있다는 생각에 감격하며 밤을 지샜고, 역시 밖에서 밤을 지샌 김 총장은 경찰과 교섭을 벌여 다음날 아침 학생 5백 여 명이 학생회관에서 자진 철수해 모두 무사히 집으로 돌아갔다. 전두환 정권 시절 연행자 없이 끝난 유일한 시위농성이었다. 3) 이듬해인 1984년 가을, 학생들은 학도호국단이라는 관변어용 학생회를 없애고 총학생회를 부활시켰다. 이에 대응해 정권은 학생회 간부들을 제적시키라고 종용했으나 김준엽이 버티며 움직이지 않았고 다른 대학들은 고려대를 지켜보며 눈치만 살폈다. 이후 11월에는 대학생들의 민정당사 점거농성이 벌어졌는데, 이때도 학생들을 제적시키라는 정권의 압박에 끝내 학생들을 지키며 버티다 정권의 미움을 샀다. 이 때 학생들 처리 문제를 밤 늦도록 논의하다 교수들이 저녁식사를 하려는데 '제적이면 학생으로선 사망선고인데 제자들의 죽음의 위기 앞에서 밥이 넘어가냐'며 호통치고 끝내 숟가락을 들지 않았다. 4) 결국 전두환 정권은 학생이 아니라 김준엽을 자르기로 하고 압박을 가했다. 당시 대학에서 관행적으로 이루어지던 교수 등 교직원 자녀의 특례 입학을 문제로 삼으면서 '특례로 입학한 학생들을 제적시키든지, 아니면 총장을 그만두라'고 요구하고 나선 것이었다. 결국 김준엽은 자신이 총장을 그만두는 쪽을 택했다. 1985년 2월 졸업식 축사를 끝으로 김준엽은 강압에 의해 학교를 떠났다. 다른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쫓겨나고 고려대에서는 총장이 쫓겨나는 초유의 사태가 빚어진 것. 졸업식 당일날은 총장 퇴진을 반대하는 학생들이 "총장님 힘내세요"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졸업식 한쪽에 진을 치고 있었고, 이로 인해 경찰이 학내에 진주해서 기기묘묘한 진풍경이 벌어졌다(...). 1985년 신학기가 개강하자마자 총장퇴진 반대를 주장하는 학생들의 항의시위가 대대적으로 계속됐는데, 기숙사 수위의 강아지까지 따라 나섰다고 전해질 정도로 크게 벌어졌다. 당시의 시위는 대개 학생들이 경찰에게 쫓기는 것이었는데, 이때는 경찰이 학생들에게 밀리는 정도였다고(...). 훗날 김준엽은 이를 자신의 최고 자랑스러운 일로 꼽았다. "총장 물러가라"는 데모는 많았어도 물러나지 말라는 데모는 나밖에 없었다라고. 파일:반대데.pngl200pxlcenterl졸업식에서 총장사임 반대데모
4. 말년
독립운동 및 총장임기 중 업적
중국학과 공산주의 연구의 대가
고려대학 재정난 극복과 국제화 앞장서
정치권 제안에도 학계를 지켜
독재 정권의 압박에도 학생 보호
독립운동
학병 탈출과 광복군 생활
김준엽 전 총장은 신의주 고중 졸업 후 일본 게이오대 동양사학과에 진학했다. 동양사 중에서도 특히 최근세사에 관심을 갖고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조선이 망한 이유와 일본이 근대화에 성공했던 이유를 알기 위해서였다.
1943년 여름, 일본군이 조선인 대학생들도 학병으로 징집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김 총장은 학병에 입대한 후 탈출해 독립군 임시정부로 가기로 마음 먹는다. 그는 저서 <장정>에서 “학병으로 나갔다가 탈출하여 내가 동경하는 우리나라 독립군에 가담하여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내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다”고 회상했다.
김 총장은 나침반, 지도, 손목시계와 칼 등을 숨긴 채 일본군에 입대했다. 중국 전선으로 보내진 그는 그믐날인 1944년 3월 29일 새벽에 탈출할 계획을 세운다. 탈출이 발각되더라도 방향을 틀리게 쫓아오도록 거짓 쪽지도 남겼다. 새벽 2시, 성을 넘어 해자로 내려갈 때 흙이 무너져 물소리가 났다. “누구냐!(誰か!)” 김 총장은 전속력으로 뛰었다. 학병탈출 1호였다.
