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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명=이용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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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석현(石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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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1854년
 
|출생=185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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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성장'''<br/>
 
'''2. 성장'''<br/>
 
*5~15세까지 서당에서 한학(漢學)을 수학하였다.
 
*5~15세까지 서당에서 한학(漢學)을 수학하였다.
*20대초까지 주자학자 초병덕(楚秉悳)의 지도로 학문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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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초까지 주자학자 초병덕(楚秉悳)의 지도로 학문을 배웠다.
 
*21세에 학문을 그만두고 고향을 떠났다.
 
*21세에 학문을 그만두고 고향을 떠났다.
*이후 정계에 진출 전까지 보부상(褓負商)이나 물장수로 일하며 돈을 모으고, 함경남도 단천에서 금광에 투자하여 큰 돈을 벌었다는 추측이 가장 지배적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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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정계에 진출 전까지 보부상(褓負商)이나 물장수로 일하며 돈을 모으고, 함경남도 단천에서 금광에 투자하여 큰돈을 벌었다는 추측이 가장 지배적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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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정계 진출 및 이후 행보'''<br/>
 
'''3. 정계 진출 및 이후 행보'''<br/>
*'''첫 임명''':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 때, 명성황후를 장호원으로 피신시키고 명성황후와 민영익 사이에서 연락책의 역할을 한다. 이러한 공을 인정 받아 감역(監役)으로 임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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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임명''':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 때, 명성황후를 장호원으로 피신시키고 명성황후와 민영익 사이에서 연락책의 역할을 한다. 이러한 공을 인정받아  <span style="background:#aee1e1">감역(監役)</span>으로 임명된다.
 
*'''고종의 신뢰''': 정계 진출 후 금 채굴과 고종의 화폐제도 의견 지지를 바탕으로 고종의 신뢰를 얻는다.
 
*'''고종의 신뢰''': 정계 진출 후 금 채굴과 고종의 화폐제도 의견 지지를 바탕으로 고종의 신뢰를 얻는다.
 
*'''위기''': 1888년 민란을 이유로 함경도병마절도사(咸鏡道兵馬節度使)에서 탄핵당한 후, 유배를 간다. 이후 1890년에 재복귀하지만 1896년 민란이 다시 발생하여 또다시 유배를 간다.
 
*'''위기''': 1888년 민란을 이유로 함경도병마절도사(咸鏡道兵馬節度使)에서 탄핵당한 후, 유배를 간다. 이후 1890년에 재복귀하지만 1896년 민란이 다시 발생하여 또다시 유배를 간다.
*'''광산경영''': 그의 광산 경영 능력이 인정받아, 여러 자리를 거쳐 전국 광산을 관리하기에까지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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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경영''': 그의 광산 경영 능력이 인정받아, 여러 자리를 거쳐 <span style="background:#aee1e1">전국 광산을 관리</span>하기에까지 이른다.
*'''왕실재정 관리''': 1899년 내장원경(內藏院卿)에 임명된다. 이는 당시 왕실 재정 관리 최고 책임자의 직급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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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 재정 관리''': 1899년 <span style="background:#aee1e1">내장원경(內藏院卿)</span>에 임명된다. 이는 당시 왕실 재정 관리 최고 책임자의 직급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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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일제의 납치'''<br/>
 
'''4. 일제의 납치'''<br/>
 
*'''러일 전쟁''': 1904년 2월 8일 러일 전쟁이 발발한다. 러시아의 세력이 조선에 점점 더 확장되자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공고히 하고 싶었던 일본은 러시아와 전쟁을 한다. 또, 조선을 압박하여 한일의정서 체결을 하려 노력한다.
 
*'''러일 전쟁''': 1904년 2월 8일 러일 전쟁이 발발한다. 러시아의 세력이 조선에 점점 더 확장되자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공고히 하고 싶었던 일본은 러시아와 전쟁을 한다. 또, 조선을 압박하여 한일의정서 체결을 하려 노력한다.
*'''일제와 대척하는 이용익''': 이용익은 대한제국의 국외 중립 선언을 해외에 전달하는 작업을 주도하였다. 또, 한일의정서 체결과 관련해서도 반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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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와 대척하는 이용익''': 이용익은 대한제국의 <span style="background:#aee1e1">국외중립 선언</span>을 해외에 전달하는 작업을 주도하였다. 또, 한일의정서 체결과 관련해서도 반대하였다.
*'''강제 일본 압송''': 이를 의식한 일제는 1904년 2월 23일 일본으로 이용익을 강제 압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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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 일본 압송''': 이를 의식한 일제는 1904년 2월 23일 일본으로 이용익을 <span style="background:#aee1e1">강제 압송</span>한다.
 
