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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의열단]] 단장 [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C%9B%90%EB%B4%89 김원봉]이 중국 장개석의 지원으로 독립운동 군사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난징에 설립한 학교로 정식명칭은 '중국국민정부 군사위원회 간부훈련반 제6대'이다.<br/>교육과목으로는 정치과목, 군사과목, 실습과목이 있었으며 3년에 걸쳐 총 125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 1932년 [[의열단]] 단장 [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C%9B%90%EB%B4%89 김원봉]이 중국 장개석의 지원으로 독립운동 군사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난징에 설립한 학교로 정식명칭은 '중국국민정부 군사위원회 간부훈련반 제6대'이다.<br/>교육과목으로는 정치과목, 군사과목, 실습과목이 있었으며 3년에 걸쳐 총 125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 ||
==설립 과정== | ==설립 과정== | ||
− | 1931년 후반기부터 본격화된 일제의 중국 침략으로 촉발된 중국인들의 반일의식을 배경으로 중국에서는 항일투쟁 노선을 재정비하게 되었는데, 그 방법은 국민정부의 재정적, 군사적 지원을 토대로 독자적인 투쟁역량을 강화해 나가자는 것이었다.<br/>이러한 기류와 더불어 [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C%9B%90%EB%B4%89 김원봉]은 국민정부를 상대로 구체적인 연합 방안을 구상하고 있었다. | + | 1931년 후반기부터 본격화된 일제의 중국 침략으로 촉발된 중국인들의 반일의식을 배경으로 중국에서는 항일투쟁 노선을 재정비하게 되었는데, 그 방법은 국민정부의 재정적, 군사적 지원을 토대로 독자적인 투쟁역량을 강화해 나가자는 것이었다.<br/>이러한 기류와 더불어 [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C%9B%90%EB%B4%89 김원봉]은 국민정부를 상대로 구체적인 연합 방안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렇게 의열단은 국민정부 교섭에 성공하게 되었고, '개인폭력 중심' 노선에서 탈피해 '전투적 협동전선'의 지향을 위해 군사간부를 양성해야 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고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설립하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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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참고문헌== | ||
「김원봉(金元鳳)의 조선혁명군사정치학교(朝鮮革命軍事政治學校) 운영과 그 입교생」(한상도, 『한국학보(韓國學報)』57, 1989) | 「김원봉(金元鳳)의 조선혁명군사정치학교(朝鮮革命軍事政治學校) 운영과 그 입교생」(한상도, 『한국학보(韓國學報)』57, 198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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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와 이육사, 그리고 <꽃>」(정우택, 『한중인문학연구』46, 2015) |
2023년 12월 8일 (금) 15:01 기준 최신판
개요
1932년 의열단 단장 김원봉이 중국 장개석의 지원으로 독립운동 군사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난징에 설립한 학교로 정식명칭은 '중국국민정부 군사위원회 간부훈련반 제6대'이다.
교육과목으로는 정치과목, 군사과목, 실습과목이 있었으며 3년에 걸쳐 총 125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설립 과정
1931년 후반기부터 본격화된 일제의 중국 침략으로 촉발된 중국인들의 반일의식을 배경으로 중국에서는 항일투쟁 노선을 재정비하게 되었는데, 그 방법은 국민정부의 재정적, 군사적 지원을 토대로 독자적인 투쟁역량을 강화해 나가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기류와 더불어 김원봉은 국민정부를 상대로 구체적인 연합 방안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렇게 의열단은 국민정부 교섭에 성공하게 되었고, '개인폭력 중심' 노선에서 탈피해 '전투적 협동전선'의 지향을 위해 군사간부를 양성해야 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고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설립하게 된다.
입교 생활
1기
1기생의 입교일은 1932년 10월 20일이었고 입학식은 실내행사로 진행되었으며 참석인원은 20명이었다. 이후에, 6명이 추가 입교하여 1기생은 총 26명이 된다. 김원봉은 이때 개교사에서 간부학교 설립은 의열단이 창립 이래 견지해 온 항일투쟁 정신을 계승함을 확실히하고 군사학과 무기사용법 등 군사지식의 학습이 교육목적임을 천명했다.
일과는 오전 6시 기상을 시작으로 오전에는 학과교육, 오후에는 야외훈련이 실시되었다. 또한 의열단 지도부는 학생들의 일과를 관찰한 뒤 선별적으로 의열단 가입을 권유했다. 6개월의 과정을 수료한 1기생들은 1933년 4월 20일 졸업하였다.
2기
2기생의 입교일은 1933년 9월 16일이었다. 2기의 총 인원은 1기보다 늘어난 45명이었다.
2기 입교생들의 일과의 시작은 30분이 빨라졌다. 학생들은 오전 5시 30분에 기상해 학과교육 및 술과교육을 받았고 1주일에 두세 차례 야외훈련을 실시했다. 졸업 전 한 달은 야외훈련과 실습교육만을 반복했다. 이 같은 2기생들의 교육 내용은 1기생들에 비해 교육과목 및 시간이 강화된 교육과정이었고, 1934년 4월 20일에 졸업하였다. 그런데, 1기생들은 선별적으로 의열단에 가입했던 것에 비해, 2기생은 의열단 가입이 입교 조건에 포함되어 있엇기 때문에 대부분 입교 전에 의열단에 가입했다.
3기
3기생의 전체인원은 44명이었다. 1935년 4월 1일 입교식을 거행한 이들의 훈련은 이전 기수들보다 더 강화되었다. 3기생들은 오전 4시 30분 기상해 오후 9시까지 학과교육 5시간을 포함한 실습 및 현장교육을 받았다. 3기생의 교육훈련은 6개월이 경과한 1935년 9월 30일에 만료되었는데, 중도 퇴교한 8명의 입교생을 제외한 36명이 10월 4일, 졸업을 맞게 되었다.
인원 정리
기수 | 최초 입교 인원 | 최종 졸업 인원 |
---|---|---|
1기 | 20명 | 26명 |
2기 | 45명 | 55명 |
3기 | 28명 | 36명 |
이육사와의 관계성
이육사는 신문조서에서 중국에 가서 윤세주의 권유를 받고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입교했다고 서술했다. 그러나, 이육사가 조선에서 중국행을 도모할 때부터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의 입교를 염두에 두고 있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참고문헌
「김원봉(金元鳳)의 조선혁명군사정치학교(朝鮮革命軍事政治學校) 운영과 그 입교생」(한상도, 『한국학보(韓國學報)』57, 1989)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와 이육사, 그리고 <꽃>」(정우택, 『한중인문학연구』46,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