작은 나침반에 의지해 지도를 보고 무작정 걸어갔다. 한 마을에서 중국군에 붙잡히고 말자 조선 독립을 위해 탈출해 온 조선인임을 사실대로 밝혔다. 알고 보니 이들은 위장한 국부군계의 유격대였다. 김준엽 전 총장은 유격대에 4개월 간 머물며 여러 작전을 펼쳤다. 유격대에서 만난 조선인 출신 학병 4명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충칭까지 장정(長征)을 펼친다. 장사꾼으로 변장하기도 하고 벙어리 시늉을 하기도 했다. 김 총장은 1945년 1월 31일 일본군을 탈출한 지 10개월 만에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도착한다. 한국광복군에 합류해 이범석 장군의 부관으로 부임한다. CIA의 전신인 미국전략정보기관 OSS와 합작해 계획한 국내진공작전 공작원으로 선정돼 특수훈련을 받기도 했다. 1945년 8월 20일 펼쳐질 예정이었던 이 작전은 일제의 무조건 항복으로 무산됐다.
학자의 길을 선택하다
해방 이후 임시정부 요인과 광복군은 귀국길에 올랐다. 김구 주석과 이범석 장군 등은 김준엽 전 총장에게 새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힘을 합치자 제안했다. 청년 김준엽의 고민은 <장정>에 잘 드러난다. “정계에 투신해 벼슬길에 오를 것인가? 아니면 학자의 길을 택할 것인가? 나는 이 두 가지 갈림길을 놓고 무척이나 고민하였다.”
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위해 온 힘을 다했던 김 총장은 건국사업이 전개되는 마당에서는 정치뿐만 아니라 학계를 이끌 사람 역시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전쟁 중 중국어를 배우고, 게이오대에서 중국사를 공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중국 전문가가 되리라 다짐했다. 김 총장은 <장정>에서 “이때의 나의 선택은 일생을 지배하였다. 고대에서 정년퇴임 할 때까지 40년간 이때의 결심을 조금도 동요됨이 없이 지켜내려 왔고 수차의 벼슬 유혹이 있었으나 아무 거리낌 없이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국가발전에서 나의 역할에 대한 소신이 확고했기 때문이다”라고 언급했다.
김 총장은 1946년 2월 중국 국립 동방어문전문학교에 한국어과가 신설돼 전임강사로 취직했다. 중국 대학에 입학해 졸업하려던 김준엽 전 총장의 기존 계획과는 다소 어긋났지만 좋은 기회였기에 김 총장은 자리를 수락했다. 강의를 하며 밤낮으로 중국어와 중국사를 공부했다. 학생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동방어문전문학교가 충칭에서 난징으로 옮겨오자 김 총장은 국립중앙대학 대학원에 입학해 본격적인 연구 생활을 시작했다.
총장임기 중 업적
'가장 큰 스승’, ‘마지막 광복군’, ‘고려대의 영원한 총장’. 김준엽 전 총장을 수식하는 여러 별명이다. 그는 1949년 사학과 교수로 부임해 1985년까지 36년간 고려대학교에서 재직했다. 교수로서는 아세아문제연구소(현 아세아문제연구원, 아연) 설립과 중어중문학과, 노어노문학과 신설에 힘썼다. 총장 임기 중에는 교내 여러 건물을 완·착공하고 군사정권에 맞서 학생들을 보호했다. 퇴임 이후에도 학자의 길을 줄곧 걸었다. 김준엽 총장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그의 생애를 돌아봤다.
고려대와의 인연이 시작되다
1949년 2월, 김준엽 전 총장은 동방어전문학교에서의 교수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한 후, 같은 해 9월 고려대 부교수로 부임했다. 그는 이후 33년간 본교에서 교수 생활을 하게 된다. 총장 3년을 포함하면 36년을 보낸 것이다.
김준엽 전 총장은 교수 시절 1957년 아세아문제연구소 창설에 기여했다. 김 총장은 <장정>에서 “아세아문제연구소는 내가 일생에 가장 심혈을 기울였고 또한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하는 일 가운데 하나”라고 밝혔다. 특히 1962년 포드재단으로부터 28만5000달러를 지원받아 자체적인 건물을 세우고 학술지를 발행했다. 하버드대 객원교수로 있을 때 연이 닿은 덕분이었다. 김 총장은 아연에서 수많은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해 외국의 저명한 학자들을 고려대로 초대하기도 했다. 이내영(정경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당시에는 한국은 몰라도 아연은 안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아연의 위상이 높았다”고 회상했다.