*'''귀환''': 1904년 12월에 대한제국으로 돌아왔다.<br/>
 
*'''귀환''': 1904년 12월에 대한제국으로 돌아왔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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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교육에 대한 관심'''<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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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교육에 관한 관심'''<br/>
*'''선진문물을 접하다''': 감금 기간동안 이용익은 일본에서 선진문물 및 선진교육제도를 접한다. 이에 귀국할 때 다수의 도서를 구입하여 들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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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문물을 접하다''': 감금 기간에 이용익은 일본에서 선진문물 및 선진교육제도를 접한다. 이에 귀국할 때 다수의 도서를 구입하여 들여왔다.
 
*'''교육구국''': 이 경험을 바탕으로 나라를 부흥시키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함을 자각하고 그 중요성을 깨달은 것으로 보인다.
 
*'''교육구국''': 이 경험을 바탕으로 나라를 부흥시키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함을 자각하고 그 중요성을 깨달은 것으로 보인다.
*'''학교설립''': 보성학교 7개소 설립을 계획하고 실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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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설립''': <span style="background:#aee1e1">보성학교 7개소 설립을 계획하고 실천</span>하였다. 이에 보성소학교(普成小學校) 및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를 설립한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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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일본의 지속적인 공격'''<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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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고종의 임무'''<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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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늑약 이후, 고종은 해외에 자신의 의사에 반하는 조약이었음을 피력하려 노력한다. 이것의 일환으로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된 인물들이 이상설(李相卨), 이준(李儁), 이위종(李瑋鍾)로 일명 '헤이그 특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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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외교 역할을 고종은 이용익에게도 맡겼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고종의 밀령을 바탕으로 프랑스를 거쳐 러시아에 가 외교활동을 하려 노력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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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과정에서 1907년 블라디보스토에서 체류하던 중 사망하였다. 이에 황실에서는 그의 시호로  <span style="background:#aee1e1">충숙(忠肅)</span>을 하사하였다.
  
 
==평가==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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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정적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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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러파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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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일가에 의지하여 권력을 얻은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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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도병마절도사(咸鏡道兵馬節度使) 당시 탐욕에 기반한 정치로 인해 민란을 일으켰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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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긍정적 평가'''<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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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견제할 정도로 일제의 침탈에 강경하게 맞서 싸운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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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손자 이종호(李鍾浩) 또한 독립운동을 지속했으며 이용익의 뒤를 이어 보성전문학교의 2대 교주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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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러파는 친일파의 모함으로 인해 빚어진 오해이다.<ref>최재원 기사 중 "페테르부르크에서 친일파의 사주를 받은 김현토의 총을 맞고 병사하신 후, 친일파들의 갖은 모함을 받고 '친러파'로 낙인찍히셨다" 참조</ref>
  
 
==각주==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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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부상 출신에서 대한제국의 실세로, 우리역사넷,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n403900&code=kc_age_40, 접속일: 2024. 12. 20.
 
*보부상 출신에서 대한제국의 실세로, 우리역사넷,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n403900&code=kc_age_40, 접속일: 2024. 12. 20.
 
*이용익 (李容翊),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5266, 접속일: 2024. 12. 20.
 
*이용익 (李容翊),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5266, 접속일: 2024. 1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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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원, 「"고려대 설립자 이용익 선생 재평가돼야"」, 『OhmyNews』, 2005. 03. 21.,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43838, 접속일: 2024. 12. 20.
  
 
[[분류:헤르미온느]]
 
[[분류:헤르미온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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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독립운동사의 근간, 교육구국운동(敎育救國運動)]]

2024년 12월 22일 (일) 06:22 기준 최신판

기본정보



약력

[이용익 약력[1]]
일자 직무
1882년 감역(監役)
1883년 단천부사(端川府使)
1885년 북청부사(北靑府使)
1887년 영흥부사(永興府使), 함경남도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1894년 함경도 광무(鑛務) 관리[2], 함경남도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1896년 여러 지역의 광산을 관리하는 임무를 맡음, 평안북도관찰사(觀察使)
1897년 중추원(中樞院) 의관(議官), 탁지부(度支部) 전환국장, 유배
1899년 내장원경(內藏院卿)

생애

1. 출생
1854년 1월 6일, 함경북도 명천(鳴川)에서 아버지 이병효(李秉斅)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2. 성장

  • 5~15세까지 서당에서 한학(漢學)을 수학하였다.
  • 20대 초까지 주자학자 초병덕(楚秉悳)의 지도로 학문을 배웠다.
  • 21세에 학문을 그만두고 고향을 떠났다.
  • 이후 정계에 진출 전까지 보부상(褓負商)이나 물장수로 일하며 돈을 모으고, 함경남도 단천에서 금광에 투자하여 큰돈을 벌었다는 추측이 가장 지배적이다.


