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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이후''' | '''임진왜란 이후''' | ||
| − | 임진왜란은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총 7년간 이루어진 전쟁이다. | + | 임진왜란은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총 7년간 이루어진 전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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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간의 전쟁으로 인해 조선, 명, 일본 등 동아시아 국제 관계의 변화가 생겼으며, 모두 큰 피해를 입었다. | 7년 간의 전쟁으로 인해 조선, 명, 일본 등 동아시아 국제 관계의 변화가 생겼으며, 모두 큰 피해를 입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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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경우, 전쟁이 본토에서 이루어졌으므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할 수 있다. | 조선의 경우, 전쟁이 본토에서 이루어졌으므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할 수 있다. | ||
| − | 국토는 황폐화되었고 토지를 기록한 장부마저 사라져 임진왜란 이후 제대로 된 세금조차 거둘 수 없었다. | + | 국토는 황폐화되었고 토지를 기록한 장부마저 사라져 임진왜란 이후 제대로 된 세금조차 거둘 수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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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경우, 도요토미히데요시 죽음 이후 도쿠가와이에야스가 새로운 쇼군으로 오른 후 '에도막부'시대를 열었다. | 일본의 경우, 도요토미히데요시 죽음 이후 도쿠가와이에야스가 새로운 쇼군으로 오른 후 '에도막부'시대를 열었다. | ||
도쿠가와이에야스는 도요토미히데요시 정권과 반대의 입장을 표하며, 새로운 권위를 세우고자 조선과 화친을 맺었다. | 도쿠가와이에야스는 도요토미히데요시 정권과 반대의 입장을 표하며, 새로운 권위를 세우고자 조선과 화친을 맺었다. | ||
| − | 조선도 전쟁을 방지하기 위해 화친에 응했으며, 이후 쇼군이 요청할 때마다 '통신사'를 파견하여 교류하였다.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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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조선도 전쟁을 방지하기 위해 화친에 응했으며, 이후 쇼군이 요청할 때마다 '''통신사'''를 파견하여 교류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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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통신사는 일본에 끌려간 포로를 송환하기 위해서였고, 이후 유학 등 선진문물 전파도 이어졌다. | 초기 통신사는 일본에 끌려간 포로를 송환하기 위해서였고, 이후 유학 등 선진문물 전파도 이어졌다. | ||
| − | 명의 경우, 조선의 군대 파병으로 군사력이 매우 약화되었다. 이에 반해 북방의 여진 세력은 점점 커져가며 점점 명이 외부세력을 방어하기 힘들어졌고, 이후 여진이 성장하여 국가인 '청'을 세우자 명과의 사대관계를 유지하던 조선도 혼란에 빠졌다. 이는 1636년의 병자호란의 배경과도 이어진다.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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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명의 경우, 조선의 군대 파병으로 군사력이 매우 약화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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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이에 반해 북방의 여진 세력은 점점 커져가며 점점 명이 외부세력을 방어하기 힘들어졌고, 이후 여진이 성장하여 국가인 '청'을 세우자 명과의 사대관계를 유지하던 조선도 혼란에 빠졌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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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 '''병자호란''' | ||
| − | 병자호란은 1636년에 일어난 조선과 청 사이에 일어난 전쟁이다. | + | 병자호란은 1636년에 일어난 조선과 청 사이에 일어난 전쟁이다. |
