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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서: 300px|center|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div style="text-align:center;"><font color="#2E8B57"> '''''석씨 왕조의 시조, 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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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text-align:center;"><font color="#2E8B57"> '''''석씨 왕조의 시조, 탈해'''''</div></font><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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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text-align:center;"><font color="#2E8B57"> '''''왕이 되지 못한 김씨 왕조의 조상,알지'''''</div></font><br/>
  
 
{{왕족 정보
 
{{왕족 정보
|인물 = 탈해 이사금 <br/> 脫解 尼師今
+
|인물 = 김알지 <br/>  
|사진 = 석탈해 릉.jpg|300px|섬네일|탈해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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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김알지 존영도_김산호 화백 작품 ( 출처 - 네이버 bookprint의 블로그).jpeg|300px|섬네일|출처: 네이버 bookprint의 블로그
|이름 = 석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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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김알지    
|별호 = 탈해 이사금
 
|원어 이름 = 脫解 尼師今
 
 
|국가 = 신라
 
|국가 = 신라
|재위 기간 = B.C. 19년 또는 B.C. 5년 (음력)
+
|재위 기간 = 없음
|출생 = B.C. 58년 4월 (음력)
+
|출생 = A.D 65년 3월 (음력)
|사망 = A.D. 80년 8월 (음력) (향년 85세 혹은 99세)
+
|사망 = 알 수 없음.
|부친 =  
+
|부친 = 알 수 없음.
|모친 = 용성국 왕후
+
|모친 = 알수 없음.
|배우자 = 남해왕의 맏딸
+
|배우자 = 알 수 없음.
 
}}
 
}}
  
 
==정의==
 
==정의==
신라 제4대 왕이며 석씨 왕조의 시조가 된 탈해에 관한 신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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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왕족인 경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의 탄생신화이다.  
 
 
 
==역사==
 
==역사==
『삼국유사(三國遺事)』 「기이(紀異)」 탈해왕 조와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 탈해이사금 조가 주된 자료이나,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도 ‘탈해왕과 김수로왕의 왕위 싸움’에 관한 부분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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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알지는 탈해왕 때 태자로 책봉되긴 하였으나 왕위에는 오르지 못한 인물이다. 김알지의 탄생담이 이토록 오랫동안 전승될 수 있었던 이유는 김씨 최초로 왕위 된 미추왕 대 이후였을 것이다. 이후로 신라의 왕은 김씨가 계속 독점하여 역대 56명의 왕 중 38명이 김씨계에서 배출되었기 때문에 망각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줄거리==
 
