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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학원 내의 일체의 외부세력을 반대한다.</br>
 
우리는 학원 내의 일체의 외부세력을 반대한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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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민주적 학칙의 민주적 학칙으로의 개정과 학원 언론의 자율화와 학생회의 민주화와 집회의 자유를 요구하며 어용교수 학자를 반대하며 학원당국의 민주행정 방향으로서의 성의 있는 노력을 요망한다.</br>
 
비민주적 학칙의 민주적 학칙으로의 개정과 학원 언론의 자율화와 학생회의 민주화와 집회의 자유를 요구하며 어용교수 학자를 반대하며 학원당국의 민주행정 방향으로서의 성의 있는 노력을 요망한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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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언론 인권 자유의 유보나 제약에 반대한다.</br>
 
우리는 언론 인권 자유의 유보나 제약에 반대한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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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민주제의 가장 핵심적 요소이며 공산체제에 대한 우월성인 인권과 자유가 국민총화의 시국관에 상충할 수밖에 없다는 괴상한 논리와 이론의 허위성을 단호히 고발하며 민주주의 생명이며 본질적인 요청인 언론의 자유를 국론분열, 국가이익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집권층에 대한 정당하며 필수적인 비판과 사실보도를 억압하는 것을 반대한다.</br>
 
자유민주제의 가장 핵심적 요소이며 공산체제에 대한 우월성인 인권과 자유가 국민총화의 시국관에 상충할 수밖에 없다는 괴상한 논리와 이론의 허위성을 단호히 고발하며 민주주의 생명이며 본질적인 요청인 언론의 자유를 국론분열, 국가이익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집권층에 대한 정당하며 필수적인 비판과 사실보도를 억압하는 것을 반대한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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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역사가 피를 흘리며 쟁취한 자유와 인권의 보장은 방종과 무질서와 혼란을 의미하지 않으며 민주회복과 조국통일의 유일한 길임을 재확인한다.</br>
 
인류의 역사가 피를 흘리며 쟁취한 자유와 인권의 보장은 방종과 무질서와 혼란을 의미하지 않으며 민주회복과 조국통일의 유일한 길임을 재확인한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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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경제적 민족주의를 당위적인 목표로 한 경제개발계획의 자립경제에 대한 무방향 역방향성을 고발한다.</br>
 
우리는 경제적 민족주의를 당위적인 목표로 한 경제개발계획의 자립경제에 대한 무방향 역방향성을 고발한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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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권력과 야합한 관료독점자본의 구조적 모순과 양적확대 추구에 따른 소비재생산부문의 확대와 자율적 재생산구조의 외면과 이로 인한 대외의존 심화와 종속의 가속화뿐 아니라 부실기업, 노사문제 등이 파생됨을 명확히 인식한다.</br>
 
정치 권력과 야합한 관료독점자본의 구조적 모순과 양적확대 추구에 따른 소비재생산부문의 확대와 자율적 재생산구조의 외면과 이로 인한 대외의존 심화와 종속의 가속화뿐 아니라 부실기업, 노사문제 등이 파생됨을 명확히 인식한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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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총체적인 책임과 결과로서 현 독재집권층은 유신헌법을 철폐하고 물러날 것을 요구한다.</br>
 
우리는 총체적인 책임과 결과로서 현 독재집권층은 유신헌법을 철폐하고 물러날 것을 요구한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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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회에서 야비한 수범과 민중의 참여를 배제하여 민주주의기능을 마비시키고 민주인사의 억압은 획일과 오류를 모욕적이고 추잡하게 강요하는 것일 뿐 아니라 독재적 야수성의 노정이라 단정치 않을 수 없다.</br>
 
의회에서 야비한 수범과 민중의 참여를 배제하여 민주주의기능을 마비시키고 민주인사의 억압은 획일과 오류를 모욕적이고 추잡하게 강요하는 것일 뿐 아니라 독재적 야수성의 노정이라 단정치 않을 수 없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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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화된 폭력성과 조직적 악의 근원인 유신헌법과 독재집권층의 퇴진만이 오천만 겨레의 통일의 첫걸음이요, 승공의 길임을 확신한다.</br>
 
제도화된 폭력성과 조직적 악의 근원인 유신헌법과 독재집권층의 퇴진만이 오천만 겨레의 통일의 첫걸음이요, 승공의 길임을 확신한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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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우들이여! 효원학우들이여!</br>
 
학우들이여! 효원학우들이여!</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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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앞날과 사회정의에 대한 우리들의 되풀이된 청원과 요구는 되풀이된 억압으로 답해졌다.</br>
 
민족의 앞날과 사회정의에 대한 우리들의 되풀이된 청원과 요구는 되풀이된 억압으로 답해졌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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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걸어나가! 정의로운 분노로 일어서자!</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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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을 가렸던 책을 치우고 틀어막혔던 입과 귀를 열자.</br>
 
얼굴을 가렸던 책을 치우고 틀어막혔던 입과 귀를 열자.</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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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의 피를 요구하는 자유 민주의 깃발을 우리가 잡고</br>
 
형제의 피를 요구하는 자유 민주의 깃발을 우리가 잡고</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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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민주의 무리, 자유의 착취 무리, 불의의 무리들을 향해 외치며 나아가자!</br>
 
반민주의 무리, 자유의 착취 무리, 불의의 무리들을 향해 외치며 나아가자!</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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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시, 도서관 앞</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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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선언문」 (복사본)
 