중어중문학과와 노어노문학과를 신설하는 데도 힘썼다. 김준엽 전 총장은 문화의 발전을 위해서는 문화의 교류가 중요함을 평소 강조했다. 1962년부터 문교부(현 교육부)에 학과 신설을 신청했고, 1972년 마침내 중어중문학과가 신설됐다. 2년 후인 1974년엔 노어노문학과가 생겼다. 중국학연구회(현 중국학연구소)를 창립해 초대 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이상우 문과대학장은 “문과대학이 동아시아 연구 교육의 메카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김준엽 선생님이 만든 기반 덕분”이라고 전했다.
김준엽 전 총장은 광복군 시절의 동지 장준하가 창간한 시사잡지 <사상계>의 주간을 맡기도 했다. 1961년, 1962년, 1974년 세 차례 유엔 총회에 한국 대표로도 참석했다. 1972년엔 대한적십자사 자문위원으로 평양에 방문했다. 공산주의와 북한 연구의 선구자였기에 박정희 정부에서 민주공화당 사무총장, 국토통일원(현 통일부) 장관직을 제의했으나 거절했다.
‘큰 거지’ 김준엽
1982년 김준엽 총장은 국무총리 취임으로 총장직을 사퇴한 김상협 총장의 뒤를 이어 고려대 제9대 총장에 취임한다. 당시 본교는 재정난 외에도 크고 작은 여러 문제에 처해있었다. 그는 <장정>에서 당시 학교 운영상의 문제로 △재정 문제 △재단 문제 △교우회와의 관계 △시설 부족 △재산관리 문제 △직원 문제 △행정기구 문제 △제규정의 정리 문제 △무계획성의 문제 △대우 개선 문제 △총장의 자세 문제를 꼽았다.
김준엽 총장이 부임했을 당시 고려대는 약 60억 원의 빚을 지고 있었다. 김 총장은 전체 교수의회에서 2년 반 안에 모든 빚을 청산하고 재정을 정상화하겠다는 목표를 밝혔다. 우선 기구 개편을 단행했다. 사무처가 예산의 편성과 집행을 모두 담당하던 기존의 구조를 개편했다. 예산 편성은 기획처가 맡고 사무처의 집행을 기획처가 감독하게 됐다. 경리과는 총무처에서 관장하도록 해 예산 편성과 집행을 분리했다. 또한 일정액 이상의 지출은 반드시 기획처의 동의를 얻도록 규정했다. 2년 이내에 빚을 완전히 청산할 수 있도록 예산안을 새로 편성했다.
절약에도 주력했다. 김준엽 총장이 솔선수범해 총장실의 장부를 비서실장이 기록하고 월말마다 총무처장이 감사하도록 했다. 또한 교직원의 회식비를 절약하도록 했다. 연간 회식비가 4억 원이 넘는 상황이었다. 회식할 땐 꼭 사유서를 적게 했으며 2차, 3차는 금지했다. 교수들의 비난에도 방침을 고수한 지 2년이 지나자 회식비가 반 이상 줄었다. 8억 원에 달하던 연간 에너지 비용도 에너지관리위원회를 신설해 20% 이상 절약했다. 물품구매나 시공에서의 입찰도 투명하게 했다.
시설 확충을 위한 모금에도 힘썼다. 김준엽 총장은 아연 시절 본인을 ‘작은 거지’, 총장 시절 본인을 ‘큰 거지’로 농담 삼아 소개했을 만큼 수많은 지원금을 얻어냈다. 취임 직후 교우회와 협력해 재단 이사와 대기업 회장을 수차례 만났다. 그는 과학도서관 완공과 교사 신축에 필요한 100억 원을 3개월 만에 받아냈다.
이후에도 각 단과대학이 골고루 혜택을 볼 수 있도록 여러 차례 모금 활동을 펼쳤다. 김준엽 총장 임기 당시 과학도서관, 법학관, 정경관 등 새로운 건물을 구축했다. 고대의료원을 발족해 산하에 혜화병원, 구로병원, 여주병원, 반월병원을 두도록 했다. 김준엽 총장은 <장정>에서 “개교 이래 77년 간 역대 총장이 지은 총건평(4만7696평)의 반에 해당하는 2만3019평을 재직 2년 8개월 내에 완성한 것을 자랑으로 생각한다”고 회상했다. 이외에도 ‘과학고대’를 내세우며 공과대학, 이과대학, 농과대학에 크게 투자해 인문계 위주의 학교라는 이미지를 탈피했다.
