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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2월 3일 (수) 17:33 판
개요
-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망과 함께 해방 직후 여운형을 중심으로 조직된 정치 단체로, 해방된 조선을 질서 있게 자주적으로 건국하기 위한 준비를 목표로 했다.
- 1945년 해방과 함께 조직된 최초의 건국준비단체. 약칭 ‘건준(建準)’.
- 1945년 8월 15일~1945년 9월 6일
10월 6일 개최된 건준 중앙집행위원회에서 해체 의견이 다수를 이뤄 이 날 정식으로 건준은 해산되었다.
설립 과정
- 일제의 갑작스러운 항복 후 조선 전역에 혼란과 권력 공백 발생
- 치안 유지와 행정 기능을 조선인의 손으로 운영할 필요성 대두
- 총독부와의 사전 교섭을 통해 정치범 석방 및 치안 이양 논의가 진행됨
활동
치안 유지
- 해방 직후 치안대(자위 조직)를 운영하여 사회 혼란을 최소화하려고 하였다.
행정 기반 구축
- 미군정 도착 전까지 임시 행정 기능 일부 수행하였다.
- 식량 배급, 노동 관리, 일본인 재산 정리 등을 하였다.
평가
| 긍정적 평가 | 부정적 평가 |
|---|---|
| 한국인 주도 자치 시도의 출발점, 혼란 속 치안 유지 기여 | 조직력 부족, 이념 갈등 심화, 미군정과 협력 실패 |
역사적 의의
- 한국인이 주체가 되어 해방 정국을 이끌려는 최초의 국가 건설 시도
- 좌우합작 움직임의 출발점으로 평가
- 그러나 명확한 합법성과 정통성 확보에는 실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