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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격한 양식을 가졌던 삼국시대의 절과 달리 자유로운 건물의 배치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고려와 조선 시대로 갈 수록 점점 심해진다. 회전문, 범종각, 법당, 안양문, 무량수전의 차례로 이루어지는 공간 구조는 화엄경의 질서와 세계관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엄격한 양식을 가졌던 삼국시대의 절과 달리 자유로운 건물의 배치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고려와 조선 시대로 갈 수록 점점 심해진다. 회전문, 범종각, 법당, 안양문, 무량수전의 차례로 이루어지는 공간 구조는 화엄경의 질서와 세계관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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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신라 문무왕(재위 661∼681) 때 짓고, 공민왕 7년(1358)에 왜구의 침입으로 불에 타 버렸다. 지금 있는 건물은 고려 우왕 2년(1376)에 다시 짓고 광해군 때 새로 단청한 것으로, 1916년에 해체·수리 공사를 하였다.
  
 
===일화===
 
===일화===
《삼국유사》에 따르면, 의상이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때 그를 흠모한 여인 선묘가 용으로 변해 의상이 신라에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게 했고, 절터까지 따라와서 절을 세우는 것을 도와주었다고 한다. 본래 이 절터에는 사교의 무리가 모여 있었는데, 의상이 이 곳에 절을 세우려고 하자 선묘가 무거운 바위를 사교의 무리들의 머리 위로 띄워 이곳에 절을 세울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 돌을 ‘부석’이라 불렸으며 사찰 이름을 ‘부석사’라 불렀다고 한다. 그 후 선묘 신룡은 부석사를 지키기 위해 석룡으로 변신하여 무량수전 뜰아래 묻혔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무량수전 옆에 큰 바위가 있는데,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선묘가 띄웠던 바위이며 아직도 떠 있다고 한다.<ref>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429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_부석사</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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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에 따르면, 의상이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때 그를 흠모한 여인 선묘가 용으로 변해 의상이 신라에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게 했고, 절터까지 따라와서 절을 세우는 것을 도와주었다고 한다. 본래 이 절터에는 사교의 무리가 모여 있었는데, 의상이 이 곳에 절을 세우려고 하자 선묘가 무거운 바위를 사교의 무리들의 머리 위로 띄워 이곳에 절을 세울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 돌을 ‘부석’이라 불렸으며 사찰 이름을 ‘부석사’라 불렀다고 한다. 그 후 선묘 신룡은 부석사를 지키기 위해 석룡으로 변신하여 무량수전 뜰아래 묻혔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무량수전 옆에 큰 바위가 있는데,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선묘가 띄웠던 바위이며 아직도 떠 있다고 한다.<ref>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429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_부석사</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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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건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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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량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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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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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국보 제 17호) [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VdkVgwKey=11,00170000,37&pageNo=1_1_1_0 문화재청]
  
 
==<big>관계</bi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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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g>출처</big>==
 
==<big>출처</bi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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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콘텐츠 분야 7분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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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건축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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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라떼]]

2023년 12월 10일 (일) 23:25 기준 최신판

부석사

정의

건축물 정보

부석사(浮石寺)

  • 역사적 시대: 통일신라-신라 문무대왕 16년(676년)
 삼국유사에는“의상이 태백산에 가서 조정의 뜻을 받들어 부석사를 세우고 대승교(대승불교)를 포교하니 영감이 많이 나타났다"고 전한다. 그리하여 신라 문무왕 16년(676) 2월에 의상대사가 문무왕이 뜻을 받들어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
  • 위치: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봉황산
  • 특징: 의상이 왕명을 받아 세운 화엄종 사찰.

의상이 화엄의 큰 가르침을 베풀던 곳으로, 의상을“부석존자"라 하고, 그가 창시한 화엄종을“부석종"이라 하는 것도 여기에서 유래한다.

엄격한 양식을 가졌던 삼국시대의 절과 달리 자유로운 건물의 배치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고려와 조선 시대로 갈 수록 점점 심해진다. 회전문, 범종각, 법당, 안양문, 무량수전의 차례로 이루어지는 공간 구조는 화엄경의 질서와 세계관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 사건: 신라 문무왕(재위 661∼681) 때 짓고, 공민왕 7년(1358)에 왜구의 침입으로 불에 타 버렸다. 지금 있는 건물은 고려 우왕 2년(1376)에 다시 짓고 광해군 때 새로 단청한 것으로, 1916년에 해체·수리 공사를 하였다.

일화

《삼국유사》에 따르면, 의상이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때 그를 흠모한 여인 선묘가 용으로 변해 의상이 신라에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게 했고, 절터까지 따라와서 절을 세우는 것을 도와주었다고 한다. 본래 이 절터에는 사교의 무리가 모여 있었는데, 의상이 이 곳에 절을 세우려고 하자 선묘가 무거운 바위를 사교의 무리들의 머리 위로 띄워 이곳에 절을 세울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 돌을 ‘부석’이라 불렸으며 사찰 이름을 ‘부석사’라 불렀다고 한다. 그 후 선묘 신룡은 부석사를 지키기 위해 석룡으로 변신하여 무량수전 뜰아래 묻혔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무량수전 옆에 큰 바위가 있는데,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선묘가 띄웠던 바위이며 아직도 떠 있다고 한다.[2]

관련 건축물

관계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