굴복하지 않는 총장
김준엽 총장은 독재정권에도 굴복하지 않고 맞서 싸웠다. 그는 총장에 취임하자마자 아내에게 “절대로 굴욕적인 총장은 할 수 없다. 대학의 권위를 지켜야 함은 물론이고 고대의 명예와 일생의 명예를 위해서도 그럴 수가 없다. 총장이라는 자리에 연연해서 정부에 아부하는 따위의 행동은 일체 배제하겠다”고 다짐했다.
당시엔 사립대학에 대한 정부의 간섭이 심했다. 김준엽 총장은 <장정>에서 “사립대학에 대한 재정 지원은 한 푼도 없으면서 모든 것을 정부에서 통제했다. 총장의 임면에서부터 등록금책정, 예산편성, 교수들의 봉급, 학과 신설, 학생들의 자치활동, 대학신문, 고연전까지 일일이 간섭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고 회상했다. 김 총장은 취임하자마자 국가안전기획부나 경찰서 등에서 파견한 기관원 10여 명을 전부 쫓아냈다.
외국인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주라는 문교부의 지시도 거부했다. 당대엔 외국 정부의 귀빈이 방문하면 대학이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하곤 했다. 김준엽 전 총장은 고려대에서 세운 규준에 부합하지 않는 인물에게 학위를 줄 수는 없다며 취임 후 3개월 동안 3번이나 학위수여를 거절했다. 박정희 정권하에서 정부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해직당한 교수 6인을 복직시키기도 했다.
학생들을 지키는 데에도 힘썼다. 1984년 당시 총학생회장이었던 김영춘(영어영문학과 81학번) 교우는 김준엽 전 총장을 “온화한 학자셨지만 엄혹한 독재정치체제에서 민주화운동에 앞장선 제자들을 보호하는 일에는 물러서지 않고 강경한 태도로 일관하셨던 분”으로 기억했다.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자 정부는 대학 총학생회를 없애고 ‘학도호국단’으로 대체했다. 본교와 서울대, 연세대 등은 대학자율화를 내세워 총학생회 부활을 추진했다. 학생들의 직선제로 본교에 4년 만에 총학생회가 들어섰지만, 정부는 이를 불법으로 간주하고 총학생회장단에 대한 제적을 요구했다. 김영춘 교우는 “김준엽 선생님께서는 저에 대한 징계를 요구하는 정부에 맞서 총학생회 인정을 주장하고 설득하는 일에 앞장서셨다”고 전했다. 본교 학생을 포함한 대학생 264명이 민정당 당사에 진입해 농성을 벌였을 때에도 김 총장은 학칙을 따르겠다며 학생들을 보호했다.
학생을 제적하지 않은 김준엽 총장에게 정부는 사퇴 압박을 가했다. 재시험 실시, 선거운동 참여 등의 사유로 파면하려 했으나 큰 문제가 발견되지 않았다. 정부는 결국 교직원 자녀 특별입학을 문제 삼았다. 1984년 입시에 교직원 자녀 25명에게 특혜를 부여했다는 사유였다. 김 총장은 <장정>에서 “임기 동안엔 특혜입학을 없애고자 했으나 처장이 사임할 수밖에 없다고 간청해 20%를 가산하는 범위에서만 우대하도록 지시했다”고 밝혔다. 결국 김준엽 총장은 특혜 받은 학생 25명을 제적 처리하지 않는 조건으로 총장직에서 사퇴했다. 그는 “임기 4년 동안 달성해 내리라는 목표를 2년 반 동안 완성해 냈기에 언제 파면되더라도 괜찮다고 생각했다”고 회상했다. 한편, 김준엽 총장이 사퇴한 다음 해인 1986년 교육개혁심의회는 당시 관행이었던 대학 교직원 자녀의 입학 특혜를 공식적으로 의결했다.
김준엽 총장이 사퇴 의사를 밝히자 학생들은 총장 퇴진 반대 시위를 열었다. 1985년 2월 졸업식에서 시작된 시위는 3월 개학 이후까지 한 달이 넘게 진행됐다. 김 총장은 “총장 나가라는 학교는 많았어도 총장 나가지 말라는 시위는 이게 처음”이라며 평생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당시 시위에 참여했던 이상우 학장은 “총장의 퇴진을 학생들이 이렇게 가슴 아파한 일은 없었다”며 “한국 대학 역사에서 가장 가슴 뭉클한 장면”이라 회상했다.
