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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2월 3일 (수) 17:18 판
개요
김관오(金冠五, 1901년 3월 4일~1965년 1월 31일)는 일제강점기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자 군인, 정치인이다. 호는 우당(愚堂)이며, 서울 출신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을 지냈고, 한국광복군 소속 군인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일제강점기에는 한국독립당 충칭지구당부위원장,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위대 대장 등을 역임하며 무장 독립운동과 임시정부의 치안, 경호 업무를 담당하였다. 이러한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생애
김관오(金冠五, 1901년 3월 4일~1965년 1월 31일)는 한성부(現 서울특별시)에서 김현철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이 일찍 사망하고 형제들 또한 요절하여 할아버지 슬하에서 독자로 성장하였다.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이던 1919년 3·1운동에 참가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선전물을 비밀리에 배포하였고, 같은 해 3월 23일 종로경찰서에 체포되어 고문을 당한 뒤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이송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석방 후 평강의 친척집에 피신하였고, 1921년 10월 중화민국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이듬해인 1922년 윈난육군강무학교(雲南陸軍講武學校)에 입학해 군사 교육을 받았으며, 1924년 졸업 후 광동성 광저우 주둔 국민혁명군 제43군에서 장교로 복무하였다. 이후 국민혁명군 중앙훈련단 및 중국보병학교 고등군사반을 수료하며 군사 전문성을 쌓았다.
1941년 한국독립당 충칭지구당 간부로 선임되었고, 같은 해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창립에 참여하여 고급 부관으로 활동하였다. 이어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위대를 조직하고 초대 경위대장에 취임하여 임시정부 청사와 요인들의 경호 업무를 담당하였다. 1942년에는 임시정부 선전위원 및 임시의정원 강원도의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으며, 중국군사위원회의 ‘한국광복군 9개 행동 준승’ 취소를 요구하는 제의안 제출에도 참여하였다.
이후 임시정부 내무부 경무과장(1943년)으로 임명되어 재외 동포 사회의 치안과 경찰 행정을 총괄하였고, 광복군 총사령부 고급참모 및 참모처 제2과장을 역임하는 등 광복군의 핵심 지휘부에서 활동하였다. 해방 직전에는 광복군 주항지대장으로서 항저우 일대에 있던 조선인 병사들을 광복군에 편입시켜 훈련을 담당하였다.
광복 후인 1946년 4월 광복군 제2지대원들과 함께 귀국하였으며, 이후 백범 김구 산하에서 애국단을 조직하여 비밀 활동을 전개하였다. 1947년 국민의회 문교위원으로 활동하였고, 같은 해 대한의열당 창당에 참여해 부위원장 및 중앙상무위원을 역임하였다.
1948년 육군사관학교 특7기로 입교한 뒤 대한민국 국군에 정식 편입되어 군 복무를 계속하였고, 제21보병연대 연대장, 유격사령관, 노무사단장 등을 역임하며 한국전쟁 기간 공비 토벌 및 군수 지원 업무를 수행하였다. 1953년 준장으로 진급, 1954년 미8군 지원 공적을 인정받아 미국 자유훈장을 수훈하였으며, 1957년 예비역 소장으로 예편하였다.
퇴역 후인 1963년, 일제강점기와 임시정부 및 광복군에서의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훈하였고, 독립동지회 상무위원장을 지냈다. 1965년 1월 31일 서울 자택에서 서거하였으며, 묘소는 이후 2002년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으로 이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