| − | 1627년 정묘호란 시기, 청과 형제관계를 맺은 이후, 청은 조선과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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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627년 정묘호란 시기, 청과 형제관계를 맺은 이후, 청은 조선과 '''군신관계'''를 청했고 조선 내에서는 척화론과 주화론이 대립하며 시간을 끌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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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결국 척화론이 우세하여 조선은 청의 군신관계 요구를 거절하였고, 이에 화가 난 청나라 황제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조선으로 쳐 들어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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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당시 최고의 대선책은 임금이 강화도로 피난을 가는 것이었지만, 실패로 끝이 났고 인조는 첩첩한 산 중의 남한산성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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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고립된 산성은 빠르게 포위되었고, 결국 '''군신관계'''를 맺게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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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span style="background:#E0FFFF">병자호란은 조선 역사상 처음으로 왕이 출성항복하는 사건이다.</span>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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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이후 조선은 사대 상대가 명에서 청으로 바뀌어야 했지만, 결코 쉽지 않았고 명의 중화의식을 가장 잘 계승한 나라라는 <font color="#FFD700">'''소중화'''</font>의식이 조선 사대부들 사이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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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벌론'' | ''북벌론'' | ||
| − | 북벌론은 오랑캐인 청나라를 정복하여 치욕을 씻고, 중화의식을 회복하자는 의미에서 추진된 담론이다. 북벌론은 병자호란 이후 싹트기 시작했고, 명나라가 사라진 17세기 쯤에 성행하였다. | + | 북벌론은 오랑캐인 청나라를 정복하여 치욕을 씻고, 중화의식을 회복하자는 의미에서 추진된 담론이다. |
| − | 인조이후, 효종은 북벌을 시행하기 위해 정치적, 군사적으로 노력하였다. 효종은 척화계열의 산당 세력들을 대거 등용하여 북벌 계획을 세웠으나, 청나라가 조선의 정세를 다 파악할 수 있었기에 청나라는 치는 북벌계획은 구체적으로 시행되기 어려웠다. 또한 거듭된 흉년과 자연재해로 전쟁을 준비할 경제적인 여력이 충분하지 않았고, 결국 북벌론은 소중화 의식을 지닌 조선 사대부들 사이에 퍼져 여전히 '청은 오랑캐이다'라고 주장하게 만들었다. | + | |
| + | 북벌론은 병자호란 이후 싹트기 시작했고, 명나라가 사라진 17세기 쯤에 성행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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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인조이후, 효종은 북벌을 시행하기 위해 정치적, 군사적으로 노력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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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효종은 척화계열의 산당 세력들을 대거 등용하여 북벌 계획을 세웠으나, 청나라가 조선의 정세를 다 파악할 수 있었기에 청나라는 치는 북벌계획은 구체적으로 시행되기 어려웠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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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또한 거듭된 흉년과 자연재해로 전쟁을 준비할 경제적인 여력이 충분하지 않았고, 결국 북벌론은 소중화 의식을 지닌 조선 사대부들 사이에 퍼져 여전히 '''청은 오랑캐이다'''라고 주장하게 만들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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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학론'' | ''북학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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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도정치''' | '''세도정치''' | ||
