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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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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18304d">베델</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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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n401400&code=kc_age_40 베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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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생애===
1872년 11월 3일에 태어나서 1909년 5월 1일에 사망한 베델은 1904년에서부터 1909년까지 대한제국에서 활동한 영국 출신의 언론인이자 신문기자이다. 베델은 특별한 이력의 소유자라고 할 수 있다. 영국에서 태어난 그는 사업으로 일본에 오게 된 아버지 토마스 베델을 따라 17세에 일본에 왔다. 그 이후 15년 동안 일본 고베에서 형제들과 무역업에 종사했다. 그러나 사업가로서의 자질은 부족하였고 오히려 언론인에 더 부합하는 인물이었다. 제물포에서 발발한 러일전쟁은 서방 세계의 큰 관심사였기에 많은 기자들이 파견돼 취재 경쟁을 벌였고, 베델도 그 중 한 명이었다. 그는 한국에 온 직후에 있었던 ‘경운궁의 화재’를 다룬 기사로 첫 특종 기사를 냈다. 베델은 '''데일리 크로니클''' 특파원 생활을 짧게 마감했는데, 친일 성향의 기사를 싣는 신문사의 방침을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해임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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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2년 11월 3일에 태어나서 1909년 5월 1일에 사망한 베델은 1904년에서부터 1909년까지 대한제국에서 활동한 영국 출신의 언론인이자 신문기자이다. 베델은 특별한 이력의 소유자라고 할 수 있다. 영국에서 태어난 그는 사업으로 일본에 오게 된 아버지 토마스 베델을 따라 17세에 일본에 왔다. 그 이후 15년 동안 일본 고베에서 형제들과 무역업에 종사했다. <ref>그러나 사업가로서의 자질은 부족하였고 오히려 언론인에 더 부합하는 인물이었다.</ref></br> 제물포에서 발발한 러일전쟁은 서방 세계의 큰 관심사였기에 많은 기자들이 파견돼 취재 경쟁을 벌였고, 베델도 그 중 한 명이었다.</br> 그는 한국에 온 직후에 있었던 ‘경운궁의 화재’를 다룬 기사로 첫 특종 기사를 냈다. 베델은 '''데일리 크로니클''' 특파원 생활을 짧게 마감했는데, 친일 성향의 기사를 싣는 신문사의 방침을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해임되었기 때문이다.</br>
  
이후에 베델은 1909년 5월 1일 심장비대증으로 인해 사망하였다. 그는 죽으면서 양기탁의 손을 잡고서 "나는 죽을지라도 신보는 영생케 하여 한국 동포를 구하라"고 유언하였다. 서거 후, 양화진 외인 묘지에 안장되었으며 해외 독립유공자로는 처음으로 국가유공자 명패를 손녀인 수잔 선생의 자택에 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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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에 베델은 1909년 5월 1일 심장비대증으로 인해 사망하였다. 그는 죽으면서 양기탁의 손을 잡고서 "나는 죽을지라도 신보는 영생케 하여 한국 동포를 구하라"고 유언하였다. 서거 후, 양화진 외인 묘지에 안장되었으며 해외 독립유공자로는 처음으로 국가유공자 명패를 손녀인 수잔 선생의 자택에 달게 되었다.</br>
  
===이름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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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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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ml><p align="middle"><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RY4zVOdCANU?si=Wde-fpvfl9G488L9" title="YouTube video player"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 allowfullscreen></iframe></html><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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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델은 1904년 발발한 ‘러일전쟁’ 취재를 위해 영국 ‘데일리 크로니클(Daily Chronicle)’ 특파원으로 한국에 첫 발을 디뎠다. 일본의 한국 침략에 대한 야욕이 본격화 되는 것을 지켜보던 베델은 특파원을 그만두고 1904년 7월 18일 서울 전동(지금의 종로구 수송동)에서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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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이었던 양기탁 선생이 대한매일신보 총무를 맡았고 애국지사들은 적극적인 지원을 했다. 한국어와 영어로 발행된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는 황성신문의 주필이자 훗날 제2대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통령을 역임한 박은식(1859~1925) 선생이 이름을 올렸고 독립운동가이자 사학자인 신채호(1880~1936) 선생, 1909년 구국의 명문으로 꼽히는 논설 ‘한국동포에게 고함’이란 논설을 남긴 최익 등이 필진으로 활약했다.</br>
  
 
===대한매일신보와의 연관성===
 
===대한매일신보와의 연관성===
이 신문은 위기일로의 국난을 타개하고 배일사상을 고취시켜 '''국가보존의 대명제'''를 실현하고자 창간된 것으로 고종의 은밀한 보조를 비롯, 민족진영 애국지사들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출발하였다. 그 체재는 종전의 것보다 큰 세로 40㎝, 가로 27㎝로서 창간 당시에는 타블로이드판 6면으로 국문 2면, 영문 4면이었다.
 
