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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일=193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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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자=김원봉(金元鳳)
 
|설립자=김원봉(金元鳳)
|설립위치=난징(南京)교외 선사묘(善祠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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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위치=중국 난징(南京) 교외 선사묘(善祠廟)
 
|계승=민족혁명당 군사부 훈련반  
 
|계승=민족혁명당 군사부 훈련반  
 
|관련링크=http://www.miryang815.or.kr/bbs/board.php?bo_table=data&wr_id=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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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혁명간부학교(朝鮮革命幹部學校)'''는 1932년 의열단(義烈團) 단장 김원봉(金元鳳)이 중국의 장제스(蔣介石)의 지원으로 독립운동 군사 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중국의 난징(南京)에 설립한 군사간부양성학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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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혁명간부학교(朝鮮革命幹部學校)'''는 1932년 의열단(義烈團) 단장 김원봉(金元鳳)이 중국의 [[장제스]](蔣介石)의 지원으로 독립운동 군사 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중국의 난징(南京)에 설립한 군사간부양성학교이다. 1932년 개교 이래 1935년 9월 폐교까지 1기생 26명, 2기생 55명, 3기생 44명 등 총 125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 주요 인물과 활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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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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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단장 김원봉에 의해 중국의 난징에 설립되어, 당해 10월부터 1935년 9월에 이르는 3년여 동안 청년 투사를 양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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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요 인물과 활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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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물 !! 역할 및 기여
 
! 인물 !! 역할 및 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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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영|| 독립군 기지 건설, 경학사 및 신흥무관학교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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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봉|| 단장, 조선혁명간부학교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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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녕|| 경학사 내무부장, 독립운동 기지 운영에 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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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악|| 조선혁명간부학교 교육 주임, 군사 훈련 담당, 의열단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추후 조선의용대 부대장, 한국광복군 중교 등을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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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영|| 재산 헐값으로 매각하여 독립운동 자금 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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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광|| 조선혁명간부학교 교관, 1933년 9월∼1934년 4월에 조선혁명간부학교 제2기 과정 교육을 담당하였으며 조선민족혁명당 중앙군사학 편찬위원으로 군사학 편찬에 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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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룡|| 경학사 사장, 신흥무관학교 설립 및 운영에 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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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통 || 조선혁명간부학교 입학, 졸업 후 조선의용대 정치지도원, 조선민족혁명당 중앙위원,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 한국광복군 지대장으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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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섭|| 경학사 및 신흥무관학교 교육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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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삼|| 백서농장 장주, 신흥학교 졸업생 훈련 및 독립군 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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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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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경''' ==
* 신흥강습소
+
독립운동이 실질적인 항일 투쟁의 형태로 진행되기 위해서 한인 청년들이 군벌 산하의 군사학교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고자 노력했다. <ref> 신규식이나 여운형은 중국의 우페이푸(吳佩孚) 등이 지휘하는 군벌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우페이푸는 친한파 군벌 중 하나로서, 중국군이 한국을 거쳐 일본에 진공해야 함을 주장했는데, 이러한 측면에서 여운형 등이 활동했던 한국노병회와 뜻이 맞아 교섭하였다. </ref> 하지만, 명확한 결과가 나오지 못했다. 임시정부가 군사 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상하이에 세웠던 육군무관학교는 6개월간의 초급장교 양성과정에서 1920년 상반기 19명, 하반기 24명 배출을 끝으로 안타깝게 폐교했고, 임시정부 군무총장 노백린은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비행사양성소를 설립했으나 이 역시 비행대 편성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 신흥중학교
 
  
== 연원 및 변천 ==
+
이렇게 무장 투쟁을 위한 시도가 무산되자, 1919년 조직된 무장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은 중국국민당과의 합작을 통해 돌파구를 마련하고자했다. 또한, 단원 상당수가 국민당과 함께 북벌에 참가했기 때문에 국민당 입장에서도 김원봉과 의열단을 지원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 a. 신민회의 만주 독립군 기지 건설 ===
+
== '''특징''' ==
* '''1909년''': 신민회는 만주에 독립군 기지를 세우기로 결정하고, 이동녕, 이회영, 장유순 등이 기지 건설을 위해 만주로 파견된다.
 
* '''1910년 7월''': 남만주 유하현 상원보 추가가에 정착, 그러나 토착민의 배척으로 어려움을 겪음.
 
* '''1911년 4월''': 군사적, 행정적 자립을 목표로 한 한인 자치기관인 경학사를 조직하고, 이상룡을 경학사장으로 추대.
 
* '''1911-1912년''': 대흉년으로 재정난에 빠져 경학사는 사실상 중지된다.
 
  
=== b. 신흥강습소 설립 ===
+
조선혁명간부학교가 운영되는 3년 동안, 중국 국민당은 매월 경상비 2,000~3,000원, 수시 필요경비 1,000~1만 원, 기타 운영비 400~1,000원 등 각종 운영자금 전액과 화기·탄약·피복 등을 지원했다. 학생들은 군사학뿐 아니라 별도 신설된 정치학, 자연과학을 포함해 경제학·사회학·철학·혁명학·물리학·화학·지리학까지 다양한 학문을 공부할 수 있었다.
* '''1911년 6월 10일''': 이회영 등은 구국 이념을 고취하고 독립운동의 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신흥강습소를 설립.
 
