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명여고보 제1차 맹휴 사건"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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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공한 항쟁'''<br/>
 
요구 조건이 어느 정도 관철되었다는 점에서 결과론적으로 성공한 항쟁이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br/>
 
요구 조건이 어느 정도 관철되었다는 점에서 결과론적으로 성공한 항쟁이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br/>
하지만, 그러한 결과를 고려하지 않더라도 일제에 항거를 협력적으로 전개했다는 점 자체가 큰 의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문화통치를 통해 교묘하게 진행되었던 민족 말살 정책 및 그를 바탕으로 이뤄진 교육에 대해, 학생들이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이거나 순응하는 것이 아닌, 문제를 인식하고 문제의 해결을 위한 실천적 행동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해당 사건이 가지는 의의가 크다. 이러한 일제에 대한 저항은 3.1운동의 정신을 계승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나아가, 학생들의 항쟁이 학교 내부의 사건으로만 국한되지 않고 숙녀회, 양명회, 조선학생과학연구회, 근우회 등의 사회 단체로부터의 지원 또는 지지로 이어져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는 점에서도 일제에 민족 항일 운동의 파급력을 다시금 재확인시켜 주는 사건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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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의의'''<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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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러한 결과를 고려하지 않더라도 일제에 항거를 협력적으로 전개했다는 점 자체가 큰 의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문화통치를 통해 교묘하게 진행되었던 민족 말살 정책 및 그를 바탕으로 이뤄진 교육에 대해, 학생들이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이거나 순응하는 것이 아닌, <span style="background:#aee1e1">문제를 인식</span>하고 문제의 해결을 위한 <span style="background:#aee1e1">실천적 행동</span>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해당 사건이 가지는 의의가 크다. 이러한 일제에 대한 저항은 3.1운동의 정신을 계승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나아가, 학생들의 항쟁이 학교 내부의 사건으로만 국한되지 않고 숙녀회, 양명회, 조선학생과학연구회, 근우회 등의 <span style="background:#aee1e1">사회 단체로부터의 지원 또는 지지</span>로 이어져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는 점에서도 일제에 민족 항일 운동의 파급력을 다시금 재확인시켜 주는 사건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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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22일 (일) 02:28 판

개요

1927년 5월 27일부터 1927년 9월 27일경까지, 약 4개월(126일) 동안 전개된 일본인 교사의 차별에 분노한 학생들이 동맹 휴학을 한 사건이다.

사건 원인

사건 발발 원인은 일제의 식민 교육정책에 대한 반발로 볼 수 있다.
1919년 3.1운동 이후, 일제는 무단 통치의 한계를 느끼고 이른바 문화통치(文化統治)로 식민 통치 정책을 변화한다. 겉으로는 식민 통치가 완화된 것처럼 보였지만, 이 시기 일제는 정신적 측면에서 성공적 식민화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 일환으로 식민사관(植民史觀) 연구가 진행되었으며, 많은 지식인이 해당 시기에 친일로 노선을 변경하기도 하였다.
1922년 2월 6일에 발표되어 1937년까지 시행된 ' 제2차 조선교육령'도 이러한 통치 정책을 반영하고 있다. '제2차 조선교육령'은 일시동인(一視同仁)을 강조하며 형식상으로는 일본과 조선의 동등한 교육을 시행을 목표로 했다. 하지만, 그 근저에는 차별에 기반한 식민 동화 교육이 깔려있었다.
이 과정에서 숙명여고보 역시 차별적 교육으로 인한 고통을 받는다. 일본인 교원과 조선인 교원 간의 차별, 조선인 교원에 대한 탄압, 폭력적 식민화 교육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이러한 민족정신 말살 교육에 대한 저항으로 맹휴가 일어났다.

요구 조건

학생들의 맹휴 조건은 다음과 같았다.[1]

① 사이토(齋藤) 선생 퇴직 ② 나카시마(中島) 사감 퇴직 ③ 학생 대우개선 ④ 조선재봉선생 임명 ⑤ 조선인선생 채용 증가  ⑥ 인격 선생 대우 정당

핵심을 살펴보면, 학생들은 문제의 일본인 교원의 퇴직과 학생 처우 개선 및 조선인 교원 증원 및 처우 개선을 요구한 것으로 보인다.

