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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돌기(17세기초)=== | === 충돌기(17세기초)=== | ||
====정묘호란==== | ====정묘호란==== | ||
| − | + | 반란에 실패한 이괄[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A%B4%84%EC%9D%98_%EB%82%9C 반란에 실패한 이괄]의 잔당 중 한명련의 아들, 한윤과 한택은 후금으로 도망하여, 거기서 광해군의 폐위와 인조 즉위의 부당성을 호소하고, 또 조선의 병력이 약하며 모문룡의 군사가 오합(烏合)임을 말하여 속히 조선을 칠 것을 종용하였다. 명나라와의 교전으로 인한 경제단교로 심한 물자 부족에 처하여 있던 후금 태종(太宗) 홍타이지(皇太極)에게, 이괄 잔당의 이러한 종용은 더욱 조선 침입의 결의를 촉진시켰다. | |
| − | + | 1627년(인조 5년) 1월 13일(양력 2월 28일), 홍타이지는 광해군을 위하여 보복한다는 구실을 내세우고, 버일러(beile, 貝勒 : 만주·몽골의 부족장) 아민(Amin, 阿敏)에게 군사 3만 명을 주어 조선을 침입하게 했다. | |
| − | + | 후금군의 일부는 가도의 모문룡을 치고, 주력 부대 3만 명은 1월 14일(양력 3월 1일) 의주를 점령하고[1], 1월 15일(양력 3월 2일)엔 정주성을 함락시켰고, 1월 21일(양력 3월 8일) 안주성에서 남이흥, 전상의, 양진국, 장돈, 김언수, 함응수, 김준, 김양언, 송덕영을 죽인 이후 함락시켰고, 1월 23일(양력 3월 10일) 평양성에 도착했다. 이에 소현세자는 전주로 피난가고, 인조와 조선 조정은 강화도로 피난하였다.[2] | |
| + | 조선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나 평안북도 철산의 정봉수와 용천의 이립의 의병이 전투에서 승리하자, 명나라와 전쟁 중이였던 후금은 조선이 자신들의 배후를 공격할 것을 염려하여 강화를 제의하였다. 1627년 3월 3일(양력 4월 18일) 조선과 후금 사이에 강화가 성립되었다. 이때 조선은 후금과 형제관계를 맺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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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병자호란==== | |
| − | + | [[파일:삼전도비.JPG|섬네일|삼전도비]] | |
| − | + | 정묘호란 이후 후금은 조선에 여러 가지를 요구하였다. 이 요구에는 식량 지원과 명 정벌에 사용할 병선(兵船) 제공이 포함되었고 1632년(인조 10) 조선에 “형제지맹”을 “군신지의”로 바꾸기를 요구했는데 이것은 조선을 신하의 나라로 삼으려는 굴욕스러운 요구였다. 후금의 무리한 요구와 강압 정책으로 조선 내에서는 주자학적 명분론에 입각하여 화친하자는 논의를 배척하자는 척화론(斥和論)이 대두되었고 후금과의 관계는 악화하기 시작했다. 한편 후금의 숭덕제는 내몽골을 평정한 뒤 만주족의 왕을 일컫는 칭호인 한(汗)을 버리고 황제를 칭하려 했다. 1636년(인조 14) 3월에 잉굴다이(Inggūldai, 龍骨大)와 마푸타(Mafuta, 馬福大) 등을 보내어 여러 만주·몽골의 부족장들이 숭덕제에게 올린 존호의 글을 보이면서 조선 조정도 이같이 하라고 요구하였으나 척화론을 좇아 인조는 후금의 사신을 접견하지도 않고 국서도 받지 않았다. 물론 조정에서는 최명길과 같이 전쟁을 피하고 화해하거나 평화롭게 지내자는 주화론(主和論)을 주장한 자도 있었지만, 대세는 척화선전(斥和宣戰) 하는 기운으로 기울어졌고 드디어 팔도에 선전(宣戰) 교서를 내리어 방비를 굳게 하고 적의를 보였다.12월 8일, 청나라 선봉대가 압록강을 건너옴으로서 침공이 시작되었다. 당시, 조선의 대청 방어전략은 청야견벽(淸野堅壁)으로, 강한 청의 기병과 직접 맞부딪치는 것을 피하고 침공로 주변의 성에 군사를 집결하여 공성전을 강요함으로서 전쟁을 장기전으로 이끄는 것이었다. 이 전략은 명이 아무리 약화되었더라도 이를 배후에 두고서는 장기전을 벌이기 어려운 청의 약점을 노린 것으로, 유사시에는 수군이 약한 청의 공세를 피할 수 있도록 강화도에 파천하는 계획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정묘호란 당시 인조가 강화도로 파천하는 것을 지켜본 경험이 있는 청은 조선군이 지키고 있던 산성을 우회해서, 한양으로 신속히 남하하여 인조와 조정이 강화도로 피난하는 길을 차단하였다. 