==줄거리==
『삼국유사』 탈해왕 조 기사를 중심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남해왕 때 아진포에서 혁거세왕에게 해산물을 바치던 아진의선(阿珍義先)이라는 노파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바다에서 까치들이 떼를 지어 날며 울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상히 여긴 노파가 살펴보았더니 거기에 배 한 척이 있었고 배 안에는 큰 궤짝이 있었다. 궤를 열자 그 속에 단정하게 생긴 한 사내아이와 여러 보물과 노비들이 들어 있었다. 그 사내아이를 7일 동안 보살펴 주자, 스스로 입을 열고 말하기를 "나는 본디 용성국(龍城國) 사람이다. 그 나라의 왕비에게서 알로 태어났으나 버림을 받아 이곳에 닿았다." 라고 하였다. 아이는 말을 마치자 지팡이를 끌고 두 사람의 종(從)을 데리고 토함산에 올라가 돌무덤을 파고 7일 동안 머물렀다. 이후 산을 내려와 성 안을 살펴 살 만한 곳을 찾던 중 호공(瓠公)의 집에 다다랐다. 아이는 속임수를 써서 호공의 집 곁에 숫돌과 숯을 묻고 다음 날 아침 관가에 가서 그 집은 자신의 조상이 대대로 살았던 집이었는데 자신이 잠시 집을 비운 사이 호공이 들어와 차지한 것이라고 고발했다. 아이는 전날 묻어두었던 숫돌과 숯을 증거로 제시하여 그 집을 차지하게 되었고 그 소문이 퍼지자 남해왕은 아이(탈해)슬기로운 사람이라 생각하여 아이를 그의 맏사위로 삼았다. 이때 석탈해가 남해왕의 사위가 된 것은 훗날 그가 왕위에 오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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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알지신화는 김부식이 서술한 정사인 '''『삼국사기』'''와 일연이 서술한 민담적 성격을 지닌 '''『삼국유사』'''의 구체적인 내용이 다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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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통점===
탈해가 동악(東岳, 토함산)에서 내려오는 도중에 백의에게 물을 떠오라 하였는데, 백의가 요내정에서 물을 떠오다가 먼저 그 물을 마시자, 물그릇이 입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탈해가 꾸짖고 백의가 사죄하니 그릇이 떨어졌다. 그 후로 백의가 두려워 속이지 않았다. 노례왕을 이어서 탈해가 왕이 되었지만, 왕에 오른 지, 23년 만에 죽어 소천구(疏川丘)에 모셔졌다. 훗날 신조(神詔, 탈해 신령의 말)로 뼈를 묻었는데, 그 크기가 역사(力士)의 뼈였다. 이에 뼈를 부수어 소상(塑像)을 만들어 대궐에 모셨다. 다시 신령의 말에 따라 상을 동악에 봉안하였고, 나라에서 계속 그를 동악신으로 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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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에서 닭이 우는 소리가 들리자 <span style="background:#FFFACD">'''호공(瓠公-관리의 하나)'''</span>을 보내어 이를 살피게 했다. 숲속에 궤짝이 있었고 <span style="background:#FFFACD">'''흰 닭'''</span>이 나무 밑에서 울고 있었다. 궤를 열어 보니 <span style="background:#FFFACD">'''남자 아이'''</span>누워있다 곧 일어났다. <span style="background:#FFFACD">'''금궤'''</span>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김씨라 하였고 총명하여 태자의 지위에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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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점===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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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신화에는 고대의 역사 민속과 고고학 자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풀어야 할 몇 가지 문제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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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해왕''' 9년 3월에 왕이 밤중에 금성(金城) 서쪽 시림(始林) 숲속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날이 밝자 '''호공(瓠公)을 보내어''' 이를 살펴보도록 하였다.호공이 시림에 다다라 보니 금빛의 작은 괘짝이 나뭇가지에 달려 있고 흰 닭 아래서 울고 있었다. 이 사실을 듣고 왕은 '''궤짝을 가져오게 하여''' 열어 보니 조그만 사내아이가 속에 들어있었는데, 용모가 기이하게 뛰어났다. 왕은 기뻐하며 '''하늘이 그에게 아들을 내려보낸 거라 하여 거두어 길렀으니''', 그 아이는 자라감에 따라 총명하고 지략이 뛰어나서 그 이름을 알지라 하였다. 또, 금빛 궤짝에서 나옴을 연유로 하여 성을 김씨라 하고, 처음 발견되었던 장소인 시림을 고쳐 계림(鷄林)이라 이름하고, 이로써 국호를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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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석탈해와 집단의 출신과 문화적 성격이다.''' 탈해의 출생지가 왜의 동북 1천리에 있는 용성국이며, 그곳에 28명의 용왕이 있다거나, 그 모친이 적녀국(積女國)의 왕녀라 하였고 또한 탈해는 붉은 용이 호위하는 배를 타고 가야의 남해를 거쳐 계림(곧 신라) 동쪽 해안 하서지촌에 상륙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탈해 집단이 해양문화를 가지며 출생 원천이 물(바다)과 친연성이 깊다는 점을 나타내며, 한국 고대신화에서 천상에 근본을 둔 신화 말고도 물이라는 신성한 초월계를 상정한 신화가 존재함을 보여 준다. 탈해의 출신지 기록에 근거하여, 동북 시베리아의 어로문화를 가진 집단이 해류를 따라 동해안을 거쳐 경주 지역으로 이동하여 왔으며, 선진 청동기 내지 철기문화를 가졌을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
"영평(永平 : 後漢 明帝의 연호) 3년 경신(庚申) 8월 4일에<font color="#006400"> '''호공'''</font>이 밤에 월성(月城) 서리(西里)를 지나다가 큰 빛[大光明]시림 속에 비침을 보았다.붉은 구름이 하늘로부터 땅으로 뻗쳤는데 구름 한가운데 황금 궤짝이 나무 끝에 걸려 있었고, 빛이 궤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또한, 흰 닭이 나무 밑에서 울고 있었다. 이를 왕에게 아뢰<font color="#006400"> '''왕이 가'''</font> 궤를 열어보니 어린 남자 아이가 누워 있다가 일어났다. 이는 박혁겨세의 옛일과 같으므로 <font color="#006400"> '''이름을 알지(우리말의 어린애를 뜻함)라 지었다. 이에 뭇새와 짐승들이 서로 따르고 기뻐하며 모두 뛰어놀았다.'''</font> 금궤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김씨라 하였다."
 
