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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에 [[이육사]]시인의 작품 [[광야]]이 발표된 신문이다.
 
1945년에 [[이육사]]시인의 작품 [[광야]]이 발표된 신문이다.
  
945년에, 정진석이 당시 좌익 계열에 동조하며 창간한 일간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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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에, 정진석이 당시 창간한 일간 신문.
  
  
정인익(鄭寅翼)이 창간하였다. 사장은 정인익, 발행인 · 편집인 겸 주필은 정진석이 맡았다. 후에 신익희(申翼熙)가 사장에 취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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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익(鄭寅翼)이 창간하였다. 사장은 정인익, 발행인 · 편집인 겸 주필은 정진석이 맡았다. 후에 신익희(申翼熙)가 사장에 취임하였다..
  
이 시기의 신문들은 대부분 공산주의자들의 ‘진보적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경향에 치우쳤는데, 이 신문도 좌익계열과 동조하여 신탁통치를 찬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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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7월 7일에는 호역(콜레라)기사를 다루어 서울시 당국의 고발로 정인익 · 정진석 등이 구금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논조로 말미암아 1946년 5월 14일 독립전취국민대회에 참석하였던 우익청년단체의 습격을 받아 주조기 5대를 분실당한 것을 비롯하여 다섯 차례나 피습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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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때 정인익이 납북당하고 1952년 5월 26일 폐간되었다. 그 뒤 1953년 9월 7일 백남일이『자유신보(自由新報)』라는 제호로 『자유신문』의 속간형식으로 발행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기록인 미군정 『조사월보』에서는 이 신문의 논조경향을 중립으로 보고 있다. 1949년 7월 7일에는 호역(虎疫 : 콜레라)기사를 다루어 서울시 당국의 고발로 정인익 · 정진석 등이 구금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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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의 편집진은 사장 백남일, 부사장 이상협, 고문 최남선, 편집국장 심정섭, 주필 김석길등으로, 창간사에서 ‘자유 · 희망 · 약진’을 강조하면서 국민전체의 대변지가 될 것을 다짐하였다.
  
6·25 때 정인익이 납북당하고 1952년 5월 26일 폐간되었다. 그 뒤 1953년 9월 7일백남일(白南一)이 종로구 서린동에서 『자유신보(自由新報)』라는 제호로 『자유신문』의 속간형식으로 발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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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다시 『자유신문』으로 제호를 변경하고 발행인 겸 편집인도 김갑린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재정을 지원하던 태창방직()이 침체되자 경영난에 부딪쳐 1961년 4월 6일부터 휴간하다가, 8월 6일 폐간하였다.
  
이때의 편집진은 사장 백남일, 부사장 이상협, 고문 최남선, 편집국장 심정섭(沈貞燮), 주필 김석길(金錫吉) 등으로, 창간사에서 ‘자유 · 희망 · 약진’을 강조하면서 국민전체의 대변지가 될 것을 다짐하였다.
 
  
그 뒤 다시 『자유신문』으로 제호를 변경하고 발행인 겸 편집인도 김갑린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재정을 지원하던 태창방직(주)이 침체되자 경영난에 부딪쳐 1961년 4월 6일부터 휴간하다가, 8월 6일 폐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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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1월 30일 (목) 21:50 판

개요

자유신문(自由新聞)에 대한 서술이 이루어지는 페이지이다.

1945년에 이육사시인의 작품 광야이 발표된 신문이다.

1945년에, 정진석이 당시 창간한 일간 신문.


정인익(鄭寅翼)이 창간하였다. 사장은 정인익, 발행인 · 편집인 겸 주필은 정진석이 맡았다. 후에 신익희(申翼熙)가 사장에 취임하였다..

1949년 7월 7일에는 호역(콜레라)기사를 다루어 서울시 당국의 고발로 정인익 · 정진석 등이 구금되기도 하였다.

6·25 때 정인익이 납북당하고 1952년 5월 26일 폐간되었다. 그 뒤 1953년 9월 7일 백남일이『자유신보(自由新報)』라는 제호로 『자유신문』의 속간형식으로 발행하였다.

이때의 편집진은 사장 백남일, 부사장 이상협, 고문 최남선, 편집국장 심정섭, 주필 김석길등으로, 창간사에서 ‘자유 · 희망 · 약진’을 강조하면서 국민전체의 대변지가 될 것을 다짐하였다.

그 뒤 다시 『자유신문』으로 제호를 변경하고 발행인 겸 편집인도 김갑린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재정을 지원하던 태창방직(주)이 침체되자 경영난에 부딪쳐 1961년 4월 6일부터 휴간하다가, 8월 6일 폐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