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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재 서병오는 대구를 중심으로 활동한 점과 교남시서화연구회를 운영한 점, 각종 전람회와 휘호회를 개최해 여러 지역의 서화 교류 환경을 조성한 점은 그가 대구 화단에 공헌한 것으로 평가되며 대구를 근대미술 요람으로 키운 대부로 자리매김하였다. 또한 사군자를 주로 그린 그의 화풍은 후대 작품에 많은 영향을 미치며 문화계 인사들이 교류하는 장을 형성했다는 점에서 예술사적 의의를 높게 평가한다.
 
석재 서병오는 대구를 중심으로 활동한 점과 교남시서화연구회를 운영한 점, 각종 전람회와 휘호회를 개최해 여러 지역의 서화 교류 환경을 조성한 점은 그가 대구 화단에 공헌한 것으로 평가되며 대구를 근대미술 요람으로 키운 대부로 자리매김하였다. 또한 사군자를 주로 그린 그의 화풍은 후대 작품에 많은 영향을 미치며 문화계 인사들이 교류하는 장을 형성했다는 점에서 예술사적 의의를 높게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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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근대역사인물]] [[분류:최민서]]

2023년 12월 11일 (월) 16:11 기준 최신판


인적사항

서병오.jpg

이름 = 서병오
한문 = 徐丙五
호 = 석재(石齋)
출생지 = 대구
출생연도 = 1862년
사망연도 = 1935년
본관 = 달성(達城)

생애

유년시절

서병오는 3남 중 차남으로 태어나 숙부인 서상혜에게 양자로 입양되었다. 그는 어린시절 명민한 개구쟁이로 동네에 소문이 자자했으며 아버지의 엄한 훈육하에 매일 전지에 글씨 쓰는 심부름을 하며 자랐다. 동화사에 시주한 석재의 집안으로 어린 석재는 맑은 경치를 벗삼아 호연지기를 길렀다. 13세가 되던 해에 허훈, 곽종석, 서석지 등을 선생으로 모셔 그는 시작과 글씨에 상당히 능하게 되었다.

관직생활 및 활동

석재는 29세에 성균관 진사에 급제한 뒤 1896년에 서병오는 대구부 주사에 임명되어 관직 생활을 했다. 그러나 그동안의 학예에 전념하고 자유분방했던 생활을 해온 그는 적응하지 못하고 행정치적을 쌓지 못해 취임 후 얼마 뒤 공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대구를 중심으로 국내에서도 다양한 활동을 했다. 1906년 대구의 자강운동단체인 대구광문사 설립에 참여했고, 농공은행의 전무이사를 역임했다. 1907년에는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했다. 1908년에는 대한 협희의 대구지회 평의원으로 활동했다. 이후 신녕군수로 10여 일간 재직했으며 남한제정합자회사 설립 추진, 공호상회 설립, 대구은행 감사 역임 등의 활동을 했다.

작품 활동

주요 작품

주요작품 묵란도 난죽석도 노매
사진 묵란도.jpg 난죽석도2.jpg 노매2.jpg
특징 석재는 상해에 머물며 상해 화풍과 민영익의 운미란을 접하며 그 형태적 특징과 상징성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그의 묵란도는 6포기의 난이 3군으로 배치되어 있는 구도로 한두 개의 잎이 길게 나와 화면을 가르고 있다. 그리고 난 잎이 이전에 비해 직선적이고 끝이 뭉툭하다. 묵란,묵죽,괴석의 안정적인 구도에 농묵의 호방한 서예적 필치가 어우러지며 높은 화격을 보여준다. 매화의 아름다움이 잘 드러나며 격정적인 그림과 달리 서늘한 냉기가 감돌면서 응축되고 절제된 힘에서 나오는 격조와 우아한 흥취가 감탄스럽다. 꽃과 나뭇가지의 운필은 몰골법과 구륵법이 구사돼 자연스러우며 힘이 있어 단호하면서 간결함이 시흥에 도취한 듯 저절로 몰입하게 된다.
제작연도 1899년 1889년 1927년

관련 인물

석재 서병오는 흥선대원군 문하에 드나들며 서울의 문사들과 교류하기 시작했다. 1901년을 전후하여 중국 상해로 가서 그때 그곳에 망명중이던 민영익과 친밀히 교유하면서 중국인 서화가 포화, 오창석 등과 가까이 접촉하여 많은 영향을 받기도 했다. 김진만, 배효원, 서동균과 성재휴가 그의 영향을 받은 제자이다.

영향 및 평가

석재 서병오는 대구를 중심으로 활동한 점과 교남시서화연구회를 운영한 점, 각종 전람회와 휘호회를 개최해 여러 지역의 서화 교류 환경을 조성한 점은 그가 대구 화단에 공헌한 것으로 평가되며 대구를 근대미술 요람으로 키운 대부로 자리매김하였다. 또한 사군자를 주로 그린 그의 화풍은 후대 작품에 많은 영향을 미치며 문화계 인사들이 교류하는 장을 형성했다는 점에서 예술사적 의의를 높게 평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