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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 8대 중앙정보부장. 재임 중이던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대통령경호실장을 권총으로 저격해 살해한 10.26 사건을 일으킨 인물이다. 이튿날인 10월 27일 체포되어 1980년 5월 24일 내란목적살인 및 내란미수죄로 교수형이 집행되어 생을 마감했다. | 대한민국 제 8대 중앙정보부장. 재임 중이던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대통령경호실장을 권총으로 저격해 살해한 10.26 사건을 일으킨 인물이다. 이튿날인 10월 27일 체포되어 1980년 5월 24일 내란목적살인 및 내란미수죄로 교수형이 집행되어 생을 마감했다. | ||
==생애== | ==생애== | ||
− | == | + | 1924년 4월 9일 경상북도 선산군 선산면(現 구미시 선산읍) 이문리 서당마을 80-6번지<ref>이문리 80-6번지에는 김재규의 생가가 여전히 남아 있다. 김재규의 딸이 잠시 귀국해서 몇 년 전에 담을 복원하기도 했고, 2019년에는 보수공사를 진행했다.</ref>에서 3남 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재규의 아버지 김형철은 고향에서 정미소를 운영했다. 당시 정미소를 운영한다는 건 지역 사회에서 상당한 부와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고, 김재규도 꽤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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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방 후 김천중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하다가 1946년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교한다. 이때 박정희와 동기가 되며 인연이 시작된다. 고향이 같고 교사를 지낸 경력이 같아 가까이 지냈다고 한다. 이들은 1954년 9월 김재규가 5사단 36연대장으로 근무할 때 박정희가 사단장으로 부임하여 상관이 되면서 재회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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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16 군사정변 당시에는 국방부 총무과장(준장)으로 있었는데 신분 때문인지 박정희와의 인연 때문인지 혁명군사령부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다. 조사에도 불구하고 부정 사실이 발견되지 않아 석방되었고, 석방 후 현역 장군으로서 호남비료 사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6사단장과 6관구사령관을 거쳐 방첩부대장에 취임하여, 방첩부대를 보안사령부로 개편하고 초대 보안사령관이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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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4년 9월 개각 때 건설부 장관이 되었다. 건설부 장관 부임 당시 8,000만 달러 밖에 안되던 해외건설 계약고를 30억 달러까지 끌어올리는 공을 세워 근정훈장을 받았다. 1976년 12월 신직수의 뒤를 이어 중앙정보부장에 취임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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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재규는 중앙정보부를 통해 최태민의 조사를 지시했고, 10.26 사태가 발생하기 3일 전 최태민<ref>최순실의 친아버지.</ref>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보고했었다. 이 보고서엔 최태민과 박근혜<ref>둘이 함께 부정한 방법으로 여기저기서 돈을 뜯어내었다. 최순실-박근혜 게이트의 시초라고 보아도 된다.</ref> 간의 부적절한 관계와 최태민의 문란하고 부적절한 사생활이 기록되어 있었다. 김재규가 최태민이 저지른 온갖 부정의 입증을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박정희는 오히려 최태민을 신뢰하는 꼴을 보였다. 이는 김재규 입장에서 자신이 모신 박정희가 중앙정보부 부장인 자신보다 영애를 홀린 종교인을 더 신뢰하는 시츄에이션인지라, 박정희에 대한 충성심이 바닥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이 사건이 10.26사태의 원인이라고 증언하기도 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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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류:5.18민주화운동관련]] | ||
+ | [[분류:이나자키로빈]] |
2023년 12월 12일 (화) 08:58 기준 최신판
개요
대한민국 제 8대 중앙정보부장. 재임 중이던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대통령경호실장을 권총으로 저격해 살해한 10.26 사건을 일으킨 인물이다. 이튿날인 10월 27일 체포되어 1980년 5월 24일 내란목적살인 및 내란미수죄로 교수형이 집행되어 생을 마감했다.
생애
1924년 4월 9일 경상북도 선산군 선산면(現 구미시 선산읍) 이문리 서당마을 80-6번지[1]에서 3남 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재규의 아버지 김형철은 고향에서 정미소를 운영했다. 당시 정미소를 운영한다는 건 지역 사회에서 상당한 부와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고, 김재규도 꽤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해방 후 김천중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하다가 1946년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교한다. 이때 박정희와 동기가 되며 인연이 시작된다. 고향이 같고 교사를 지낸 경력이 같아 가까이 지냈다고 한다. 이들은 1954년 9월 김재규가 5사단 36연대장으로 근무할 때 박정희가 사단장으로 부임하여 상관이 되면서 재회한다.
5.16 군사정변 당시에는 국방부 총무과장(준장)으로 있었는데 신분 때문인지 박정희와의 인연 때문인지 혁명군사령부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다. 조사에도 불구하고 부정 사실이 발견되지 않아 석방되었고, 석방 후 현역 장군으로서 호남비료 사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6사단장과 6관구사령관을 거쳐 방첩부대장에 취임하여, 방첩부대를 보안사령부로 개편하고 초대 보안사령관이 되었다.
1974년 9월 개각 때 건설부 장관이 되었다. 건설부 장관 부임 당시 8,000만 달러 밖에 안되던 해외건설 계약고를 30억 달러까지 끌어올리는 공을 세워 근정훈장을 받았다. 1976년 12월 신직수의 뒤를 이어 중앙정보부장에 취임하였다.
김재규는 중앙정보부를 통해 최태민의 조사를 지시했고, 10.26 사태가 발생하기 3일 전 최태민[2]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보고했었다. 이 보고서엔 최태민과 박근혜[3] 간의 부적절한 관계와 최태민의 문란하고 부적절한 사생활이 기록되어 있었다. 김재규가 최태민이 저지른 온갖 부정의 입증을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박정희는 오히려 최태민을 신뢰하는 꼴을 보였다. 이는 김재규 입장에서 자신이 모신 박정희가 중앙정보부 부장인 자신보다 영애를 홀린 종교인을 더 신뢰하는 시츄에이션인지라, 박정희에 대한 충성심이 바닥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이 사건이 10.26사태의 원인이라고 증언하기도 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