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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매일신보 (大韓每日申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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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18304d">대한매일신보 (大韓每日申報)</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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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매일신보 (大韓每日申報)==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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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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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7월에 창간한 '''대한제국 시기의 신문'''으로 영국인 베델과 양기탁이 힘을 합쳐 창간하였다.</br> 신문 창간 당시에는 타블로이드판 6면으로 발행되었고, 한글본과 영문본을 함께 발행하였다.[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4992 대한매일신보] <ref> 이후 대한매일신보는 한글본, 국한문본, 영문본을 함께 발행하였다. 대한매일신보의 슬로건을 단순하게 말하자면, '전투적 민족주의'였다.</ref></br>
  
  
1904년 7월에 창간한 '''대한제국 시기의 신문'''으로 영국인 베델과 양기탁이 힘을 합쳐 창간하였다.</br> 신문 창간 당시에는 타블로이드판 6면으로 발행되었고, 한글본과 영문본을 함께 발행하였다. <ref> 이후 대한매일신보는 한글본, 국한문본, 영문본을 함께 발행하였다. 대한매일신보의 슬로건을 단순하게 말하자면, '전투적 민족주의'였다.</ref></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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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 대한매일신보.jpg|400px|center|대한매일신보의 대표적인 사진이다.]]</br>
  
  
===설립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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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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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2월에 일어난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대한제국에 특파원으로 머무르던 어니스트 베델이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440 양기탁]을 비롯하여 민족 진영 인사들에게 도움을 받아 1904년 7월 18일에 창간하였다. 이후 일제강점기시대에 대한매일신보는 '''매일신보'''로 이름이 바뀌었다.  
<html><iframe width="696" height="392" src="https://www.youtube.com/embed/PND4yswjA7U" title="영상한국사 I 098 러일전쟁 발발과 한일의정서 체결"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 allowfullscreen></iframe></html></br>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일어난 뒤 전세가 일본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자 일본은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 체결을 강요하고, 이어서 각종 이권을 탈취하는 등 경제적 침탈을 강화하였다.
 
 
 
6월에 나가모리(長森藤吉郎)가 어공원(御供院) 소관의 산림, 천택(川澤)과 황무지 개간권을 이양 받고자 일본공사를 통해 대한제국 정부에 압력을 가해왔다. 이에 유학(幼學)과 품관(品官)들은 반대 상소운동을 벌였고, 각 언론기관도 반대 사설을 실어 여론 형성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일제가 이 계획을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보다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반대운동을 벌여야 할 필요성을 느낀 [[송수만]](宋秀萬),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3815 심상진(沈相震)]등이 1904년 7월 13일서울 종로 백목전(白木廛)에서 중민회의(衆民會議)를 열어 보안회를 발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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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당시에는 화합을 추구한 대한제국, 일본, 러시아의 각 정부에서 재정을 지원했지만, 이후 일본의 국권 침탈에 반일 신문으로 전향하였다. 그 당시 일본이 사실상 언론의 검열을 맡았던 시기임에도 반발이 가능했던 것은 발행인 [[베델]]이 일본과 동맹국인 영국 국민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일본의 경제적 침략을 극복하기 위해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고, 대한매일신보 등 각종 신문이 적극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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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통감부의 압박에 쇠퇴기를 겪는다. 민족 신문들의 저항을 탄압하기 위한 목적으로 통감부가 신문지법을 제정하고 이를 빌미로 베델을 1907년과 1908년 2번에 걸쳐 재판에 회부하였다. 또한 실질적인 경영주인 양기탁도 국채 보상 성금의 횡령 혐의로 재판에 넘겼다.<ref> 결국 증거 불충분으로 양기탁은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대한매일신보는 이후에 난항을 겪게 된다.</ref></br>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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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료===
  
