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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러한 그의 예술은 조희룡,허유,이하응,전기 등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추사체는 이전에 아무도 하지 않던 옹방강과 완원의 이론 각각의 장점을 살려서 하나로 통합한 글씨체를 창안했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받는다. 또한, 새로운 학문과 사상을 받아들여 조선 왕조의 구문화 체제로부터 신문화의 전개를 가능하게 한 선각자로 평가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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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 11일 (월) 16:11 기준 최신판
인적사항
이름 = 김정희(金正喜)
호 = 추사(秋史)
출생 연도 = 1786년
사망 연도 = 1856년
본관 = 경주
출생지 = 충청남도 예산
생애
유년시절
병조판서 김노경과 기계 유씨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나 큰아버지 김노영 앞으로 출계하였다. 추사 김정희는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서울 통의동에 있던 월성위궁에서 보냈다. 그곳 매죽헌에 있던 수많은 장서는 김정희의 학문세계를 넓혀주었으며 아버지를 통해 스승 박제가 밑에서 수학하게 되었다. 1800년 열다섯의 나이에 결혼을 했으나 할아버지와 양아버지의 죽음을 경험하고 1801년에는 친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났다. 1805년에는 그의 부인과 사별했다. 10대 시절은 집안 흉사로 외로운 나날들을 보내야 했다.
관직생활
사마시험(생원,진사 자격을 주는 과거시험)에 합격했던 김정희는 외교관의 자제에게 부여되는 자제군관의 자격으로 사행길에 동행하였다. 사행단으로서 연경에 가서 외국 견문을 넓혀 왔다. 부친을 따라 북경으로 출발한 그는 금석학자 옹방강과 완원을 만났고 그들과 교류하며 고증학의 진수를 공부했다. 1821년 34세의 김정희는 대과에 급제해 출셋길에 접어들었고 부친의 유배가 있었으나 1839년 병조참판에 오르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안동 김씨 세력들에 의해 유배를 가게 되었고 1849년 9년간의 유배를 끝으로 귀양에서 풀려났다.
예술활동
그는 어릴 때부터 천재적인 예술성을 인정받아 20세 전후에 이미 국내외에 이름을 떨쳤다. 옹방강과 완원으로부터 금석문의 감식법과 서도사 및 서법에 대한 전반적인 가르침을 받은 그의 서도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다. 그의 화풍은 대체로 소식으로부터 이어지는 철저한 시.서.화 일치의 문인 취미를 계승하는 것이었다.그는 문학에서도 활약을 펼쳤다. 시가 아닌 산문으로서 내면 생활을 표사하였던 편지형식을 많이 썼다. 그의 대표적 문집은 {완당선생전집}이다.
말년
1840년 그는 제주도에서 9년간의 귀양살이를 했다. 이 시기 동안 후학들에게 자신의 학문세계를 전했으며 추사체라 불리는 그의 독창적인 서체도 이때 완성하였다. 추사체는 그가 옹방강의 서체를 따라 배우면서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 조맹부,소동파 등의 여러 서체를 익혔다. 이들 모든 서체의 장점을 밑바탕으로 해서 보다 나은 독창적인 길을 창출한 것이 추사체이며 무한한 단련을 거쳐 이룩한 고도의 이념미의 표출이자 일정한 법식에 구애되지 않는 법식이 있었다. 그는 유배 기간동안 활발한 예술활동과 학문세계를 펼치며 1851년 유배를 끝내고 귀양길에 올랐다. 그러나 그는 세상에 미련 없이 경기도 과천에서 지내며 일흔한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주요 작품
세한도
모질도
부작란도
영향 및 평가
이러한 그의 예술은 조희룡,허유,이하응,전기 등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추사체는 이전에 아무도 하지 않던 옹방강과 완원의 이론 각각의 장점을 살려서 하나로 통합한 글씨체를 창안했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받는다. 또한, 새로운 학문과 사상을 받아들여 조선 왕조의 구문화 체제로부터 신문화의 전개를 가능하게 한 선각자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