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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朝鮮日報)는 1920년 3월, 일제강점기 중 문화 통치기 시기에 창간된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오래된 신문사 중 하나이다.
 
조선일보(朝鮮日報)는 1920년 3월, 일제강점기 중 문화 통치기 시기에 창간된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오래된 신문사 중 하나이다.

2025년 12월 14일 (일) 22:47 판

조선일보(朝鮮日報) 소개

조선일보11.png

조선일보(朝鮮日報)는 1920년 3월, 일제강점기 중 문화 통치기 시기에 창간된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오래된 신문사 중 하나이다.

분류 언론사
설립 연도 1920년

역사

일제 시대

조선일보(朝鮮日報)는 1920년 3월 5일 창간되었다. 발기인은 금융인, 자선사업가, 변호사 등 39명으로 자본금 20만원 규모로 처음 조직되었다. 당시 발기인 중 11명이 친일 경제단체 대정실업친목회 소속이었기에 허가받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이후의 평가가 있다. 창간 초반 당시 열악한 시설과 자본 부족으로 인해 경영이 순탄치 못해 경영진이 자주 교체되었다. 1924년 9월에 되어서야 신석우가 경영권을 인수하여 이때부터 민족진영으로 조선일보의 판권이 넘어오게 되었다.

1927년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단합하여 신간회(新幹會)가 결성되자, 조선일보는 신간회의 본부와 같은 역할을 맡아 신간회가 해체될 때까지 이를 지원하였다.

그러나 1933년 방응모가 회사를 인수하기까지 조선일보의 재정난은 지속되었다. 방응모는 회사를 인수하며 사시(社是)를 제정하고 편집 진용에 이광수, 주요한, 서춘 등의 인물을 기용하였다. 또한 1933년 7월 조만식 사장을 고문으로 추대하고 본인이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현대식 사옥, 자동주조기, 통신용 비행기 등을 도입함으로써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같은 해 조선어학회가 마련한 한글통일맞춤법을 채용하고 지면에 옮김으로써 민족문화 향상에 기여하였다. 특히, 학예면을 활용해 인문 발전을 위해 노력함과 동시에 신춘문예작품을 모집하며 민족혼을 양양하고 젊은 인재들 발굴을 꾀했다.

이 밖에도 1934년 서적 간행사업, 1935년 월간 종한지 <조광> 창간, 1936년 여성교양지 <여성> 발행 및 소년 잡지 <소년>을 출간하는 등의 노력을 이어나갔다. 그러던 중 태평양 전쟁 이후 1940년 8월 10일 강제 폐간 당하였다.

해방 이후

1945년 광복과 더불어 복간되고, 1948년 12월부터 배대판으로 발간되었으나 6·25전쟁 발발로 인해 신문 발행이 중단되었다. 서울이 다시 수복된 뒤에야 1952년에 시설 정비를 마치고, 1954년 4월 부로 신문을 다시 발행함으로써 정상화될 수 있었다.

논란

1930년대 친일 논란

1930년대 <조선일보>는 민족지로 부를 수 없는 모습을 보였다. 변모의 원인으로 꼽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일제의 통제에 놓여 사실상 언론자유가 없었다.

둘째, 일제강점 이후 20여년이 흘러 지식인 사이 항일의식이 다소 무뎌졌다.

셋째, 항일투쟁 노선이 분열하며, 지식인 역시 분열하였다.

넷째, 상업성에 치우치며 언론의 사명을 잊었다.

기업 이념

방응모 사장이 <조선일보>를 인수하며 제정한 사시(社是)가 기업 이념으로 홈페이지에도 적혀있다.

사시는 정의옹호, 문화건설, 산업발전, 불편부당이라는 4가지의 가치로 구성되어 있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