이러한 편집형태를 취한 것은 긴급한 사실을 보도할 수 있는 일간신문이 필요하였고, '''영국인과 합작한 한영합판(韓英合辦)'''의 조직체라는 것을 내세우기 위한 것이었다.
 
  
영국인을 내세운 이유는 1904년 2월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본군이 우리나라에 불법주둔하면서 전쟁을 이유로 대한제국의 민간신문에 대한 사전검열을 강행하였는데, 이러한 일본의 검열망을 뚫을 수 있는 길은 당시 일본과 군사동맹을 맺고 있던 영국인 명의로 신문을 발행하는 길뿐이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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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매일신보는 위기의 국난을 타개하고 배일사상을 고취시켜 '''국가보존의 대명제'''를 실현하고자 창간된 것으로 고종의 은밀한 보조를 비롯, 민족진영 애국지사들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출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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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체재는 종전의 것보다 큰 세로 40㎝, 가로 27㎝로서 창간 당시에는 타블로이드판 6면으로 국문 2면, 영문 4면이었다. 이러한 편집형태를 취한 것은 긴급한 사실을 보도할 수 있는 일간신문이 필요하였고, '''영국인과 합작한 한영합판(韓英合辦)'''의 조직체라는 것을 내세우기 위한 것이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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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인을 내세운 이유는 1904년 2월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본군이 우리나라에 불법주둔하면서 전쟁을 이유로 대한제국의 민간신문에 대한 사전검열을 강행하였는데, 이러한 일본의 검열망을 뚫을 수 있는 길은 당시 일본과 군사동맹을 맺고 있던 영국인 명의로 신문을 발행하는 길뿐이었기 때문이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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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 펜으로맞선베델.jpg|400px|center|펜으로 일제에 맞선 베델의 사진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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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이듬해인 1905년 8월 11일부터는 다시 국문판과 영문판을 분리시켜 따로 발행하였다. 창간 당시 순한글로 만들었던 국문판은 국한문을 혼용하여 만들었고, 영문판은 『코리아 데일리 뉴스(The Korea Daily News)』라 하였는데 대내외에 많은 구독자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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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국한문판을 이해하지 못하는 독자들을 의식하여 1907년 5월 23일 순한글판 대한매일신문을 새로 창간하여 결국 국한문판, 영문판, 순한글판 등 세 신문을 발행하게 되었고 발행부수도 1만 부를 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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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이 신문이 발전된 것은 일본군의 사전검열을 받지 않는 유일한 신문이라는 것과 그 보도와 논평이 사실에 근거한 정확한 것이라는 데 연유하였다. 당시 일본군과 싸우는 우리의 의병에 대하여 사전검열에서는 이를 비도(匪徒) 혹은 폭도(暴徒)로 표현하도록 강요하였으나, 대한매일신보계의 세 신문은 한결같이 사실 그대로 의병운동을 보도하였다. 이와 같은 보도는 당시 우리 국민에게 커다란 용기와 위안을 주었다. <ref>이와는 반대로 통감부 초대 통감 이토[伊藤博文]는 한 연설장에서 “……한국 내 신문이 가진 권력이란 비상한 것이다. 이토의 백 마디 말보다 신문의 일필(一筆)이 한인(韓人)을 감동하게 하는 힘이 매우 크다. 그 중에도 지금 한국에서 발간하는 외국인의 대한매일신보는 확증이 있는 일본의 제반 악정을 반대하여 한인을 선동함이 연속부절하니 이에 관하여는 통감이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을 정도였다.</ref></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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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죄판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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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늑약이 체결에 대항해 황성신문의 장자연이 한국 언론사에서 최고의 논설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이 날에 목 놓아 통곡하노라)’을 20일자에 실었다. 그리고 일제는 황성신문을 정간시켰다. 이를 지켜본 베델은 장자연의 용기를 극찬하는 것과 동시에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폭로하는 기사를 연이어 게재했다. 또한 장자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을 영문으로 번역해 ‘코리아 데일리 뉴스’에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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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영국인이 발행했던 ‘재팬 크로니클(Japan Chronicle)’은 ‘코리아 데일리 뉴스’에 개재된 영문 ‘시일야방성대곡’ 전문을 게재했고 일본의 한국 침략 사실은 일본에 거주하는 서양 사람들과 서방 나라에 전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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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델의 ‘대한매일신보’에 대한 한국민들의 신뢰는 절대적이었다. 항일에 막대한 영향력을 가지게 된 ‘대한매일신보’는 일제에게 있어 눈엣가시였다. 일본은 갖은 이유를 내세워 영국정부에 베델을 한국에서 추방할 것을 요구했고 베델은 1907년 주한 영국 총영사관에서 재판을 받았다. 기소 이유는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 데일리 뉴스’가 보도한 10건의 기사가 ‘소요를 일으키거나 조장시켜 공안을 해친다’는 것이었다. <ref>베델은 6개월 근신이라는 유죄판결을 받았다.</ref></br> 일제는 베델을 추방하라는 요구를 멈추지 않았고 1908년 두 번째 재판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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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베델판결.jpg|height:"100"|center|유죄판결의 베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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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일본, 영국이 관여된 두 번째 재판은 3일간 열렸고 베델은 3주일 간의 금고형과 함께 6개월 간 근신, 350파운드의 보증금을 납부하라는 판결을 받았다.중국 상하이에서 3주간의 복역을 마치고 7월 11일 출옥한 베델은 이어진 일본의 탄압과 매도를 당했다. 일본 언론은 베델이 국책보상금을 횡령했다는 사실 무근 보도를 냈다.<ref>베델은 신문을 통해 공개적으로 명예회복에 나선 것과 동시에 법적인 절차를 진행했다.</ref></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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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델은 1908년 12월 9일과 10일, 이틀 동안 상하이에서 열린 영국고등법원의 재판에서 승소하고 보상금을 받았다.그러나 그는 1909년 5월 1일 갑자기 사망했다. 의학적 사인은 심장확장이었지만 지속적인 일제의 탄압으로 초래된 옥살이와 누명에 대한 스트레스가 건강을 해친 것으로 추정됐고 많은 한국인들은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고종도 “하늘이 무심하게도 왜 그를 이다지도 급히 데려갔단 말인가”라는 조문을 보냈다고 알려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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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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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델은 한국에 도착해 6년 만에 유명을 달리했지만 사망 110년이 지난 2019년에도 그는 한국인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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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 베델묘비.jpg|400px|center|베델의 묘비 사진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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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1일 베델이 영면해 있는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서 열린 경모식에 참석한 주한 영국대사관 닉 메타(Nik Metha) 부대사는 “언론 매체를 통해 베델 선생은 한반도에서 한국의 이익을 방어하고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신했다”며 “대한민국의 광복을 보지 못했지만 그가 남겨둔 유산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경모했다. 이어 “베델은 한국의 역사에 잊혀지지 않을 발자국을 남겼다”며 “그의 업적은 현재의 견고한 한-영 관계에 크게 기여했다”고 덧붙였다.
  