| − | 19세기에는 특정 가문이 관직을 독점하는 세도정치가 시행되었다. 이는 탕평정치의 지속에 불만을 품었던 귀족세력의 반발심에 의한 것이다. 대표적인 세도 가문은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반남 박씨, 대구 서씨, 연안 이씨, 풍산 홍씨 등이다. 세도가문의 중심 배경은 임진왜란 이후 강화된 비변사의 기능과 관련이 있다. 비변사는 초기에 왜구·여진의 침입에 대처하기 위해 국방 관련 일을 처리하는 임시기구로 출발하였지만,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권한이 더욱 확대되어 임시 군사대책기관에서 정책결정기구로까지 그 성격이 변하였다. 이후 조선 후기에는 국정을 총괄하는 기구로써 그 기능이 중요해졌는데, 세도 가문이 비변사를 독점하면서 마음대로 일을 결정하고 왕에게 보고할 수 있었다. 예를들면, 안동 김씨 가문의 대표적 인물인 김조순은 국왕의 장인, 왕비의 친아버지에다가 정조가 친히 국왕(그 당시 세자)을 돌볼 임무를 맡겼다는 사실을 이용하여 홍문관 대제학(大提學)과 규장각 검교제학(檢校提學)을 오랫동안 맡아 학술과 정치이념을 이끌었고, 당시 최정예 군사력인 훈련도감의 훈련대장을 오래 지내다 심복에게 넘겨주었다. 또한 비변사 주교사당상(舟橋司堂上)을 맡았는데 그것을 통해 대상인의 상업 행위를 감독하고 경제적 실권을 장악했던 것으로 판단된다.<ref> 우리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세도정치」,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9786, 2025. 6. 24. </ref> | + | 19세기에는 특정 가문이 관직을 독점하는 세도정치가 시행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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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이는 탕평정치의 지속에 불만을 품었던 귀족세력의 반발심에 의한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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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대표적인 세도 가문은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반남 박씨, 대구 서씨, 연안 이씨, 풍산 홍씨 등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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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세도가문의 중심 배경은 임진왜란 이후 강화된 비변사의 기능과 관련이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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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비변사는 초기에 왜구·여진의 침입에 대처하기 위해 국방 관련 일을 처리하는 임시기구로 출발하였지만,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권한이 더욱 확대되어 임시 군사대책기관에서 정책결정기구로까지 그 성격이 변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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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이후 조선 후기에는 국정을 총괄하는 기구로써 그 기능이 중요해졌는데, 세도 가문이 비변사를 독점하면서 마음대로 일을 결정하고 왕에게 보고할 수 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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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예를들면, 안동 김씨 가문의 대표적 인물인 김조순은 국왕의 장인, 왕비의 친아버지에다가 정조가 친히 국왕(그 당시 세자)을 돌볼 임무를 맡겼다는 사실을 이용하여 홍문관 대제학(大提學)과 규장각 검교제학(檢校提學)을 오랫동안 맡아 학술과 정치이념을 이끌었고, 당시 최정예 군사력인 훈련도감의 훈련대장을 오래 지내다 심복에게 넘겨주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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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또한 비변사 주교사당상(舟橋司堂上)을 맡았는데 그것을 통해 대상인의 상업 행위를 감독하고 경제적 실권을 장악했던 것으로 판단된다.<ref> 우리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세도정치」,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9786, 2025. 6. 24. </ref> | ||
'''쇄국정책''' | '''쇄국정책''' | ||
| − | 쇄국정책은 세도정치가 득세했던 철종 사후, 어린 정조가 왕위를 승계하고 그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정치를 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사실 애초에 조선이 활발히 문호를 개방한 것은 아니었으나, 일명 '쇄국정책'은 흥선대원군이 실행한 외교 정책이라 할 수 있다. 흥선대원군은 안으로는 왕권 강화 정책을 펴는 한편, 밖으로는 외세의 침략과 문물을 거부하는 쇄국정책을 강력히 실행하였다. 