「민주선언문」 (복사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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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민주투쟁선언문.jpg|300픽셀|섬네일|오른쪽|민주투쟁선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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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월 15일 부산대학교 학생들은 부마항쟁 당시 대자보에 「민주선언문」<ref>http://www.buma1979.com/portal/bumaRecord/view.do?record_id=36</ref>과 「민주투쟁선언문」<ref>http://www.buma1979.com/portal/bumaRecord/view.do?record_id=37</ref>을 게재하였다. 선언문은 학원과 언론의 자유화를 요구하며 유신체제의 비민주성과 대외의존적 경제정책을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두 선언문이 부산대학교에 붙여진 다음날, 부마항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학생들의 시위는 결코 작은 움직임이 아니었다. 시위대는 학교 정문을 지나 시내로 나갔고, 대학생뿐만 아니라 회사원, 농동자, 상인, 고등학생 등이 시위대에 합류했다. 부산의 시위 소식은 마산으로 전해지면서 시위가 빠른 속도로 확대되었으며, 부산, 마산 지역의 시민들은 건물에서 물건을 던져 진압을 방해하거나 음식과 음료수를 시위대에 제공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학생들의 시위를 응원했다. 처음에는 항쟁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박정희 정부도 비상 계엄령을 내려 시위를 강제로 진압했다. 독재 없는 자유민주주의를 향한 학생들의 열정이 기나긴 유신체제의 끝을 이끌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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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분류:기밀문서]][[분류:부마항쟁관련]][[분류:호빵이👻]]
 
[[분류:기밀문서]][[분류:부마항쟁관련]][[분류:호빵이👻]]

2023년 12월 11일 (월) 19:24 기준 최신판

우리는 학원 내의 일체의 외부세력을 반대한다.


비민주적 학칙의 민주적 학칙으로의 개정과 학원 언론의 자율화와 학생회의 민주화와 집회의 자유를 요구하며 어용교수 학자를 반대하며 학원당국의 민주행정 방향으로서의 성의 있는 노력을 요망한다.


우리는 언론 인권 자유의 유보나 제약에 반대한다.


자유민주제의 가장 핵심적 요소이며 공산체제에 대한 우월성인 인권과 자유가 국민총화의 시국관에 상충할 수밖에 없다는 괴상한 논리와 이론의 허위성을 단호히 고발하며 민주주의 생명이며 본질적인 요청인 언론의 자유를 국론분열, 국가이익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집권층에 대한 정당하며 필수적인 비판과 사실보도를 억압하는 것을 반대한다.


인류의 역사가 피를 흘리며 쟁취한 자유와 인권의 보장은 방종과 무질서와 혼란을 의미하지 않으며 민주회복과 조국통일의 유일한 길임을 재확인한다.


우리는 경제적 민족주의를 당위적인 목표로 한 경제개발계획의 자립경제에 대한 무방향 역방향성을 고발한다.


정치 권력과 야합한 관료독점자본의 구조적 모순과 양적확대 추구에 따른 소비재생산부문의 확대와 자율적 재생산구조의 외면과 이로 인한 대외의존 심화와 종속의 가속화뿐 아니라 부실기업, 노사문제 등이 파생됨을 명확히 인식한다.


우리는 총체적인 책임과 결과로서 현 독재집권층은 유신헌법을 철폐하고 물러날 것을 요구한다.


의회에서 야비한 수범과 민중의 참여를 배제하여 민주주의기능을 마비시키고 민주인사의 억압은 획일과 오류를 모욕적이고 추잡하게 강요하는 것일 뿐 아니라 독재적 야수성의 노정이라 단정치 않을 수 없다.


제도화된 폭력성과 조직적 악의 근원인 유신헌법과 독재집권층의 퇴진만이 오천만 겨레의 통일의 첫걸음이요, 승공의 길임을 확신한다.


학우들이여! 효원학우들이여!


민족의 앞날과 사회정의에 대한 우리들의 되풀이된 청원과 요구는 되풀이된 억압으로 답해졌다.


자! 걸어나가! 정의로운 분노로 일어서자!


얼굴을 가렸던 책을 치우고 틀어막혔던 입과 귀를 열자.


형제의 피를 요구하는 자유 민주의 깃발을 우리가 잡고


반민주의 무리, 자유의 착취 무리, 불의의 무리들을 향해 외치며 나아가자!


10시, 도서관 앞
「민주선언문」 (복사본)

해설

민주투쟁선언문

1979년 10월 15일 부산대학교 학생들은 부마항쟁 당시 대자보에 「민주선언문」[1]과 「민주투쟁선언문」[2]을 게재하였다. 선언문은 학원과 언론의 자유화를 요구하며 유신체제의 비민주성과 대외의존적 경제정책을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두 선언문이 부산대학교에 붙여진 다음날, 부마항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학생들의 시위는 결코 작은 움직임이 아니었다. 시위대는 학교 정문을 지나 시내로 나갔고, 대학생뿐만 아니라 회사원, 농동자, 상인, 고등학생 등이 시위대에 합류했다. 부산의 시위 소식은 마산으로 전해지면서 시위가 빠른 속도로 확대되었으며, 부산, 마산 지역의 시민들은 건물에서 물건을 던져 진압을 방해하거나 음식과 음료수를 시위대에 제공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학생들의 시위를 응원했다. 처음에는 항쟁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박정희 정부도 비상 계엄령을 내려 시위를 강제로 진압했다. 독재 없는 자유민주주의를 향한 학생들의 열정이 기나긴 유신체제의 끝을 이끌어낸 것이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