3. 정계 진출 및 이후 행보

  • 첫 임명: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 때, 명성황후를 장호원으로 피신시키고 명성황후와 민영익 사이에서 연락책의 역할을 한다. 이러한 공을 인정받아 감역(監役)으로 임명된다.
  • 고종의 신뢰: 정계 진출 후 금 채굴과 고종의 화폐제도 의견 지지를 바탕으로 고종의 신뢰를 얻는다.
  • 위기: 1888년 민란을 이유로 함경도병마절도사(咸鏡道兵馬節度使)에서 탄핵당한 후, 유배를 간다. 이후 1890년에 재복귀하지만 1896년 민란이 다시 발생하여 또다시 유배를 간다.
  • 광산경영: 그의 광산 경영 능력이 인정받아, 여러 자리를 거쳐 전국 광산을 관리하기에까지 이른다.
  • 왕실 재정 관리: 1899년 내장원경(內藏院卿)에 임명된다. 이는 당시 왕실 재정 관리 최고 책임자의 직급이다.


4. 일제의 납치

  • 러일 전쟁: 1904년 2월 8일 러일 전쟁이 발발한다. 러시아의 세력이 조선에 점점 더 확장되자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공고히 하고 싶었던 일본은 러시아와 전쟁을 한다. 또, 조선을 압박하여 한일의정서 체결을 하려 노력한다.
  • 일제와 대척하는 이용익: 이용익은 대한제국의 국외중립 선언을 해외에 전달하는 작업을 주도하였다. 또, 한일의정서 체결과 관련해서도 반대하였다.
  • 강제 일본 압송: 이를 의식한 일제는 1904년 2월 23일 일본으로 이용익을 강제 압송한다.
  • 귀환: 1904년 12월에 대한제국으로 돌아왔다.


5. 교육에 관한 관심

  • 선진문물을 접하다: 감금 기간에 이용익은 일본에서 선진문물 및 선진교육제도를 접한다. 이에 귀국할 때 다수의 도서를 구입하여 들여왔다.
  • 교육구국: 이 경험을 바탕으로 나라를 부흥시키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함을 자각하고 그 중요성을 깨달은 것으로 보인다.
  • 학교설립: 보성학교 7개소 설립을 계획하고 실천하였다. 이에 보성소학교(普成小學校) 및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를 설립한다.


6. 일본의 지속적인 공격

7. 고종의 임무

  • 을사늑약 이후, 고종은 해외에 자신의 의사에 반하는 조약이었음을 피력하려 노력한다. 이것의 일환으로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된 인물들이 이상설(李相卨), 이준(李儁), 이위종(李瑋鍾)로 일명 '헤이그 특사'이다.
  • 이러한 외교 역할을 고종은 이용익에게도 맡겼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고종의 밀령을 바탕으로 프랑스를 거쳐 러시아에 가 외교활동을 하려 노력한 것으로 추정된다.
  • 이 과정에서 1907년 블라디보스토에서 체류하던 중 사망하였다. 이에 황실에서는 그의 시호로 충숙(忠肅)을 하사하였다.

평가

1. 부정적 평가

  • 친러파 인물이다.
  • 명성황후 일가에 의지하여 권력을 얻은 인물이다.
  • 함경도병마절도사(咸鏡道兵馬節度使) 당시 탐욕에 기반한 정치로 인해 민란을 일으켰다.


2. 긍정적 평가

  • 일제가 견제할 정도로 일제의 침탈에 강경하게 맞서 싸운 인물이다.
  • 그의 손자 이종호(李鍾浩) 또한 독립운동을 지속했으며 이용익의 뒤를 이어 보성전문학교의 2대 교주가 된다.
  • 친러파는 친일파의 모함으로 인해 빚어진 오해이다.[3]

각주

  1. 보부상 출신에서 대한제국의 실세로, 우리역사넷,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n403900&code=kc_age_40, 접속일: 2024. 12. 20. 해당 페이지의 내용을 정리하였다.
  2.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의 임명
  3. 최재원 기사 중 "페테르부르크에서 친일파의 사주를 받은 김현토의 총을 맞고 병사하신 후, 친일파들의 갖은 모함을 받고 '친러파'로 낙인찍히셨다" 참조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