따라서 세도정치 가문의 주류였던 안동 김씨 세력을 정계에서 몰아내고 다양한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외세의 문호 개방에 응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이는 열강 세력들이 조선을 군사적으로 침략하는 계기가 되었다. | + | 쇄국정책은 세도정치가 득세했던 철종 사후, 어린 정조가 왕위를 승계하고 그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정치를 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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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사실 애초에 조선이 활발히 문호를 개방한 것은 아니었으나, 일명 '쇄국정책'은 흥선대원군이 실행한 외교 정책이라 할 수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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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따라서 세도정치 가문의 주류였던 안동 김씨 세력을 정계에서 몰아내고 다양한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외세의 문호 개방에 응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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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하지만, 이는 열강 세력들이 조선을 군사적으로 침략하는 계기가 되었다. | ||
'''개항''' | '''개항''' | ||
| − | 18세기 조선 해안에는 서양의 함선인 '이양선'이 빈번히 출몰하면서 개항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탐험과 측량을 목적으로 하였지만, 19세기가 되자 배를 끌고와 통상을 요구하였다. 조선은 영국, 프랑스, 미국, 러시아, 독일 등등 여러 나라에게 통상을 요구받았으나,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말미암아 허가해주지 않았다. 이에 서양 열강 국가들과 조선 사이에 여러차례 전쟁을 발생하였다. | + | 18세기 조선 해안에는 서양의 함선인 '이양선'이 빈번히 출몰하면서 개항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
| − | 프랑스 선교사의 죽음을 문제로 프랑스가 일으킨 전쟁은 '병인양요'이며, 독일 상인 옵페르트는 통상 허가를 받지 못하자 흥선 대원군 아버지인 남연군의 무덤을 파 부장품을 훔쳐갔다. 또한, 미국의 제너럴 셔먼호가 조선인과 전투를 벌이던 도중 침몰되자 그 배상을 요구하는 문제로 '신미양요'가 일어났다. 흥선 대원군의 쇄국에 대한 강한 결심과 백성들의 끝없는 항전 덕분에 끝내 쇄국을 지킬 순 있었으나, 결국 조선은 일본의 강화도 사건으로 통상을 허용하면서 잇따라 서양 열강 국가들도 조선과 교류하게 되었다.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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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프랑스 선교사의 죽음을 문제로 프랑스가 일으킨 전쟁은 '병인양요'이며, 독일 상인 옵페르트는 통상 허가를 받지 못하자 흥선 대원군 아버지인 남연군의 무덤을 파 부장품을 훔쳐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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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또한, 미국의 제너럴 셔먼호가 조선인과 전투를 벌이던 도중 침몰되자 그 배상을 요구하는 문제로 '신미양요'가 일어났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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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흥선 대원군의 쇄국에 대한 강한 결심과 백성들의 끝없는 항전 덕분에 끝내 쇄국을 지킬 순 있었으나, 결국 조선은 일본의 강화도 사건으로 통상을 허용하면서 잇따라 서양 열강 국가들도 조선과 교류하게 되었다. | ||
2025년 6월 24일 (화) 07:31 기준 최신판
주요 키워드
| 정치적 변화 | 임진왜란, 병자호란, 탕평책, 북벌론, 북학론, 세도정치, 쇄국정책, 개항 |
| 사회적 변화 | 신분제 붕괴, 양반수 증가, 상품화폐경제 발달 |
| 사상적 변화 | 양명학, 실학 |
| 문화적 변화 | 서민문화 발달, 한글소설, 사설시조, 판소리, 탈춤 |
정치적 변화
임진왜란 이후
임진왜란은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총 7년간 이루어진 전쟁이다.
7년 간의 전쟁으로 인해 조선, 명, 일본 등 동아시아 국제 관계의 변화가 생겼으며, 모두 큰 피해를 입었다.
조선의 경우, 전쟁이 본토에서 이루어졌으므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할 수 있다.
국토는 황폐화되었고 토지를 기록한 장부마저 사라져 임진왜란 이후 제대로 된 세금조차 거둘 수 없었다.
일본의 경우, 도요토미히데요시 죽음 이후 도쿠가와이에야스가 새로운 쇼군으로 오른 후 '에도막부'시대를 열었다.
도쿠가와이에야스는 도요토미히데요시 정권과 반대의 입장을 표하며, 새로운 권위를 세우고자 조선과 화친을 맺었다.
조선도 전쟁을 방지하기 위해 화친에 응했으며, 이후 쇼군이 요청할 때마다 통신사를 파견하여 교류하였다.
초기 통신사는 일본에 끌려간 포로를 송환하기 위해서였고, 이후 유학 등 선진문물 전파도 이어졌다.
명의 경우, 조선의 군대 파병으로 군사력이 매우 약화되었다.
이에 반해 북방의 여진 세력은 점점 커져가며 점점 명이 외부세력을 방어하기 힘들어졌고, 이후 여진이 성장하여 국가인 '청'을 세우자 명과의 사대관계를 유지하던 조선도 혼란에 빠졌다.
이는 1636년의 병자호란의 배경과도 이어진다.
병자호란
병자호란은 1636년에 일어난 조선과 청 사이에 일어난 전쟁이다.
1627년 정묘호란 시기, 청과 형제관계를 맺은 이후, 청은 조선과 군신관계를 청했고 조선 내에서는 척화론과 주화론이 대립하며 시간을 끌었다.
결국 척화론이 우세하여 조선은 청의 군신관계 요구를 거절하였고, 이에 화가 난 청나라 황제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조선으로 쳐 들어왔다.