봉화를 통한 긴급 통신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조정이 청군의 침공을 인지한 것은 12월 13일이었으며, 인조는 청군이 한양에 거의 접근한 12월 14일에서야 파천에 나섰으나 강화도로 향하는 길이 이미 차단당한 이후라 남한산성으로 피할 수 밖에 없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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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은 천혜의 요새로 1만 3천여 명의 조선군이 수성에 나서 청군이 이를 공략하기는 쉽지 않았으나, 사전에 방어를 위한 준비가 갖춰지지 않았던 터라 한 달 남짓 버틸 수 있는 군량 밖에 없어 장기전을 도모하기 어려웠다. 조정은 남한산성과 강화도가 항전하는 동안 전국 각지의 관군이 집결하여 청군의 포위를 풀 것을 기대하였으나, 충청도 근왕병의 진격이 죽산에서 멈추었고(12월 19일) 12월 2일에서 청군에게 패배하였으며 수원 광교산 전투에서 청군에게 승리를 거둔 전라도 근왕병마저 보급 부족으로 퇴각함으로서 남한산성의 고립은 심화되었다. 한편,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청야견벽 전략에 따라 수성을 준비하다 허를 찔린 조선군은 청군의 뒤를 쫓아 남하하였으나 12월 25일 도르곤이 이끄는 청의 우익군에게 기습을 당하여 양근 미원으로 퇴각하였다. 양근 미원에는 약 1만 7천여 명의 조선군이 집결하였으나 청군과 정면으로 대결하지 못하였다. | 남한산성은 천혜의 요새로 1만 3천여 명의 조선군이 수성에 나서 청군이 이를 공략하기는 쉽지 않았으나, 사전에 방어를 위한 준비가 갖춰지지 않았던 터라 한 달 남짓 버틸 수 있는 군량 밖에 없어 장기전을 도모하기 어려웠다. 조정은 남한산성과 강화도가 항전하는 동안 전국 각지의 관군이 집결하여 청군의 포위를 풀 것을 기대하였으나, 충청도 근왕병의 진격이 죽산에서 멈추었고(12월 19일) 12월 2일에서 청군에게 패배하였으며 수원 광교산 전투에서 청군에게 승리를 거둔 전라도 근왕병마저 보급 부족으로 퇴각함으로서 남한산성의 고립은 심화되었다. 한편,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청야견벽 전략에 따라 수성을 준비하다 허를 찔린 조선군은 청군의 뒤를 쫓아 남하하였으나 12월 25일 도르곤이 이끄는 청의 우익군에게 기습을 당하여 양근 미원으로 퇴각하였다. 양근 미원에는 약 1만 7천여 명의 조선군이 집결하였으나 청군과 정면으로 대결하지 못하였다. | ||
2025년 11월 25일 (화) 18:23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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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과 청의 관계
목차
- 개요
- 총돌기
개요
조선과 청나라는 역사적으로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다. 조선은 장기간에 걸쳐 청나라와의 교류를 통해 문화, 정치, 군사적 영향을 받았다. 청나라가 세력을 확장함에 따라 조선은 청나라에 조공을 바치는 속국의 위치에 있었다. 이 관계는 조선의 대외정책과 국제관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충돌기(17세기초)
정묘호란
반란에 실패한 이괄반란에 실패한 이괄의 잔당 중 한명련의 아들, 한윤과 한택은 후금으로 도망하여, 거기서 광해군의 폐위와 인조 즉위의 부당성을 호소하고, 또 조선의 병력이 약하며 모문룡의 군사가 오합(烏合)임을 말하여 속히 조선을 칠 것을 종용하였다. 명나라와의 교전으로 인한 경제단교로 심한 물자 부족에 처하여 있던 후금 태종(太宗) 홍타이지(皇太極)에게, 이괄 잔당의 이러한 종용은 더욱 조선 침입의 결의를 촉진시켰다.
1627년(인조 5년) 1월 13일(양력 2월 28일), 홍타이지는 광해군을 위하여 보복한다는 구실을 내세우고, 버일러(beile, 貝勒 : 만주·몽골의 부족장) 아민(Amin, 阿敏)에게 군사 3만 명을 주어 조선을 침입하게 했다.
후금군의 일부는 가도의 모문룡을 치고, 주력 부대 3만 명은 1월 14일(양력 3월 1일) 의주를 점령하고[1], 1월 15일(양력 3월 2일)엔 정주성을 함락시켰고, 1월 21일(양력 3월 8일) 안주성에서 남이흥, 전상의, 양진국, 장돈, 김언수, 함응수, 김준, 김양언, 송덕영을 죽인 이후 함락시켰고, 1월 23일(양력 3월 10일) 평양성에 도착했다. 이에 소현세자는 전주로 피난가고, 인조와 조선 조정은 강화도로 피난하였다.[2]
조선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나 평안북도 철산의 정봉수와 용천의 이립의 의병이 전투에서 승리하자, 명나라와 전쟁 중이였던 후금은 조선이 자신들의 배후를 공격할 것을 염려하여 강화를 제의하였다. 1627년 3월 3일(양력 4월 18일) 조선과 후금 사이에 강화가 성립되었다. 이때 조선은 후금과 형제관계를 맺었다.