 
'''탈해가 숫돌과 숯을 몰래 묻어 남의 집을 빼앗은 속임수이다.''' 우선, 탈해가 '사술(詐術)을 통한 지능의 과시'로 호공과 겨루어 집을 빼앗고, 때문에 남해왕의 사위가 되며 나아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는 것은, 그와 같은 '지능겨루기'가 왕위 등극의 전제였음을 시사한다. 아울러 그에 앞서 있었던 ‘토함산 돌무덤 속에 7일간 머물기’를 ‘상징적 죽음과 재생’으로 파악한다면, 이러한 ‘지능겨루기’는 결국 ‘입사식의 시련’이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이 같은 추정은 석탈해가 왕위를 놓고 수로왕과 ‘둔갑겨루기’를 하고 있다는 자료에 의하여 뒷받침된다. 또한, 동명왕의 아버지인 해모수가 유화와의 혼인을 허락받기 위하여 신부의 아버지와 ‘둔갑겨루기’를 하고 있음을 방증으로 삼을 수도 있다.그렇다면 「석탈해신화」 속에는 왕위 등극의 전제가 된 두 가지 겨루기가 존재하고 있는 셈이다. 하나는 ‘지능겨루기’이고 또 하나는 ‘둔갑겨루기’인데, 전자와는 달리 후자를 육체적 표현을 통한 잠재적 능력 겨루기라고 표현함으로써, 두 가지 겨루기를 대립적이면서 상호 보완적인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탈해가 자신을 본래 ‘대장장이’라 한 것으로 보아, 탈해는 새로운 철기문화를 가진 집단의 우두머리이다.''' 더욱이 시베리아 사회에서 금속, 철기, 무기들의 주술적 힘을 가진 대장장이가 샤먼(무당)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며, 신라 2대 남해왕이 차차웅 무당의 성격을 지녔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결국 탈해는 야무왕(冶巫王)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석탈해 사후(死後)의 기록은 민속학에서 매우 중요하다.''' 탈해의 골상이 역사처럼 거대하며, 신령으로 현몽하여 이중장(二重葬)을 치르게 하고, 시신의 뼈를 소상으로 만들어 토함산에 봉안하여 동악신이 되고, 대대로 나라의 제사를 받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중장은 고대부터 기원이 오래된 것으로 조상숭배 관념, 뼈 속에 영혼이 깃든다는 조상유골 관념과 관련이 있다. 특히, 뼛가루로 빚어 만든 죽은 이의 상은 시베리아 지역 샤머니즘에서 볼 수 있는 ‘온곤’에 비교될 수 있는 만큼 매우 뜻 깊은 자료라고 생각된다. 탈해가 사후에 토함산 산신으로 좌정한 것은 산신이 원래 여성이었다가 점차 남성으로 변하고 있음을 말해 준다. 『삼국사기』에는 그 일이 태종무열왕 때 일어난 것으로 되어 있는데, 토함산이 국방의 요충지로서 국가의 제사처인 오악의 하나라는 점을 고려하면, 탈해의 산신화는 무력이 중시된 삼국전쟁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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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 및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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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김알지신화의 전승의 의미'''<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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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파트에서 서술했듯 김알지신화는 ''건국신화가 아니라 신라 김씨 왕조의 시조설화''이다. 만일, 그의 후손인 김씨들이 왕위에 오르지 않았더라면 그의 이러한 신이한 탄생은 주목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7대조 후손인 미추왕이 김씨 최초로 왕위에 오름에 따라 상황이 역전된 것이다. 신라 김씨 왕조는 본디 3성이(김,석,박) 고루 왕위를 하던 것에서 김씨 왕주 위주의 부자세습체계로 바뀌며 ''신라 역대 56명의 왕 중 총 38명이 김씨계에서 배출''되었다. 이런 배경 덕분에 김알지신화는 망각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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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시조신화로서 다른 성씨 시조신화들보다 신비한 특성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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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에서 언급한 내용과 상통하는 부분이다. 김알지신화는 시조신화이면서도 다른 성씨신화들보다 신비함이나 우월함을 연상하는 모티프가 더 많이 쓰였다. 한국에서 '''천강의 요소'''는 왕에게만 허용된 신화소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씨 시조들은 하늘 대신 땅,바다,못 등을 사용하는 데 김알지신화에서 천강의 요소가 나타나는 것은 그의 후손이 대대로 신라의 왕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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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신라 문화에서 '닭'의 상징이 갖는 의미를 확인하게 하는 자료'''<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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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은 신라인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동물이다. 줄거리에서 볼 수 있듯 ''알지가 나온 시림을 계림이라 고치고 국호로 삼다.'' 신라인들이 닭을 숭상했음이 인도까지 알려졌다는 기록도 있다. 특히 김씨 집단이 닭을 중요하게 여겨 5세기 이후 이들이 부자세습으로 권력을 독점하면서 이런 경향이 심해졌다. 천마총에서 계란 실물이 토기에 담겨 출토된 점도 이와 관련이 있을 수 있다.특히 바로 이 김알지신화가 신라, 그중에서도 김씨 왕조가 닭을 중시했음을 짐작하게 하는 자료이다.
 