당시 최고의 대선책은 임금이 강화도로 피난을 가는 것이었지만, 실패로 끝이 났고 인조는 첩첩한 산 중의 남한산성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고립된 산성은 빠르게 포위되었고, 결국 군신관계를 맺게 되었다.
병자호란은 조선 역사상 처음으로 왕이 출성항복하는 사건이다.
이후 조선은 사대 상대가 명에서 청으로 바뀌어야 했지만, 결코 쉽지 않았고 명의 중화의식을 가장 잘 계승한 나라라는 소중화의식이 조선 사대부들 사이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북벌론과 북학론
북벌론
북벌론은 오랑캐인 청나라를 정복하여 치욕을 씻고, 중화의식을 회복하자는 의미에서 추진된 담론이다.
북벌론은 병자호란 이후 싹트기 시작했고, 명나라가 사라진 17세기 쯤에 성행하였다.
인조이후, 효종은 북벌을 시행하기 위해 정치적, 군사적으로 노력하였다.
효종은 척화계열의 산당 세력들을 대거 등용하여 북벌 계획을 세웠으나, 청나라가 조선의 정세를 다 파악할 수 있었기에 청나라는 치는 북벌계획은 구체적으로 시행되기 어려웠다.
또한 거듭된 흉년과 자연재해로 전쟁을 준비할 경제적인 여력이 충분하지 않았고, 결국 북벌론은 소중화 의식을 지닌 조선 사대부들 사이에 퍼져 여전히 청은 오랑캐이다라고 주장하게 만들었다.
북학론
북한론이란, 청나라의 발달된 문물을 배워야 한다는 담론으로, 이를 주장한 대표적인 인물은 북학파, 연암일파라고 불려지는 홍대용(洪大容), 성대중(成大中), 박지원(朴趾源), 박제가(朴齊家), 유득공(柳得恭), 이덕무(李德懋), 이서구(李書九), [이희경(李喜經)] 등이다. 북학의 주요 내용은 벽돌과 수레의 사용, 농기구의 개량, 둔전의 설치, 대외 무역의 장려, 서양인의 초빙과 실제적인 농 · 상업 기술론이었다.[1] 하지만,기술 도입에 관한 구체적인 방법론이 부족했고 조선의 실정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졌다. 예를 들어 수레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먼저 도로가 정비가 앞서 진행되어야 하는데, 도로 구축을 하지 않고 수레 사용을 주장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탕평책
탕평 정치는 영조 때 자리잡았다. 탕평(蕩平)이란? 서경에서 나온 말로, 임금의 정치가 한쪽을 편들지 않고 사심이 없으며, 당을 이루지도 않는 상태에 이르는 것을 의미한다. 영조는 왕과 신하 사이의 의리를 바로 세워야 한다며, 붕당을 없애자는 논리에 동의하는 탕평파를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하였다. 그리고 붕당의 뿌리를 제거하기 위하여 공론의 주재자로서 인식되던 산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고, 그들의 본거지인 서원을 대폭 정리하였다. 아울러 이조 전랑의 권한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그들이 자신의 후임자를 천거하고, 3사의 관리를 선발할 수 있게 해 주던 관행을 없앴다. 그러나 이조 전랑의 후임자 천거권은 이후 정조대에 가서야 완전히 폐지되었다.[2]
영조 때 시행한 탕평책은 정조 때에 더욱 강화하였다. 정조는 누가 옳은지 그른지 명백히 규명하여 적극적으로 탕평책을 주도하였으며, 영조 때 세력을 키운 척신과 환관 등을 제거하였다. 게다가 권력에서 배제되었던 소론과 남인 계열의 관리들도 정치에 참여하도록 독려하였다. 붕당정치 세력이 커질 것을 우려하여 새로운 신진 인물을 등용하고, 이들을 비롯한 중, 하급 관리에서 유능한 인재를 뽑아 교육을 시키는 초계문신제를 도입하였다.
세도정치
19세기에는 특정 가문이 관직을 독점하는 세도정치가 시행되었다.
이는 탕평정치의 지속에 불만을 품었던 귀족세력의 반발심에 의한 것이다.