전개

[주요 전개 과정[2]]
일자 설명
5. 26.
  • 총동맹휴학 단행
  • 학감에게 제시한 요구조건에 대한 회답 요구
  • 학부형의 지지
5. 28.
  • 학부형회 개최
  • 학교 측 맹휴문제 해결 의사 표현
5. 30.
  • 28일 학부형회를 회의 내용을 바탕으로 학생들은 일단 등교하여 수업을 진행함.
  • 총동부의 강경 대응 명령에 따른 요구 조건 수용 전면 부정한 학교 측의 태도 변경
6. 7.
  • 학교평의회 개체
  • 학교 측 강경 대응 고수
6. 9.
  • 긴급직원회의 실시: 10일, 11일에 휴교 후 가정방문을 통해 학생 위협
  • 학부형회 개최: 학교 태도 변경에 대한 책임 문책
6. 10. 근우회 임시집행위원회 개최
6. 14. 교무주임의 강경 대응: 학생들이 등교하지 않을 경우 무기 휴교 조치 취하기로 결정
6. 20. 학부형대회 개최: 문제 해결책 강구
6. 25. 학부형 위원 성명서 발표
6. 26. 학교 측이 7월 1일까지 학생들이 등교하지 않을 시 퇴학 처리를 하겠다며 협박
6. 27. 학생대회 개최하여 결의문 발표
6. 29. 종로경찰청에서 학생을 소환하여 압박
7. 6. 양명회 창립대회 개최
7. 19. 학교 측 학생들에게 2학기 개학일인 8월 20일에 등교할 것을 통지
8. 20.
  • 학생 상당수가 등교
  • 기숙사 학생 일부가 사퇴하지 않는 것에 대한 반발로 기숙사를 나옴
8. 23. 문제의 교무주임이 선생으로서의 위치가 유지되고, 조회에서 훈시하려 한 것으로 인해 학생들이 일제히 퇴장
8. 24.
  • 학교 측이 20일 기숙사를 나간 학생들에 대하여 무기정학처분을 내림
  • 숙녀회 조선인 여교사 3명은 이에 항의하며 사직원을 제출
8. 26.
  • 학생들이 수업을 듣지 않고 나감
  • 학교 측은 이들에 대해서도 무기정학처분을 내림
8. 27. 학생들의 무기정학처분에 반대하여 학생들이 오전 10시 30분경에 일제히 집으로 돌아감
8. 28.
  • 긴급학부형위원회 개최 후 학생들에 대한 지지 표명
  • 숙녀회의 항의
8. 31.
  • 양명회의 사퇴 요구
  • 부정적 사회 여론과 압박으로 사표를 제출함
9. 3. 학생들이 일제히 등교하여 맹휴가 마무리됨

결말

  • 교무주임은 사표를 제시
  • 재봉교사로 숙명 출신인 오경선(吳慶善)이 부임

학생들이 요구한 6가지 조건이 모두 수용되지 않았지만, 가장 핵심이었던 교무주임이 사직(①)을 끌어냈다는 점과 조선인 재봉 선생이 부임했다는 점(④)에서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평가

1. 성공한 항쟁
요구 조건이 어느 정도 관철되었다는 점에서 결과론적으로 성공한 항쟁이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2. 의의
하지만, 그러한 결과를 고려하지 않더라도 일제에 항거를 협력적으로 전개했다는 점 자체가 큰 의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문화통치를 통해 교묘하게 진행되었던 민족 말살 정책 및 그를 바탕으로 이뤄진 교육에 대해, 학생들이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이거나 순응하는 것이 아닌, 문제를 인식하고 문제의 해결을 위한 실천적 행동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해당 사건이 가지는 의의가 크다. 이러한 일제에 대한 저항은 3.1운동의 정신을 계승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나아가, 학생들의 항쟁이 학교 내부의 사건으로만 국한되지 않고 숙녀회, 양명회, 조선학생과학연구회, 근우회 등의 사회 단체로부터의 지원 또는 지지로 이어져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는 점에서도 일제에 민족 항일 운동의 파급력을 다시금 재확인시켜 주는 사건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각주

  1. 강혜경, "숙명여고보 맹휴사건으로 본 식민지 여성교육",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37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0, 279쪽. 인용
  2. 강혜경, "숙명여고보 맹휴사건으로 본 식민지 여성교육"를 참고하여 작성하였다.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