==모티프==
 
==모티프==
<div style="text-align:left;"><font color="#6B8E23"> '''천손하강 모티프와 난생설화 모티프'''</div></font><br/>
+
<div style="text-align:left;"><font color="#6B8E23"> '''천강모티프와 신수모티프'''</div></font><br/>
 
+
*석탈해신화는 '''천강모티프'''로 이루어져 있다.<br/>
석탈해신화는 '''천손하강 모티프'''로 이루어져 있다. 석탈해의 출생의 원천이 물(바다)속이라는 사실은 우리 신화에서 신의 신다운 출생 원천이 하늘과 물 두 곳임을 말해 주는 증거의 하나이다. 용성국 혹은 용왕이라는 표현으로 보아 석탈해의 출생 원천이 용궁다운 모습을 지니고 있으나, 중요한 것은 하늘과 더불어 물 (바다)속이 신성한 초월적 세계로서 관념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
삼국시대의 시조신화는 모두 하늘에 출생 근원을 두고 있는 '''인간 생명의 강하(降下)로서의 천생관(天生觀)'''이다.천생관에 의한 천강시조신화(天降始祖神話)는 다시 「동명왕신화」·「단군신화」와 같이 신성혼(神聖婚)에 의하여 의신화(擬神化)되는 것(신과 인간의 결합)과, 「박혁거세신화」·「김수로신화」와 같이 알의 형상으로 강천한다는 난생설화와 「김알지신화」처럼 '''처음부터 인간의 모습으로 강천'''하는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즉, 김알지신화는 삼국의 시조신화 중 거의 유일하게 완전한 인간의 모습 그대로 강천했다는 데 특이점이 있다.  
 
+
*김알지신화는 '''신수모티프'''로 이루어져 있다.<br/>
또한, 석탈해신화는 '''난생설화 모티프'''로 이루어져 있다. 궤를 열자 나온 사내아이가 본인은 사실 용성국 사람이고 왕후의 자식이지만 알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버려졌다는 말에서 알 수 있다.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왕들처럼 난생설화를 모티프로 사용해 석씨 왕권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
'''신수모티프'''는 신이한 동물이 등장하는 것을 말하는데 김알지신화에서는 '''흰 닭'''이라는 신수가 등장한다.
 