대표적인 세도 가문은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반남 박씨, 대구 서씨, 연안 이씨, 풍산 홍씨 등이다.
세도가문의 중심 배경은 임진왜란 이후 강화된 비변사의 기능과 관련이 있다.
비변사는 초기에 왜구·여진의 침입에 대처하기 위해 국방 관련 일을 처리하는 임시기구로 출발하였지만,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권한이 더욱 확대되어 임시 군사대책기관에서 정책결정기구로까지 그 성격이 변하였다.
이후 조선 후기에는 국정을 총괄하는 기구로써 그 기능이 중요해졌는데, 세도 가문이 비변사를 독점하면서 마음대로 일을 결정하고 왕에게 보고할 수 있었다.
예를들면, 안동 김씨 가문의 대표적 인물인 김조순은 국왕의 장인, 왕비의 친아버지에다가 정조가 친히 국왕(그 당시 세자)을 돌볼 임무를 맡겼다는 사실을 이용하여 홍문관 대제학(大提學)과 규장각 검교제학(檢校提學)을 오랫동안 맡아 학술과 정치이념을 이끌었고, 당시 최정예 군사력인 훈련도감의 훈련대장을 오래 지내다 심복에게 넘겨주었다.
또한 비변사 주교사당상(舟橋司堂上)을 맡았는데 그것을 통해 대상인의 상업 행위를 감독하고 경제적 실권을 장악했던 것으로 판단된다.[3]
쇄국정책
쇄국정책은 세도정치가 득세했던 철종 사후, 어린 정조가 왕위를 승계하고 그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정치를 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사실 애초에 조선이 활발히 문호를 개방한 것은 아니었으나, 일명 '쇄국정책'은 흥선대원군이 실행한 외교 정책이라 할 수 있다.
흥선대원군은 안으로는 왕권 강화 정책을 펴는 한편, 밖으로는 외세의 침략과 문물을 거부하는 쇄국정책을 강력히 실행하였다.
따라서 세도정치 가문의 주류였던 안동 김씨 세력을 정계에서 몰아내고 다양한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외세의 문호 개방에 응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이는 열강 세력들이 조선을 군사적으로 침략하는 계기가 되었다.
개항
18세기 조선 해안에는 서양의 함선인 '이양선'이 빈번히 출몰하면서 개항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탐험과 측량을 목적으로 하였지만, 19세기가 되자 배를 끌고와 통상을 요구하였다.
조선은 영국, 프랑스, 미국, 러시아, 독일 등등 여러 나라에게 통상을 요구받았으나,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말미암아 허가해주지 않았다.
이에 서양 열강 국가들과 조선 사이에 여러차례 전쟁을 발생하였다.
프랑스 선교사의 죽음을 문제로 프랑스가 일으킨 전쟁은 '병인양요'이며, 독일 상인 옵페르트는 통상 허가를 받지 못하자 흥선 대원군 아버지인 남연군의 무덤을 파 부장품을 훔쳐갔다.
또한, 미국의 제너럴 셔먼호가 조선인과 전투를 벌이던 도중 침몰되자 그 배상을 요구하는 문제로 '신미양요'가 일어났다.
흥선 대원군의 쇄국에 대한 강한 결심과 백성들의 끝없는 항전 덕분에 끝내 쇄국을 지킬 순 있었으나, 결국 조선은 일본의 강화도 사건으로 통상을 허용하면서 잇따라 서양 열강 국가들도 조선과 교류하게 되었다.
