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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적이고 현실주의적인 경향을 보여준 소설이다.
 
진보적이고 현실주의적인 경향을 보여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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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6월 24일 (화) 06:02 기준 최신판

작가

허균.jpeg

[1]










<허균>
백월거사
단보
본관 양천
출생 1569년
사망 1618년

허균은 어릴 때부터 시문에 능했다.

5세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해 9세 때에는 시를 지을 줄 알았다.


그가 12살 되는 때에 아버지를 잃었고, 이에 더욱 문학 공부에 전념하였다.


학문은 유성룡에게, 시는 삼당시인 중 한 명인 이달에게 배웠다고 한다.


1594년 26세 때에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고, 1597년 문과 중시에 장원을 했다.


이듬해 황해도도사가 되었으나 기생을 끌어들여 가까이 했다는 일로 6달 만에 파직됐다.


이후 여러 벼슬을 하였으나, 불교를 믿는다는 탄핵을 받아 다시 벼슬길에서 물러났다.


종사관, 형조참의를 하였으나, 1610년 전시의 시험을 주관하면서 조카와 사위를 합격시켰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전라도 함열로 유배를 갔다.


계축옥사가 일어나고 평소 친했던 서양갑, 심우영 등이 처형당하자 신변의 위험을 느낀 허균은 대북에 참여하였다.


1617년 좌참찬이 되었다.

폐모론을 주장하다가 폐모론의 반대 입장인 영의정 기자헌이 길주로 유배를 갔다.


1618년 남대문에 격문을 붙인 사건이 일어났는데, 허균의 심복이 붙였다는 것으로 알려졌다.

허균이 역적모의하였다 하여 저자거리에서 능지처참형을 받았다. [2]


배경

적서차별

조선후기 조선 사회가 가지는 문제 중 하나가 바로 적서차별이었다.


서자와 얼자는 서얼차대법에 의해 과거를 응시하지 못했고 관리로 등용될 수 있는 길이 제한적이었다.


서얼차대법은 후기로 내려올수록 완화되었지만, 서얼에 대한 차별은 관행으로 굳어져 사람들의 인식 속에 사라지지 않았다.


적서 간의 갈등은 공적, 사적인 자리 가리지 않고 드러났다.

만일 서자가 문중의 회의에 참석하면 나이에 상관없이 적자 아래에 앉고, 반말을 들어야 했다.

선조의 제사를 지낼 때는 술을 올리지도 못하였다.[3]


허균은 조선 후기 적서차별 문제를 비판하고자 홍길동을 서자 출신으로 설정하여 작품을 창작한 것으로 보인다.


지배층 억압

조선 후기 사회가 문란해지면서 탐관오리들의 횡포가 극심해졌다.

탐관오리들은 백성의 재산과 재물을 약탈하여 자기 재산을 채우기 바빴다.

이에 백성의 삶은 피폐해졌고 어딘가 영웅이 나타나 구원해 주길 바랬다.

백성의 이런 바람을 담아 탄생된 주인공이 홍길동이며,

홍길동은 활빈당 무리를 이끌고 탐관오리들을 정벌하여 그들이 빼앗아간 재산들을 백성들에게 돌려주었다.

왕도정치

왕도정치군주가 공평하고 사사로움이 없는 태도로 정치를 운영해 이상적 사회를 수립하는 것을 의미하는 유교의 대표적 정치사상이다. [4]


‘왕도’는 공자이전에 '치우침이 없는 공정함’을 의미했다.

하지만 공자가 이상적인 인간과 정치의 목표로 인(仁)을 제시한 이후, 인정(仁政)이 왕도 정치의 핵심으로 위치하게 되었다.


맹자는 각축전인 전국시대를 경험하면서 패도(覇道) 정치에 대비되는 개념으로서 인정(仁政)을 내용으로 하는 왕도 정치를 주장하였다.

특히 맹자는 왕도 정치 실현을 위해 백성들이 기본적으로 경제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군주가 백성들의 안정된 생업을 보장해 주고 이들을 덕으로 감화시킬 때 진정한 왕도 정치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홍길동은 조선을 벗어나 이상국가인 율도국을 세워 왕도 정치를 실현하려고 하였다.

내용

홍길동전.jpeg

[5]











홍길동은 홍 판서와 시비 춘섬 사이에서 태어난 서자 아이이다.


홍 판서의 꿈처럼, 길동은 어려서부터 특출난 면모를 보였다.

도술을 사용할 수 있었고, 무술 솜씨도 뛰어났다.


하지만, 서자라는 이유로 호부호형하지 못하였고, 길동은 이에 한이 맺혔다.


가족들은 길동의 재주가 화근이 될까 두려워 자객을 시켜 길동을 없애고자 하였다.

길동은 자객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났고, 집을 떠나기로 다짐했다.


집을 떠난 길동은 활빈당이라는 도적의 우두머리가 되어 탐관오리들이 백성들에게 빼앗아간 재물을 탈취하여 돌려주었다.


이에 전국에서 길동을 잡으라는 체포령이 내려졌는데, 바람과 비를 부리고 둔갑술 등에 아무도 당해내지 못했다.


결국 조정은 길동의 가족을 통해 회유하고, 길동이 원하는 바인 병조판서의 꿈을 이루게 해주었다.


하지만 길동은 병조판서 직에 머물지 않고 홀연히 떠나 율도국의 왕이 된다.


[6]

의의

한글로 쓰여 있어 민중의 생각을 반영하고 독자층을 확보하였다.

진보적이고 현실주의적인 경향을 보여준 소설이다.


각주

  1. 「김현민, 조선의 계급혁명 고뇌한 ’허균의 생각‘」,『아틀라스뉴스』,2024, 7, 20, http://www.atla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8445,2025, 6, 24 접속.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허균」,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3030,2025, 6, 24.
  3. 우리역사넷, 「적서의문제」,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km/view.do?levelId=km_028_0040_0040_0030_0010, 2025, 6, 24.
  4. 우리역사넷, 「왕도정치」, https://contents.history.go.kr/front/tg/view.do?treeId=0201&levelId=tg_003_1320&ganada=&pageUnit=10, 2025, 6, 24.
  5. 디지털강릉문화대전, 「홍길동전」, https://gangneung.grandculture.net/gangneung/toc/GC00304015, 2025, 6, 24.
  6. [학교를 떠난 채움쌤][홍길동전 줄거리 요약] [2023. 2.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