창간 이듬해인 1905년 8월 11일부터는 다시 국문판과 영문판을 분리시켜 따로 발행하였다. 창간 당시 순한글로 만들었던 국문판은 국한문을 혼용하여 만들었고, 영문판은 『코리아 데일리 뉴스(The Korea Daily News)』라 하였는데 대내외에 많은 구독자를 얻었다. 그러나 국한문판을 이해하지 못하는 독자들을 의식하여 1907년 5월 23일 순한글판 『대한매일신문』을 새로 창간하여 결국 국한문판, 영문판, 순한글판 등 세 신문을 발행하게 되었고 발행부수도 1만 부를 넘었다.
 
  
이처럼 이 신문이 발전된 것은 일본군의 사전검열을 받지 않는 유일한 신문이라는 것과 그 보도와 논평이 사실에 근거한 정확한 것이라는 데 연유하였다. 당시 일본군과 싸우는 우리의 의병에 대하여 사전검열에서는 이를 비도(匪徒) 혹은 폭도(暴徒)로 표현하도록 강요하였으나, 『대한매일신보』계의 세 신문은 한결같이 사실 그대로 의병운동을 보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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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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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
  
이와 같은 보도는 당시 우리 국민에게 커다란 용기와 위안을 주었다. 이와는 반대로 통감부 초대 통감 이토[伊藤博文]는 한 연설장에서 “……한국 내 신문이 가진 권력이란 비상한 것이다. 이토의 백 마디 말보다 신문의 일필(一筆)이 한인(韓人)을 감동하게 하는 힘이 매우 크다. 그 중에도 지금 한국에서 발간하는 외국인의 대한매일신보는 확증이 있는 일본의 제반 악정을 반대하여 한인을 선동함이 연속부절하니 이에 관하여는 통감이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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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애국계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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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김효원]]