사회적 변화
신분제 붕괴와 양반수 증가
조선 전기에는 양반, 중인, 상민, 천민의 네 신분이 형성되어 있었다. 양반의 사회적 지위와 특권이 강화되면서, 조선 사회는 양반 중심의 사회로 굳어져 가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신분의 변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어 이러한 신분 구조에 변화가 일어났다. 신분의 변동은 양반층 내부에서 심각하게 일어났는데, 조선 후기에 들어와 노론이 장기간 집권하면서 이들은 정치의 실권을 독점하고 부정한 수단으로 자제들을 과거에 합격시켜 그 지위를 세습시켰다. 이러한 현상은 세도 정치가 시작되면서 더욱 심화되어 신분제의 붕괴가 일어났다.[4] 이후 임진왜란의 영향으로 국가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공명첩'이라는 신분을 사고 팔 수 있는 문서가 생겼다. 돈이 많은 평민들은 신분을 사 양반이 되는 경우가 많았고, 따라서 양반의 수가 증가하게 되었다. 이와 반대로 양반층 내에서도 돈이 부족해 일반 농민이나 소작농으로 생계를 이어가거나 신분을 팔기도 하였다.
상품화폐경제 발달
상품화폐경제는 조선 후기 상업의 발달과 함께 교환 수단으로 '동전'이 발행되면서 시작되었다. 동전이 교환수단으로 정착하기 이전에는 쌀이 화폐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쌀은 무거워서 많이 가지고 다닐 수 없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가벼운 화폐는 소비의 편리함을 주었고, 따라서 판매와 소비가 촉진하였다. 동전은 숙종 때 발행을 결정하였는데, 불과 몇 십년 되지 않아 많이 유통되었고, 조세 수치를 동전으로 거두기도 했다. 하지만 매년 수백냥에 이르는 동전 수취로, 농민들에게 부담을 지게 하여 몰락을 초래하기도 했다.
사상적 변화
양명학
명나라 왕수인에 의해 집대성된 학문이다. 양명학을 대표하는 키워드는 '지행합일'과 '심즉리'이다. 이는 주희의 성리학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으나, 성리학과 내용적으로 대립을 이룬다. 주희는 성을 이로, 마음을 기로 파악하였지만, 왕수인은 마음안에 이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주희는 세상 만물에 안에 이가 있으므로, 격물치지 만물의 이치를 깨달아야 하며 그 진리를 깨닫고 행동해야 한다는 '선지후행'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왕수인의 양명학은 만물에게서 이치를 찾지 않고 이미 마음 속에 이가 있기 때문에 지행합일을 주요 이론으로 정립하였다.
실학
실학은 조선 후기 사회 경제적 문제들에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해 등장한 사상이다. 실학 사상이 등장하게 된 원인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첫째 조선 왕조의 통치 질서가 위기이다. 조선 왕조는 두번의 전란을 겪으면서 무너질 위기에 쳐했으나 보수적 관료들은 대책을 제시하지 못하였다. 이에 진보적 관리들이 해결책을 내놓으면서 개혁을 주장하였다. 두번째, 성리학이 현실적인 문제에 해결책을 제시해주지 못하였다. 세번째, 조선후기 경제가 발달하면서 발전을 촉구하는 실학 사상이 등장하게 되었다. 네번째, 조선 후기 무너진 신분제로 인해 양반층과 서민들의 생활에 관심이 집중되며 실학 사상이 발달하였다. 다섯번째, 서학의 전래로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상이 조선 지식인에게 퍼졌다. 여섯번째, 고증학의 '실사구시'가 영향을 주어 학문에실증적 방법에 주목하였다.
조선의 실학은 농업과 상업 두 갈래를 주축으로 진행되었으며, 이들을 각각 중농학파와 중상학파로 부른다.
중농학파의 경우, 농촌 경제의 안정이 한 백성의 삶과 국가의 생존과 직결되기 때문에 농업에 주목하였다. 실학자들은 토지의 편중이 농업의 발달을 저해한다고 보았고, 여러 토지 균분 제도에 대해 의견을 모았다. 예를 들면, 유형원의 균전론, 이익의 한전론, 정약용의 여전론 등이 있다.
