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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식 군대인 별기군의 모습이다.
  
 
=='''요약'''==
 
=='''요약'''==
 
  1882년(고종 19) 6월 9일 신식 군대(별기군)와의 차별에 분노한 구식 군대가 일으킨 병란.</br>  
 
  1882년(고종 19) 6월 9일 신식 군대(별기군)와의 차별에 분노한 구식 군대가 일으킨 병란.</br>  
이후 어쩌고저쩌고이러쿵저러쿵 된다.
 
 
   
 
   
 
==배경==
 
==배경==
 
1876년(고종 13)에 맺어진 한 · 일수호조약(일명 강화도조약)으로 인해 대원군이 취한 쇄국정책이 무너지고, 개화파(開化派)와 수구파(守舊派)의 대립이 날카롭게 일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왕의 친정으로 정권을 내놓은 대원군은 척족인 민씨일파를 내치고 다시 집권할 기회를 엿보고 있는 중이었다. </br>
 
1876년(고종 13)에 맺어진 한 · 일수호조약(일명 강화도조약)으로 인해 대원군이 취한 쇄국정책이 무너지고, 개화파(開化派)와 수구파(守舊派)의 대립이 날카롭게 일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왕의 친정으로 정권을 내놓은 대원군은 척족인 민씨일파를 내치고 다시 집권할 기회를 엿보고 있는 중이었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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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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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식군대를 양성하는 별기군(別技軍)이 급료와 보급에서 좋은 대우를 받는 데 비해 구식군대인 무위영(武衛營) · 장어영(壯禦營) 2영의 군졸들은 13달 동안 봉급미를 받지 못해 불만이 높았다. 그러던 차에 겨우 한달치의 급료를 받게 되었으나, 그것마저 선혜청(宣惠廳) 고지기의 농간으로 말수가 턱없이 부족한데다 모래가 반 넘어 섞여 있었다. 이에 격분한 구식군졸들이 고지기를 때려 부상을 입히고 선혜청 당상(堂上) 민겸호(閔謙鎬)의 집으로 몰려가 저택을 파괴하고 폭동을 일으켰다. </br>
  
 
==경과==
 
==경과==
===운요호 사건의 경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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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태가 이에 이르자 난병들은 대원군에게 진정하기 위해 운현궁(雲峴宮)으로 몰려와 애소했다. 대원군은 겉으로는 난병을 달랬지만, 한편으로는 심복인 허욱을 시켜 그들을 지휘케 했다. 그리하여 군민의 불평은 대원군과 연결되어 민씨 및 일본 세력의 배척운동으로 확대되었다. 군민들은 별기군 병영으로 몰려가 일본인 교련관 호리모토(掘本禮造) 공병소위를 죽이고, 민중과 합세하여 일본 공사관(서대문 밖 청수관)을 포위, 불을 지르고 일본순사 등 13명의 일인을 살해했다. 그러나 하나부사(花房義質) 공사 등 공관원들은 모두 인천으로 도망쳐서 영국 배의 도움으로 본국으로 돌아갔다.
서구 열강의 포함외교에 의해 개항했던 경험을 그대로 조선에 적용해 일본은 해군 군함을 조선에 파견하였다. 이때 파견된 배가 운요호이다. 운요호는 영국에서 수입한 근대식 군함이다. 일본은 운요호를 부산에 침입시켰고 이에 대해 조선은 항의했지만, 일본 측은 외교사절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며 항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5월 9일 군함 제2테이묘호가 부산항으로 들어와 합류했고 두 군함이 함포사격을 하면서 위기감이 고조된다. 8월 21일 운요호가 강화도 해안에 정박했다가 선원 일부가 사전 예고 없이 배로 한강 하구를 거슬러 향해하자 초지진 포대에서 포격하였다. 운요호 또한 함포사격을 하여 다수의 민간인이 죽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후 이어진 일본의 개항요구===
 
그러나 일본은 이 사건을 빌미로 조선에 개항을 요구한다. 일본은 다시 강화도 앞바다에 무력시위를 하며, 이 사건의 책임을 조선에게 물었다. 조선은 일본의 강압적인 수교 통상 요구를 강제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이 사건의 결과로 조선은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고 개항하게 된다. </br>
 
 
 
[[파일:운요호사진.jpeg|500px|운요호]] </br>
 
위 사진은 운요호의 사진이다.
 
  
==조선에 미친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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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더욱 강력해진 군민은 대원군의 밀명에 따라 영돈령부사 이최응(李最應) 등을 살해하고, 명성황후를 제거하기 위해 창덕궁 돈화문 안으로 난입했다. 그러나 명성황후는 궁녀의 옷으로 변장한 후 궁궐을 탈출, 충주 장호원(長湖院)의 충주목사 민응식(閔應植)의 집으로 피신했다. 사태가 위급함을 느낀 고종은 전권을 대원군에게 맡겨 반란을 수습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대원군을 불러들였다. 이리하여 왕명으로 정권을 손에 넣은 대원군은 반란을 진정시키고 군제를 개편하는 등 군란의 뒷수습에 나섰지만, 민씨일파의 청원을 받아들인 청나라가 재빨리 군대를 파견함으로써 그의 재집권은 단명에 그치고 말았다. </br>
조선의 포격은 불법침입자에 대한 정당한 대응이었으며, 결과적으로 그 포격으로 인해 운요호는 아무런 타격을 입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국력이 약했기 때문에 이 사건으로 강제 개항을 하게 된다. </br>
 
운요호 사건은  흥선대원군 집권 시기 이래로 조선이 계속해오던 쇄국정책에 종지부를 찍게 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br>
 