2023년 12월 9일 (토) 13:59 기준 최신판

베델

베델

영국인 어니스트 베델

생애

1872년 11월 3일에 태어나서 1909년 5월 1일에 사망한 베델은 1904년에서부터 1909년까지 대한제국에서 활동한 영국 출신의 언론인이자 신문기자이다. 베델은 특별한 이력의 소유자라고 할 수 있다. 영국에서 태어난 그는 사업으로 일본에 오게 된 아버지 토마스 베델을 따라 17세에 일본에 왔다. 그 이후 15년 동안 일본 고베에서 형제들과 무역업에 종사했다. [1]
제물포에서 발발한 러일전쟁은 서방 세계의 큰 관심사였기에 많은 기자들이 파견돼 취재 경쟁을 벌였고, 베델도 그 중 한 명이었다.
그는 한국에 온 직후에 있었던 ‘경운궁의 화재’를 다룬 기사로 첫 특종 기사를 냈다. 베델은 데일리 크로니클 특파원 생활을 짧게 마감했는데, 친일 성향의 기사를 싣는 신문사의 방침을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해임되었기 때문이다.

이후에 베델은 1909년 5월 1일 심장비대증으로 인해 사망하였다. 그는 죽으면서 양기탁의 손을 잡고서 "나는 죽을지라도 신보는 영생케 하여 한국 동포를 구하라"고 유언하였다. 서거 후, 양화진 외인 묘지에 안장되었으며 해외 독립유공자로는 처음으로 국가유공자 명패를 손녀인 수잔 선생의 자택에 달게 되었다.

관련 영상



베델은 1904년 발발한 ‘러일전쟁’ 취재를 위해 영국 ‘데일리 크로니클(Daily Chronicle)’ 특파원으로 한국에 첫 발을 디뎠다. 일본의 한국 침략에 대한 야욕이 본격화 되는 것을 지켜보던 베델은 특파원을 그만두고 1904년 7월 18일 서울 전동(지금의 종로구 수송동)에서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했다.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이었던 양기탁 선생이 대한매일신보 총무를 맡았고 애국지사들은 적극적인 지원을 했다. 한국어와 영어로 발행된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는 황성신문의 주필이자 훗날 제2대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통령을 역임한 박은식(1859~1925) 선생이 이름을 올렸고 독립운동가이자 사학자인 신채호(1880~1936) 선생, 1909년 구국의 명문으로 꼽히는 논설 ‘한국동포에게 고함’이란 논설을 남긴 최익 등이 필진으로 활약했다.

대한매일신보와의 연관성

대한매일신보는 위기의 국난을 타개하고 배일사상을 고취시켜 국가보존의 대명제를 실현하고자 창간된 것으로 고종의 은밀한 보조를 비롯, 민족진영 애국지사들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출발하였다. 그 체재는 종전의 것보다 큰 세로 40㎝, 가로 27㎝로서 창간 당시에는 타블로이드판 6면으로 국문 2면, 영문 4면이었다. 이러한 편집형태를 취한 것은 긴급한 사실을 보도할 수 있는 일간신문이 필요하였고, 영국인과 합작한 한영합판(韓英合辦)의 조직체라는 것을 내세우기 위한 것이었다.

영국인을 내세운 이유는 1904년 2월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본군이 우리나라에 불법주둔하면서 전쟁을 이유로 대한제국의 민간신문에 대한 사전검열을 강행하였는데, 이러한 일본의 검열망을 뚫을 수 있는 길은 당시 일본과 군사동맹을 맺고 있던 영국인 명의로 신문을 발행하는 길뿐이었기 때문이었다.


펜으로 일제에 맞선 베델의 사진이다.



창간 이듬해인 1905년 8월 11일부터는 다시 국문판과 영문판을 분리시켜 따로 발행하였다. 창간 당시 순한글로 만들었던 국문판은 국한문을 혼용하여 만들었고, 영문판은 『코리아 데일리 뉴스(The Korea Daily News)』라 하였는데 대내외에 많은 구독자를 얻었다. 그러나 국한문판을 이해하지 못하는 독자들을 의식하여 1907년 5월 23일 순한글판 대한매일신문을 새로 창간하여 결국 국한문판, 영문판, 순한글판 등 세 신문을 발행하게 되었고 발행부수도 1만 부를 넘었다.