* 1904.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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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은 정보 전달 매체로서의 공공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기업(私企業)처럼 이윤추구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신문사가 적자 운영을 면하지 못한다면 이 또한 적지 않은 사회적 문제가 된다. 신문사는 기본적으로 구독 수입으로 경영을 해야 하지만 이는 많은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이에 신문사는 구독 수입 외에 광고 수입을 통해 '''경영의 합리화'''를 추구한다.
1. 종로 백목전에 모인 100여 명의 시민들 앞에서 송수만은 황무지를 일본에게 차여(借與)함은 불가하며 황무지 차여에 중개 역할을 한 국내 인사들을 성토하자는 요지의 연설을 했다.</br>
 
2. 대한 제국 경위원(警衛院)과 경무청에서 '''경찰관을 파견'''하고, 일본 헌병사령부에서는 '''헌병을 파견'''하여 '''집회를 감시하고 참석자들을 해산시켰다'''.</br>
 
  
* 1904.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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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신문사의 광고료 계산 단위는 ‘1단 1행’ 을 기준으로 하고 있는데 '''대한매일신보의 광고료'''는 어느 정도였을까? 베델이 창간한 대한매일신보는 영국식인 인치(inch)를 사용하였다. 1904년 7월 창간 당시 광고료에 대해서는 영문판에“1일 1인치 또는 1인치 이하 50전(錢), 1개월간 매일 1인치 5원(圓), 1년간 매일 1인치 50원”으로 밝히고 있다. 그리고 복간한 1905년 8월에는“1일 1인치 25전(錢, 新貨), 2주일 2원() 50전, 1개월 5원”으로 조정하였다.
- 100여 명이 백목전에 모여, 일본의 요구를 철폐시킬 때까지 매일 집회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송수만, 심상진 등은 전국에 '''통문을 발하고''' 정부의 각 부서와 대관들의 집에 '''공함(公函)을 보내어''', 보안회 임시회의소에서 회동할 것을 요구했다.</br>
 
  
* 1904.07.16
 
- 집회에서는 회장에 신기선(申箕善), 부회장에 송인섭(宋寅燮)을 천거하고, 회의를 주재하는 대변회장(代辯會長)에 송수만을 선출했다. 이날 회의가 진행되고 있을 때, 일본 경찰이 시민들의 격렬한 저항을 무릅쓰고 '''송수만과 송인섭을 붙잡아 갔다'''. 대한 제국 외부에서는 일본공사에게 송수만과 송인섭을 붙잡아 간 것에 대해 항의하고, 두 사람의 신병을 '''한국 관아로 인도할 것을 요청'''했다.</br>
 
  
* 1904.07.17
 
- 고종은 경무청에 칙령을 내려 '''보안회의 집회를 금지&해산하게 했다'''. 이에 보안회는 7월 17일부터 전동(典洞)의 한어학교(漢語學校)로 '''회의 개최 장소를 이전'''하고 일본공사관에 구속된 송수만 대신 원세성을 대변회장으로 선출했다. 그리고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와 송수만·송인섭 등의 '''체포에 대해 격렬히 성토하는 운동을 계속'''해 나갔다.</br>
 
  
* 1904.0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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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 대한매일신보광고료.jpg|400px|center|대한매일신보광고료를 나타내는 사진이다.]]</br>
- 한어학교에서 또다시 대규모 [[시민 대회]]를 개최했다. 이 대회에는 회원뿐만 아니라 수천 명의 서울 시민들이 모여들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시민 대회]]의 연단에 오른 연사들은 일본의 '''대한 제국 산림·천택·원야·진황지 개간 이권 요구를 격렬하게 성토'''하고, '''송수만과 송인섭을 일본 측에서 부당하게 체포 구금하고 있는 것을 강력하게 규탄'''했다.</br>
 