중상학파는 상업의 발전에 주목하였다. 국내 상공업의 발전이 하고, 학자들이 청나라의 발달된 문물을 보고 옴에 따라 새로운 경향이 생겼다. 중상학파 학자들은 신분제의 비효율성, 수레와 화폐 사용, 유통과 소비의 촉진을 주장하며 상업의 발전해야 부국강병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의 주장과 노력은 보다 적극적인 방안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문화사적 변화
서민문화의 발달
조선 후기 상업과 농업이 발달하면서 일반 평민들 중에서도 부를 축적하여 안정된 삶을 구가하였다. 부유해진 이들은 점차 여유가 생겨 예술에 시선을 돌렸고, 자식들을 서당에 나가 공부를 하도록 했는데, 이로 인해 서민문화가 꽃피우게 되었다.
한글소설
조선후기 '한글소설'이 유행하였다. 한글소설은 한글로 되어 있어 서민들이 읽기 쉬웠으며, 평범한 인물이 등장하여 사회모순을 비판하거나 문제로 삼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한글소설의 대표적인 작품은 흥부전, 춘향전, 홍길동전, 심청전, 콩쥐와팥쥐, 장화홍련전 등이 있다.
한글소설은 서민들의 오락기능을 수행하였으며, 일반 서민들 뿐만 아니라 양반 부녀자들, 왕실의 여성 귀족들도 한글 소설을 많이 읽었다. 이는 창덕궁의 낙선재에서 여러 장편 한글 소설이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글소설이 발달함에 따라 돈을 주고 책을 빌려주는 세책점이 흥했고, 일정한 장소와 시간에서 소설책을 낭독해주는 이야기꾼 전기수가 많이 등장하였다.
사설시조
사설지로란 사대부의 대표적인 시가 장르인 기존의 평시조보다 장형화된 것을 말한다. 사설시조는 작가 층에 서민이 유입됨에 따라 발전하였는데, 남년 간의 사랑, 고달픈 삶, 양반 등 지배계층에 대한 풍자가 주요 주제로 채택되었다. 평시조보다 형식과 규칙 등 제약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서민들도 자유롭게 창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래는 대표적인 사설시조 한 편이다.
두꺼비 파리를 물고 두엄 위에 치달아 앉아 건넛산을 바라보니 흰 송골매 떠 있거늘 가슴이 끔찍하여 풀떡 뛰어 내닫다가 두엄 아래 자빠졌구나 마침 날랜 나였기에 망정이지 피멍 들 뻔하였네
- 『청구영언』에 수록된 작자 미상의 사설시조 -
판소리
조선 후기는 도시와 상업이 발달하였다. 이에 따라 시장이 활발하였는데, 판소리는 시장을 무대삼아 발달하였다. 판소리는 소리꾼 한 명과 북치는 사람이 고수 2명으로 구성되었고, 소리꾼은 고수의 북장단에 맞추와 창(노래)와 아니리(말)등으로 판을 이끌어나갔다. 19세기에 이르러 신재효가 여러 종류의 판소리를 여섯 마당으로 정리하였지만, 현재는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의 다섯 마당만 전해지고 있다. 판소리는 서민 중심 문화였지만, 이후 양반들까지 퍼지면서 내용이 조금 변하였다. 초기 판소리는 서민들의 사회 비판 의식이 잘 드러났고, 후기로 갈수록 한문 표현, 충성과 효도 등 유교 윤리 가치관이 반영되었다.
탈춤
탈춤 또한 판소리와 같이 시장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탈춤은 광대라고 불리는 재주꾼들이 탈을 쓰고 연기, 노래, 춤 등 공연을 하는 것을 말한다. 당시 양반들에 대한 비판이 주 내용이었고, 전해져오는 탈춤은 안동의 하회 별신굿 탈춤, 황해도의 봉산 탈춤과 강령 탈춤, 북청의 사자놀이가 유명하다. 탈춤 외에 시장에서 솟대나 줄을 타기도 하였다.
각주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북학」,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4783,2025.6.24.
- ↑ 우리역사넷, 「영조와 정조의 탕평 정치」,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ta/view.do?levelId=ta_h71_0040_0040_0030_0030, 2025. 6. 24.
- ↑ 우리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세도정치」,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9786, 2025. 6. 24.
- ↑ 우리역사넷, 「신분제의 변화」,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ta/view.do?levelId=ta_m62_0040_0010, 2024. 6.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