+
*김알지신화는 '''난생모티프를 금괘로 대신'''하는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br/>  
==의의와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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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알지 신화 발원지==
<석탈해신화>는 신라의 건국신화가 아니라 석씨 왕가의 시조신화로, 이와 유사한 것은 김씨 왕가의 시조신화인 <김알지신화>가 있다. 아울러 신라 육촌장신화와 함께 성씨시조신화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이 신화는 건국시조신화 못지않게 중요하다. 탈해가 야무왕의 성격을 지니고, 고대국가 초기에 왕과 샤먼이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고, 사후의 이중장 및 남성 신격의 산신화라는 민속적 사례를 제공하여 한국 서사문학상 풍부한 내용의 ‘영웅의 일생’이라는 전기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세계 영웅신화의 보편적인 서사구조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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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탈해 일대기==
 
(타임라인)
 
 
 
==석탈해 신화 발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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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참고문헌==
 
<references/>
 
<references/>
[https://folkency.nfm.go.kr/kr/topic/detail/5360 한국민속대백과사전, '석탈해신화']
+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972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알지신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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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785919&CMPT_CD=P0010&utm_source=naver&utm_medium=newsearch&utm_campaign=naver_news 홍성식,"김씨 왕조의 시조가 태어난 곳, 왜 '닭의 숲'이라 불렸을까",오마이뉴스,2021.11.08 20:29]
  
[http://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C%84%9D%ED%83%88%ED%95%B4%EC%8B%A0%ED%99%94&ridx=0&tot=16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석탈해신화']
+
[[분류:콘텐츠 분야 18분반]] [[분류:샛별같은 한국 신화 엮음집]][[분류:난생설화 모티프]] [[분류:천손하강 모티프]] [[분류:마이구미호]]

2022년 12월 12일 (월) 17:06 기준 최신판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왕이 되지 못한 김씨 왕조의 조상,알지


김알지
김알지 존영도 김산호 화백 작품 ( 출처 - 네이버 bookprint의 블로그).jpeg
인물 김알지
신상정보
이름 김알지
별호
원어 이름
국가 신라
재위 기간 없음
출생 A.D 65년 3월 (음력)
사망 알 수 없음.
부친 알 수 없음.
모친 알수 없음.
배우자 알 수 없음.


정의

신라 왕족인 경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의 탄생신화이다.

역사

김알지는 탈해왕 때 태자로 책봉되긴 하였으나 왕위에는 오르지 못한 인물이다. 김알지의 탄생담이 이토록 오랫동안 전승될 수 있었던 이유는 김씨 최초로 왕위 된 미추왕 대 이후였을 것이다. 이후로 신라의 왕은 김씨가 계속 독점하여 역대 56명의 왕 중 38명이 김씨계에서 배출되었기 때문에 망각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줄거리

김알지신화는 김부식이 서술한 정사인 『삼국사기』와 일연이 서술한 민담적 성격을 지닌 『삼국유사』의 구체적인 내용이 다르다.

공통점

숲속에서 닭이 우는 소리가 들리자 호공(瓠公-관리의 하나)을 보내어 이를 살피게 했다. 숲속에 궤짝이 있었고 흰 닭이 나무 밑에서 울고 있었다. 그 궤를 열어 보니 남자 아이가 누워있다 곧 일어났다. 금궤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김씨라 하였고 총명하여 태자의 지위에 올렸다.

차이점

  • 『삼국유사』
"탈해왕 9년 3월에 왕이 밤중에 금성(金城) 서쪽 시림(始林) 숲속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날이 밝자 호공(瓠公)을 보내어 이를 살펴보도록 하였다.호공이 시림에 다다라 보니 금빛의 작은 괘짝이 나뭇가지에 달려 있고 흰 닭 그 아래서 울고 있었다. 이 사실을 듣고 왕은 궤짝을 가져오게 하여 열어 보니 조그만 사내아이가 그 속에 들어있었는데, 용모가 기이하게 뛰어났다. 왕은 기뻐하며 하늘이 그에게 아들을 내려보낸 거라 하여 거두어 길렀으니, 그 아이는 자라감에 따라 총명하고 지략이 뛰어나서 그 이름을 알지라 하였다. 또, 금빛 궤짝에서 나옴을 연유로 하여 성을 김씨라 하고, 처음 발견되었던 장소인 시림을 고쳐 계림(鷄林)이라 이름하고, 이로써 국호를 삼았다." 
  • 『삼국사기』
"영평(永平 : 後漢 明帝의 연호) 3년 경신(庚申) 8월 4일에 호공이 밤에 월성(月城) 서리(西里)를 지나다가 큰 빛[大光明]이 시림 속에 비침을 보았다.붉은 구름이 하늘로부터 땅으로 뻗쳤는데 구름 한가운데 황금 궤짝이 나무 끝에 걸려 있었고, 빛이 궤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또한, 흰 닭이 나무 밑에서 울고 있었다. 이를 왕에게 아뢰 왕이 가 궤를 열어보니 어린 남자 아이가 누워 있다가 곧 일어났다. 이는 박혁겨세의 옛일과 같으므로  이름을 알지(우리말의 어린애를 뜻함)라 지었다. 이에 뭇새와 짐승들이 서로 따르고 기뻐하며 모두 뛰어놀았다. 금궤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김씨라 하였다."