  
* 1904.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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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시기===
- 한어학교의 [[시민 대회]] 도중 일본 경찰이 들어와 보안회원들을 총으로 위협하며 원세성, 심상진 등 회원들을 체포했다. '''일본군이 무력을 이용하여 한어학교를 완전히 폐쇄'''하였으나, 보안회원들은 이에 굴복하지 않고 종로로 나와 '''시민들과 함께 가두 투쟁을 시작'''했다. 일본 기마헌병대들이 권총과 일본도를 휘두르며 위협하였으나 보안회 회원들과 시위 군중들은 전혀 해산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더욱 분노하여 격렬한 가두 투쟁을 계속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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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ss="wikitable" style="text-align:center;background:white;"
- 결국 이날 밤 11시가 되자 일본 헌병대는 수백 명의 무장한 헌병들을 추가로 출동시켰고, 보안회는 어둠 속에서 무장한 일본 헌병대와 충돌하면 '''살상자가 발생할 것을 염려하여 일단 해산을 결정'''했다. 7월 22일 오전 9시부터 밤 11시까지 이어진 집회와 시위, 가두 투쟁은 '''보안회의 민족 운동이 절정을 이룬 것'''이었으며, 또 일본군 정면으로 가장 격렬하게 대치한 운동이었다.
 
  
===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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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caption-side:bottom; text-align:left;"|출처 : 우리역사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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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도 || 활동 ||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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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4.07.18 || '''대한매일신보'''가 창간된 날 || 1904년에 발발한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영국인 어니스트 베델과 양기탁이 민족 진영 인사들에게 도움을 받아서 만든 민족적인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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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6.02 || '''통감부''' 설립된 연도 || 일본 제국주의가 대한제국 황실의 안녕과 평화를 유지한다는 명분으로 서울에 설치한 통치기구로, 약 4년 6개월 동안 한국의 국정 전반을 장악했던 식민 통치 준비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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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7.02 ||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된 날 || 일본 제국이 대한제국을 경제적으로 예속시키고자 제공한 차관 1300만원을 국민들이 갚고자 한 것으로, 이와 관련된 기사를 대한매일신보에서 다루었으며  항일운동을 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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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황무지 점탈 계획이 저지당한 뒤, 일본군은 '''회장 원세성과 회원 신형균·이범석 등을 다시 체포'''하는 등 보안회에 대한 보복을 자행했다. 또한 한국 국민들을 위협할 목적으로 8월 1일 저녁 서울 시내 중요한 거리에 '''일본군 병참사령부 표목을 박았다'''. 이는 서울이 일본군 지배하에 있음을 한국 국민들에게 상기시키고, 한일의정서에 따라 일본군이 군사상 필요한 토지를 수용할 수 있다고 위협하기 위한 행위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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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퇴와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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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활발한 활동을 보였던 대한매일신보였지만 통감부의 압박에 쇠퇴기를 겪게 된다. 민족 신문들의 저항을 탄압하기 위한 목적으로 통감부가 신문지법을 제정하고 이를 빌미로 사주인 베델을 1907년과 1908년 2번에 걸쳐 재판에 회부하였다. 또한 실질적인 경영주인 양기탁도 국채 보상 성금의 횡령 혐의로 재판에 넘겼다. 결국 핵심 인사 두 명의 이탈로 대한매일신보는 큰 타격을 받았다.
  
보안회 회원들은 일제의 황무지 침탈을 저지하는 목적을 달성했으므로 창립 당시 강령에 따라 보안회를 사실상 해체하여 종결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이 원세성 등을 체포하고 석방하지 않는 것을 보고, 보안회의 속개를 준비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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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에서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한 일제는 영국 정부를 직접 압박해 베델을 상하이로 강제 소환시켜 6개월형을 받게 만들었고, 1909년 5월 베델은 그곳에서 사망했다. 1908년 5월 발행인이 영국인 만함(Alfred W. Marnham)으로 교체되었고 1910년 6월에는 이장훈으로 다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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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 이후 조선총독부의 일본어판 기관지 《경성일보》에 인수되었고, 제호에서 '대한'이 떨어진 채 1910년 8월 30일자 신문부터 총독부의 조선어판 기관지로 전락했다. 광복 후인 1945년 11월 22일 매일신보는 서울신문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8월 29일 전동의 입전 도가(立廛 都家)에서 약 70여 명의 속개 준비 회원들이 모여 이건석(李建奭)을 회장을 선출하며 '''보안회를 다시 열었다'''. 그러자 곧바로 일본 헌병대와 경관들이 와서 '''회장 이건석을 체포'''하였다. 일본군 헌병사령관은 새로운 회명을 짓고 사전허락을 받을 것을 요구했고, 회원들은 새로운 출발의 의미로 9윌 11일에 회의 명칭을 ‘협동회(協同會)’로 개칭하여 운동을 계속하기로 결의했다. 협동회의 활동은 '''일제의 견제를 받아 점차 위축'''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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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의===
  