이처럼 이 신문이 발전된 것은 일본군의 사전검열을 받지 않는 유일한 신문이라는 것과 그 보도와 논평이 사실에 근거한 정확한 것이라는 데 연유하였다. 당시 일본군과 싸우는 우리의 의병에 대하여 사전검열에서는 이를 비도(匪徒) 혹은 폭도(暴徒)로 표현하도록 강요하였으나, 대한매일신보계의 세 신문은 한결같이 사실 그대로 의병운동을 보도하였다. 이와 같은 보도는 당시 우리 국민에게 커다란 용기와 위안을 주었다. [2]

유죄판결

을사늑약이 체결에 대항해 황성신문의 장자연이 한국 언론사에서 최고의 논설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이 날에 목 놓아 통곡하노라)’을 20일자에 실었다. 그리고 일제는 황성신문을 정간시켰다. 이를 지켜본 베델은 장자연의 용기를 극찬하는 것과 동시에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폭로하는 기사를 연이어 게재했다. 또한 장자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을 영문으로 번역해 ‘코리아 데일리 뉴스’에 실었다.

일본에서 영국인이 발행했던 ‘재팬 크로니클(Japan Chronicle)’은 ‘코리아 데일리 뉴스’에 개재된 영문 ‘시일야방성대곡’ 전문을 게재했고 일본의 한국 침략 사실은 일본에 거주하는 서양 사람들과 서방 나라에 전파됐다.

베델의 ‘대한매일신보’에 대한 한국민들의 신뢰는 절대적이었다. 항일에 막대한 영향력을 가지게 된 ‘대한매일신보’는 일제에게 있어 눈엣가시였다. 일본은 갖은 이유를 내세워 영국정부에 베델을 한국에서 추방할 것을 요구했고 베델은 1907년 주한 영국 총영사관에서 재판을 받았다. 기소 이유는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 데일리 뉴스’가 보도한 10건의 기사가 ‘소요를 일으키거나 조장시켜 공안을 해친다’는 것이었다. [3]
일제는 베델을 추방하라는 요구를 멈추지 않았고 1908년 두 번째 재판이 열렸다.


유죄판결의 베델


한국, 일본, 영국이 관여된 두 번째 재판은 3일간 열렸고 베델은 3주일 간의 금고형과 함께 6개월 간 근신, 350파운드의 보증금을 납부하라는 판결을 받았다.중국 상하이에서 3주간의 복역을 마치고 7월 11일 출옥한 베델은 이어진 일본의 탄압과 매도를 당했다. 일본 언론은 베델이 국책보상금을 횡령했다는 사실 무근 보도를 냈다.[4]

베델은 1908년 12월 9일과 10일, 이틀 동안 상하이에서 열린 영국고등법원의 재판에서 승소하고 보상금을 받았다.그러나 그는 1909년 5월 1일 갑자기 사망했다. 의학적 사인은 심장확장이었지만 지속적인 일제의 탄압으로 초래된 옥살이와 누명에 대한 스트레스가 건강을 해친 것으로 추정됐고 많은 한국인들은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고종도 “하늘이 무심하게도 왜 그를 이다지도 급히 데려갔단 말인가”라는 조문을 보냈다고 알려져있다.

업적

베델은 한국에 도착해 6년 만에 유명을 달리했지만 사망 110년이 지난 2019년에도 그는 한국인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베델의 묘비 사진이다.


지난 5월 1일 베델이 영면해 있는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서 열린 경모식에 참석한 주한 영국대사관 닉 메타(Nik Metha) 부대사는 “언론 매체를 통해 베델 선생은 한반도에서 한국의 이익을 방어하고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신했다”며 “대한민국의 광복을 보지 못했지만 그가 남겨둔 유산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경모했다. 이어 “베델은 한국의 역사에 잊혀지지 않을 발자국을 남겼다”며 “그의 업적은 현재의 견고한 한-영 관계에 크게 기여했다”고 덧붙였다.


각주

  1. 그러나 사업가로서의 자질은 부족하였고 오히려 언론인에 더 부합하는 인물이었다.
  2. 이와는 반대로 통감부 초대 통감 이토[伊藤博文]는 한 연설장에서 “……한국 내 신문이 가진 권력이란 비상한 것이다. 이토의 백 마디 말보다 신문의 일필(一筆)이 한인(韓人)을 감동하게 하는 힘이 매우 크다. 그 중에도 지금 한국에서 발간하는 외국인의 대한매일신보는 확증이 있는 일본의 제반 악정을 반대하여 한인을 선동함이 연속부절하니 이에 관하여는 통감이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3. 베델은 6개월 근신이라는 유죄판결을 받았다.
  4. 베델은 신문을 통해 공개적으로 명예회복에 나선 것과 동시에 법적인 절차를 진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