분석 및 의의

김알지신화의 전승의 의미

정의 파트에서 서술했듯 김알지신화는 건국신화가 아니라 신라 김씨 왕조의 시조설화이다. 만일, 그의 후손인 김씨들이 왕위에 오르지 않았더라면 그의 이러한 신이한 탄생은 주목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7대조 후손인 미추왕이 김씨 최초로 왕위에 오름에 따라 상황이 역전된 것이다. 신라 김씨 왕조는 본디 3성이(김,석,박) 고루 왕위를 하던 것에서 김씨 왕주 위주의 부자세습체계로 바뀌며 신라 역대 56명의 왕 중 총 38명이 김씨계에서 배출되었다. 이런 배경 덕분에 김알지신화는 망각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시조신화로서 다른 성씨 시조신화들보다 신비한 특성

①에서 언급한 내용과 상통하는 부분이다. 김알지신화는 시조신화이면서도 다른 성씨신화들보다 신비함이나 우월함을 연상하는 모티프가 더 많이 쓰였다. 한국에서 천강의 요소는 왕에게만 허용된 신화소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씨 시조들은 하늘 대신 땅,바다,못 등을 사용하는 데 김알지신화에서 천강의 요소가 나타나는 것은 그의 후손이 대대로 신라의 왕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신라 문화에서 '닭'의 상징이 갖는 의미를 확인하게 하는 자료

닭은 신라인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동물이다. 줄거리에서 볼 수 있듯 알지가 나온 시림을 계림이라 고치고 국호로 삼다. 신라인들이 닭을 숭상했음이 인도까지 알려졌다는 기록도 있다. 특히 김씨 집단이 닭을 중요하게 여겨 5세기 이후 이들이 부자세습으로 권력을 독점하면서 이런 경향이 심해졌다. 천마총에서 계란 실물이 토기에 담겨 출토된 점도 이와 관련이 있을 수 있다.특히 바로 이 김알지신화가 신라, 그중에서도 김씨 왕조가 닭을 중시했음을 짐작하게 하는 자료이다.

모티프

천강모티프와 신수모티프


  • 석탈해신화는 천강모티프로 이루어져 있다.
삼국시대의 시조신화는 모두 하늘에 출생 근원을 두고 있는 인간 생명의 강하(降下)로서의 천생관(天生觀)이다.천생관에 의한 천강시조신화(天降始祖神話)는 다시 「동명왕신화」·「단군신화」와 같이 신성혼(神聖婚)에 의하여 의신화(擬神化)되는 것(신과 인간의 결합)과, 「박혁거세신화」·「김수로신화」와 같이 알의 형상으로 강천한다는 난생설화와 「김알지신화」처럼 처음부터 인간의 모습으로 강천하는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즉, 김알지신화는 삼국의 시조신화 중 거의 유일하게 완전한 인간의 모습 그대로 강천했다는 데 특이점이 있다. 
  • 김알지신화는 신수모티프로 이루어져 있다.

신수모티프는 신이한 동물이 등장하는 것을 말하는데 김알지신화에서는 흰 닭이라는 신수가 등장한다.

  • 김알지신화는 난생모티프를 금괘로 대신하는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김알지 신화 발원지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알지신화'

홍성식,"김씨 왕조의 시조가 태어난 곳, 왜 '닭의 숲'이라 불렸을까",오마이뉴스,2021.11.08 20: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