===역사적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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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안회에서 벌인 '''황무지개척 반대운동'''은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를 방불하게 하는 민중 구국운동이었다. 이로 인해 일제는 1908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6671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설치될 때까지 황무지개척권에 관한 거론을 유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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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ml><p align="middle"><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EA0aQXc3om8?si=M60x6J-T0HAMo6XC" title="YouTube video player"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 allowfullscreen></iframe></html><br/>
 
 
 
 
[[파일: 황무지개간반대운동.png|400px|center|황무지 개간 반대 운동 사진이다.]]
 
[[파일: 보안회 기사.png|400px|center|황무지 개간 반대 운동을 주도한 보안회의 신문 기사 사진이다.]]</br>
 
  
  
*창립 이후 단 1개월 정도의 짧은 기간 동안 활동했음에도 민중의 폭넓은 지지를 얻으며 일제의 무력 위협에 대항했다.</br>보안회의 민족 운동은 대한 제국 정부를 움직여 결국 '''일제의 황무지 침탈을 저지하는데 성공'''했다.</br>
+
대한매일신보는 일제의 손으로 넘어가기 전까지 당시 일본의 언론탄압 속에서 외국인의 치외법권을 이용, 신속한 보도와 준열한 논설로써 대중을 계몽하고 항일사상을 고취시키는 등 '''한말의 대표적인 민족지'''로서 의의가 매우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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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안회가 대한 제국 정부의 금령과 일제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성공함으로써, 뒤를 이어 애국계몽운동 단체들이 연달아 창립되고 '''구국 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br>
 
  
 
===각주===
 
===각주===
 
<references/>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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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류:애국계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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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김효원]]

2023년 12월 9일 (토) 13:58 기준 최신판

대한매일신보 (大韓每日申報)

개요

1904년 7월에 창간한 대한제국 시기의 신문으로 영국인 베델과 양기탁이 힘을 합쳐 창간하였다.
신문 창간 당시에는 타블로이드판 6면으로 발행되었고, 한글본과 영문본을 함께 발행하였다.대한매일신보 [1]


대한매일신보의 대표적인 사진이다.



활동

  • 1904년 2월에 일어난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대한제국에 특파원으로 머무르던 어니스트 베델이 양기탁을 비롯하여 민족 진영 인사들에게 도움을 받아 1904년 7월 18일에 창간하였다. 이후 일제강점기시대에 대한매일신보는 매일신보로 이름이 바뀌었다.
  • 창간 당시에는 화합을 추구한 대한제국, 일본, 러시아의 각 정부에서 재정을 지원했지만, 이후 일본의 국권 침탈에 반일 신문으로 전향하였다. 그 당시 일본이 사실상 언론의 검열을 맡았던 시기임에도 반발이 가능했던 것은 발행인 베델이 일본과 동맹국인 영국 국민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일본의 경제적 침략을 극복하기 위해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고, 대한매일신보 등 각종 신문이 적극 참여하였다.
  • 하지만 통감부의 압박에 쇠퇴기를 겪는다. 민족 신문들의 저항을 탄압하기 위한 목적으로 통감부가 신문지법을 제정하고 이를 빌미로 베델을 1907년과 1908년 2번에 걸쳐 재판에 회부하였다. 또한 실질적인 경영주인 양기탁도 국채 보상 성금의 횡령 혐의로 재판에 넘겼다.[2]