기타
그의 타계 당시 고려대학교에서는 학교장을 치르지 않았다. 이를 두고 '김준엽과 이사회의 사이가 좋지 않아서' 그랬던 것 아니냐는 추측도 있었지만, 사실이 아니다. 고인이 별세하기 약 반년 전, 2010년 11월에 김준엽 구순 기념에서 '동아시아 국제관계사'의 봉정식이 있었을 때 고려대의 전현직 총장을 비롯, 사학과, 한국사학과 등의 각계 교수들이 모두 참석하였다. 이들 가운데는 당시 고려중앙학원 이사장이자 한국사학과 명예교수, 김준엽 선생의 사학과 제자였던 김정배도 포함되어 있었다.
2012년 6월 고려대에서는 김준엽 전 총장 서거 1주기를 기리는 행사가 열리기도 했다.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2023년 8월 25일부터, 약 1주일 동안 고려대에서 여러 기념 행사가 열렸다. 그의 고려대 총장 재임 시절 재학생이었던 이진한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원장, 김영춘 전 국회의원 등이 기념 사업을 주도한다.
생전에 장준하의 생애 관련으로 인터뷰를 많이 받았는데 그는 "나도 중국 땅에서 함께 독립운동을 했는데, 사람들이 찾아와 내가 뭘 했는지 물어보지 않고 장준하만 물어보더라" 라고 서운해하기도 했다.
선생은 초년기에 독립군으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 였지만, 광복 이후 현실 문제에 참여하기 보다는 학자 본연의 길에 충실했다. 그래서인지 생전에는 대중적 인지도가 낮은 편이었다.[40] 하지만 오늘날에는 대한민국의 수립, 발전을 위해 일생을 교육에 투신하여 역사에 남는 길을 선택했고, 이러한 점이 인정받으면서 정파와 이념을 초월하여 존경을 받을 자격이 있는 인물이자 스승으로 평가되고 있다.
동명이인으로 K리그에서 뛰고있는 김준엽 선수가 있는데 그의 부친이 김준엽 선생의 일대기를 읽고 깊이 감명 받아 아들의 이름을 똑같이 지었다고 한다.
KBS 대하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강장자 역을 맡았던 배우 김성옥이 이 사람의 고려대학교 사학과 평교수시절 가르쳤던 제자였다고 한다. 김준엽 본인도 회고록 <장정>에 손숙, 김성옥 부부와의 두터운 친분에 대해 자세히 서술하기도 했다.
본인의 회고록 <장정>에서는 자세히 나오지 않는 내용이지만 절친 최기일의 회고록 <자존심을 지킨 한 조선인의 회상>에 따르면 김준엽은 굉장한 할리우드 영화광이었다고 한다. 최기일은 김준엽과 같이 신의주고등보통학교와 게이오기주쿠대학에서 같이 수학한 사이인데다가 신의주고보시절에 삼총사라고 불릴 정도로 가까웠던 절친이라 학창시절의 김준엽의 면모에 대해 자세히 증언했는데, 김준엽은 교칙도 거의 어기지 않는 모범생이었지만 영화를 볼 때만큼은 교칙을 어겨서 자동차 정비공으로 변장하고 극장에 자주 드나들었다고 한다.할리우드 영화광이었던만큼 미국 영화 잡지도 자주 사서 읽었으며, 미국의 압도적인 영화제작 기술력에 대해 감탄하면서 태평양 전쟁 당시 대본영에서 연일 자기들이 연전연승하고 있다는 거짓선전을 계속하던 때에도 그동안 할리우드 영화를 많이 본 경험에 입각해서 일본은 미국이랑 붙으면 국력의 차이때문에 분명히 질 거라고 자주 예측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관련 동영상
관련 서적
- 《장정 1 : 나의 광복군 시절(상)》,나남
- 《장정 2 : 나의 광복군 시절 (하)》,나남
- 《장정 3 : 나의 대학총장 시절》,나남
- 《장정 4 : 나의 무직시절》,나남
- 《장정 5 : 다시 대륙으로》,나남
- 《나와 중국(속)》,나남
- 《역사의 신》,나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