개항을 하면서 세계에 진출하게 되었으나 강화도 조약이라는 불평등한 조약을 맺게 되었고, 이어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의 다른 서구 열강들과 근대적인 불평등한 개항 수교 통상조약을 맺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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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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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는 이 난의 책임을 물어 대원군을 톈진(天津)으로 납치해갔으며, 일본은 조선정부에 강력한 위협을 가해 주모자 처벌과 손해 배상을 내용으로 하는 제물포조약을 맺게 했다. 군변으로 시작된 이 난은 결국 대외적으로는 청나라와 일본의 조선에 대한 권한을 확대시켜주는 결과가 되었고, 대내적으로는 개화세력과 보수세력의 갈등을 노출시켜 갑신정변의 바탕을 마련해주었다. </br>
  
==관련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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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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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rame width="500" height="322" src="https://www.youtube.com/embed/GD8cOSZsge4" title="역덕이슈 오늘 I 81 1875년 9월 20일 운요호사건 발발"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 referrerpolicy="strict-origin-when-cross-origin" allowfullscreen></ifr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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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rame width="910" height="512" src="https://www.youtube.com/embed/Jki0yHcShSk" title="월급 13개월 밀린 건 선 넘었지.. &#39;임오군란&#39;으로 흥선대원군이 복귀 후 한 일! #벌거벗은한국사 EP.41 | tvN STORY 230201 방송"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 referrerpolicy="strict-origin-when-cross-origin" allowfullscreen></ifr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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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참고문헌==
<<德川막부의 천주교 禁敎정책에 관하여는 Jurgis Elisonas, “Chirstianity and Daimyo” in John Whitney Hall. ed., The Cambridge History of Japan(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1), Vol. 4, pp.301∼37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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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919497&cid=62048&categoryId=62048 한국근현대사사전]
<<德川시대 말기 일본의 국내정세에 관하여는 William G. Beasely, “The Meili Restoration”(Stanford:Stanford University Press, 1972), pp.74∼9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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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분류==
[[분류:개항부터_현재까지의_정치_교류]] [[분류:텀블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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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개항부터_현재까지의_정치_교류]] [[분류:소금토마토]]

2024년 6월 22일 (토) 23:50 기준 최신판

임오군란.jpeg

신식 군대인 별기군의 모습이다.

요약

1882년(고종 19) 6월 9일 신식 군대(별기군)와의 차별에 분노한 구식 군대가 일으킨 병란.

배경

1876년(고종 13)에 맺어진 한 · 일수호조약(일명 강화도조약)으로 인해 대원군이 취한 쇄국정책이 무너지고, 개화파(開化派)와 수구파(守舊派)의 대립이 날카롭게 일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왕의 친정으로 정권을 내놓은 대원군은 척족인 민씨일파를 내치고 다시 집권할 기회를 엿보고 있는 중이었다.

발단

신식군대를 양성하는 별기군(別技軍)이 급료와 보급에서 좋은 대우를 받는 데 비해 구식군대인 무위영(武衛營) · 장어영(壯禦營) 2영의 군졸들은 13달 동안 봉급미를 받지 못해 불만이 높았다. 그러던 차에 겨우 한달치의 급료를 받게 되었으나, 그것마저 선혜청(宣惠廳) 고지기의 농간으로 말수가 턱없이 부족한데다 모래가 반 넘어 섞여 있었다. 이에 격분한 구식군졸들이 고지기를 때려 부상을 입히고 선혜청 당상(堂上) 민겸호(閔謙鎬)의 집으로 몰려가 저택을 파괴하고 폭동을 일으켰다.

경과

사태가 이에 이르자 난병들은 대원군에게 진정하기 위해 운현궁(雲峴宮)으로 몰려와 애소했다. 대원군은 겉으로는 난병을 달랬지만, 한편으로는 심복인 허욱을 시켜 그들을 지휘케 했다. 그리하여 군민의 불평은 대원군과 연결되어 민씨 및 일본 세력의 배척운동으로 확대되었다. 군민들은 별기군 병영으로 몰려가 일본인 교련관 호리모토(掘本禮造) 공병소위를 죽이고, 민중과 합세하여 일본 공사관(서대문 밖 청수관)을 포위, 불을 지르고 일본순사 등 13명의 일인을 살해했다. 그러나 하나부사(花房義質) 공사 등 공관원들은 모두 인천으로 도망쳐서 영국 배의 도움으로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튿날 더욱 강력해진 군민은 대원군의 밀명에 따라 영돈령부사 이최응(李最應) 등을 살해하고, 명성황후를 제거하기 위해 창덕궁 돈화문 안으로 난입했다. 그러나 명성황후는 궁녀의 옷으로 변장한 후 궁궐을 탈출, 충주 장호원(長湖院)의 충주목사 민응식(閔應植)의 집으로 피신했다. 사태가 위급함을 느낀 고종은 전권을 대원군에게 맡겨 반란을 수습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대원군을 불러들였다. 이리하여 왕명으로 정권을 손에 넣은 대원군은 반란을 진정시키고 군제를 개편하는 등 군란의 뒷수습에 나섰지만, 민씨일파의 청원을 받아들인 청나라가 재빨리 군대를 파견함으로써 그의 재집권은 단명에 그치고 말았다.

결과

청나라는 이 난의 책임을 물어 대원군을 톈진(天津)으로 납치해갔으며, 일본은 조선정부에 강력한 위협을 가해 주모자 처벌과 손해 배상을 내용으로 하는 제물포조약을 맺게 했다. 군변으로 시작된 이 난은 결국 대외적으로는 청나라와 일본의 조선에 대한 권한을 확대시켜주는 결과가 되었고, 대내적으로는 개화세력과 보수세력의 갈등을 노출시켜 갑신정변의 바탕을 마련해주었다.

관련 자료

참고문헌

한국근현대사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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