병자호란
정묘호란 이후 후금은 조선에 여러 가지를 요구하였다. 이 요구에는 식량 지원과 명 정벌에 사용할 병선(兵船) 제공이 포함되었고 1632년(인조 10) 조선에 “형제지맹”을 “군신지의”로 바꾸기를 요구했는데 이것은 조선을 신하의 나라로 삼으려는 굴욕스러운 요구였다. 후금의 무리한 요구와 강압 정책으로 조선 내에서는 주자학적 명분론에 입각하여 화친하자는 논의를 배척하자는 척화론(斥和論)이 대두되었고 후금과의 관계는 악화하기 시작했다. 한편 후금의 숭덕제는 내몽골을 평정한 뒤 만주족의 왕을 일컫는 칭호인 한(汗)을 버리고 황제를 칭하려 했다. 1636년(인조 14) 3월에 잉굴다이(Inggūldai, 龍骨大)와 마푸타(Mafuta, 馬福大) 등을 보내어 여러 만주·몽골의 부족장들이 숭덕제에게 올린 존호의 글을 보이면서 조선 조정도 이같이 하라고 요구하였으나 척화론을 좇아 인조는 후금의 사신을 접견하지도 않고 국서도 받지 않았다. 물론 조정에서는 최명길과 같이 전쟁을 피하고 화해하거나 평화롭게 지내자는 주화론(主和論)을 주장한 자도 있었지만, 대세는 척화선전(斥和宣戰) 하는 기운으로 기울어졌고 드디어 팔도에 선전(宣戰) 교서를 내리어 방비를 굳게 하고 적의를 보였다.12월 8일, 청나라 선봉대가 압록강을 건너옴으로서 침공이 시작되었다. 당시, 조선의 대청 방어전략은 청야견벽(淸野堅壁)으로, 강한 청의 기병과 직접 맞부딪치는 것을 피하고 침공로 주변의 성에 군사를 집결하여 공성전을 강요함으로서 전쟁을 장기전으로 이끄는 것이었다. 이 전략은 명이 아무리 약화되었더라도 이를 배후에 두고서는 장기전을 벌이기 어려운 청의 약점을 노린 것으로, 유사시에는 수군이 약한 청의 공세를 피할 수 있도록 강화도에 파천하는 계획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정묘호란 당시 인조가 강화도로 파천하는 것을 지켜본 경험이 있는 청은 조선군이 지키고 있던 산성을 우회해서, 한양으로 신속히 남하하여 인조와 조정이 강화도로 피난하는 길을 차단하였다. 봉화를 통한 긴급 통신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조정이 청군의 침공을 인지한 것은 12월 13일이었으며, 인조는 청군이 한양에 거의 접근한 12월 14일에서야 파천에 나섰으나 강화도로 향하는 길이 이미 차단당한 이후라 남한산성으로 피할 수 밖에 없었다.
남한산성은 천혜의 요새로 1만 3천여 명의 조선군이 수성에 나서 청군이 이를 공략하기는 쉽지 않았으나, 사전에 방어를 위한 준비가 갖춰지지 않았던 터라 한 달 남짓 버틸 수 있는 군량 밖에 없어 장기전을 도모하기 어려웠다. 조정은 남한산성과 강화도가 항전하는 동안 전국 각지의 관군이 집결하여 청군의 포위를 풀 것을 기대하였으나, 충청도 근왕병의 진격이 죽산에서 멈추었고(12월 19일) 12월 2일에서 청군에게 패배하였으며 수원 광교산 전투에서 청군에게 승리를 거둔 전라도 근왕병마저 보급 부족으로 퇴각함으로서 남한산성의 고립은 심화되었다. 한편,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청야견벽 전략에 따라 수성을 준비하다 허를 찔린 조선군은 청군의 뒤를 쫓아 남하하였으나 12월 25일 도르곤이 이끄는 청의 우익군에게 기습을 당하여 양근 미원으로 퇴각하였다. 양근 미원에는 약 1만 7천여 명의 조선군이 집결하였으나 청군과 정면으로 대결하지 못하였다.
강화도에는 세자빈(소현세자의 부인)과 봉림대군(후일 효종)을 비롯하여 왕실과 역대 임금의 신주가 피난해 있었다. 인조와 조정은 수전의 경험이 적은 청군이 강화도를 공략하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하였으나, 청군은 명 수군 출신의 공유덕과 경중명 등을 앞세워 강화도를 공격하였다. 숭덕제는 인조가 1월 19일까지 항복하지 않자 강화도 공격을 명령하였고, 청군은 1월 22일 새벽부터 강화도 상륙을 시도하여 당일 오후에 강화산성을 함락시켰다. 비축 식량의 소진으로 어려움을 겪던 인조와 조정은 2월 20일(음력 1월 26일) 강화도 실함 사실을 접하자 항전의지를 상실했고, 결국 1월 30일(양력 2월 24일) 출성하여 삼전도에서 숭덕제에게 항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