광고료

  • 신문은 정보 전달 매체로서의 공공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기업(私企業)처럼 이윤추구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신문사가 적자 운영을 면하지 못한다면 이 또한 적지 않은 사회적 문제가 된다. 신문사는 기본적으로 구독 수입으로 경영을 해야 하지만 이는 많은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이에 신문사는 구독 수입 외에 광고 수입을 통해 경영의 합리화를 추구한다.
  • 당시 신문사의 광고료 계산 단위는 ‘1단 1행’ 을 기준으로 하고 있는데 대한매일신보의 광고료는 어느 정도였을까? 베델이 창간한 대한매일신보는 영국식인 인치(inch)를 사용하였다. 1904년 7월 창간 당시 광고료에 대해서는 영문판에“1일 1인치 또는 1인치 이하 50전(錢), 1개월간 매일 1인치 5원(圓), 1년간 매일 1인치 50원”으로 밝히고 있다. 그리고 복간한 1905년 8월에는“1일 1인치 25전(錢, 新貨), 2주일 2원(圓) 50전, 1개월 5원”으로 조정하였다.


대한매일신보광고료를 나타내는 사진이다.


활동시기

출처 : 우리역사넷
연도 활동 설명
1904.07.18 대한매일신보가 창간된 날 1904년에 발발한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영국인 어니스트 베델과 양기탁이 민족 진영 인사들에게 도움을 받아서 만든 민족적인 신문
1906.02 통감부 설립된 연도 일본 제국주의가 대한제국 황실의 안녕과 평화를 유지한다는 명분으로 서울에 설치한 통치기구로, 약 4년 6개월 동안 한국의 국정 전반을 장악했던 식민 통치 준비기국
1907.02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된 날 일본 제국이 대한제국을 경제적으로 예속시키고자 제공한 차관 1300만원을 국민들이 갚고자 한 것으로, 이와 관련된 기사를 대한매일신보에서 다루었으며 항일운동을 지속


쇠퇴와 변화

  • 이렇게 활발한 활동을 보였던 대한매일신보였지만 통감부의 압박에 쇠퇴기를 겪게 된다. 민족 신문들의 저항을 탄압하기 위한 목적으로 통감부가 신문지법을 제정하고 이를 빌미로 사주인 베델을 1907년과 1908년 2번에 걸쳐 재판에 회부하였다. 또한 실질적인 경영주인 양기탁도 국채 보상 성금의 횡령 혐의로 재판에 넘겼다. 결국 핵심 인사 두 명의 이탈로 대한매일신보는 큰 타격을 받았다.
  • 재판에서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한 일제는 영국 정부를 직접 압박해 베델을 상하이로 강제 소환시켜 6개월형을 받게 만들었고, 1909년 5월 베델은 그곳에서 사망했다. 1908년 5월 발행인이 영국인 만함(Alfred W. Marnham)으로 교체되었고 1910년 6월에는 이장훈으로 다시 바뀌었다.
  •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 이후 조선총독부의 일본어판 기관지 《경성일보》에 인수되었고, 제호에서 '대한'이 떨어진 채 1910년 8월 30일자 신문부터 총독부의 조선어판 기관지로 전락했다. 광복 후인 1945년 11월 22일 매일신보는 서울신문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의의




대한매일신보는 일제의 손으로 넘어가기 전까지 당시 일본의 언론탄압 속에서 외국인의 치외법권을 이용, 신속한 보도와 준열한 논설로써 대중을 계몽하고 항일사상을 고취시키는 등 한말의 대표적인 민족지로서 그 의의가 매우 크다.

각주

  1. 이후 대한매일신보는 한글본, 국한문본, 영문본을 함께 발행하였다. 대한매일신보의 슬로건을 단순하게 말하자면, '전투적 민족주의'였다.
  2. 결국 증거 불충분으로 양기탁은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대한매일신보는 이후에 난항을 겪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