* 소장 이동녕과 김창환, 남상복, 이장녕, 이세영 등이 교관으로 활동하며 운영.
 
* '''1911년 4월''': 제1기 졸업생 40여명 배출.
 
  
== 신흥강습소 설립과 운영 ==
+
== '''의의''' ==
  
경학사 조직 후 이회영·이동녕·이관직·이상룡·윤기섭 등은 1911년 6월 10일(음력 5월 14일) 신흥강습소를 설립하였다. ‘신흥’이라 이름한 것은 신민회의 ‘신(新)’자와 다시 일어나는 구국투쟁이란 의미의 ‘흥(興)’자를 합친 것이다. 그리고 학교보다 등급이 낮은 강습소라고 한 것은 중국 당국과 일제 관헌들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당시 추가가 마을의 중국인들이 이들을 일본인의 앞잡이로 의심하며 제대로 협조해주지 않는 바람에 허름한 빈 집 옥수수 창고를 빌려 개교할 수밖에 없었다.  
+
조선혁명간부학교는 일제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하여 의열단과 중국 정부 사이에 형성된 한중연합의 결실이었다. 의열단은 중국 정부와 연대를 항일투쟁의 침체국면을 탈피할 수 있는 계기로 인식하였다. 따라서 의열단의 간부학교 운영은 국제적 연대 측면과 의열단 활동의 활성화라는 양면성을 가졌다.  
  
이렇게 열악한 시설로는 제대로 된 군사훈련과 교육을 시킬 수가 없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회영은 동삼성(東三省) 총독과 원세개(袁世凱)에게 청원을 한 끝에 토지매입에 대한 승낙을 얻어냈다. 그리하여 1912년 4월 합니하에 새로운 부지를 마련하여 공사한 끝에 7월 하순 낙성식을 가졌다. 새 교사는 학년별로 널찍한 강당과 교무실이 마련되었고, 내무반을 비롯한 사무실·숙직실·편집실·나팔반·식당·취사장·비품실 등이 갖추어지는 등 규모를 갖추었다. 합니하로 이전한 후 앞선 추가가 학교는 소학교 교육과정을 가르쳤고, 합니하 학교는 중학교 과정과 따로 군사과를 두어 무관을 양성하였다. 때문에 학생들은 합니하 학교를 ‘신흥 중학교’ 또는 ‘신흥무관학교’라고 부르거나 인식하였다. 그러나 공식명칭은 여전히 신흥 강습소였다.
 
  
=== c. 신흥강습소의 발전과 이동 ===
+
조선혁명간부학교의 교장인 김원봉은 개교사에서 간부학교의 설립 취지가 의열단의 항일 투쟁 정신을 계승하는 데 있음을 전제하고, 교육 목적은 군사학과 무기 사용법 등 군사 지식을 익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조선혁명간부학교의 교육 목표는 일본과의 총결전에서 투쟁의 주체가 될 조직을 구축하기 위한 선행 단계로서, 대중역량의 조직화와 체계화를 선도할 중견 간부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즉, 국지적·부분적 단계의 항일 투쟁 국면을 대중 투쟁의 단계로 발전시키는 방안이었음을 알 수 있다.
* '''1913년''': 삼원보에서 벽지인 통화현 제6구 합니하로 이전.
 
* 이석영이 자신의 전답 6000석을 매각하여 자금을 마련, 본관 건물을 준공.
 
* 합니하에서 소학교 교육과정을 제공하며, 중학교와 군사과를 통해 무관을 양성.
 
  
=== d. 신흥중학교와 신흥무관학교로의 발전 ===
 
* '''1913년''': 신흥강습소를 신흥중학교로 개칭하고 중학반과 군사반을 두어 군사 교육에 집중.
 
* '''1919년''': 유하현 고산자(孤山子)로 이전하여 신흥무관학교로 개교.
 
  
=== e. 신흥무관학교의 난관과 발전 ===
+
=== '''졸업생들의 활동''' ===
* 여러 사건으로 어려움을 겪으며, 이시영과 이동녕은 학교를 떠나게 되지만, 독립운동가들은 학교를 유지하려 노력.
 
* '''1919년 5월 3일''': 유하현 고산자 하동(河東) 대두자(大肚子)로 이전하여 학교 개교.
 
  
=== f. 신흥무관학교의 폐교 ===
+
간부학교 졸업생들은 민족혁명당의 항일투쟁체계로 편입되어 항일 투쟁을 이어나갔다. 일부는 [[조선의용대]]의 핵심 세력으로 성장하였고, 다른 일부는 [[한국광복군]]의 주요 무장 인력이 되기도 했다. 또한, [[조선의용대]]의 일원으로서 화북 지역으로 이동하여 화북조선동맹과 조선의용군에 가담하였다.
* '''1920년 1월''': 중국 당국의 탄압과 일본의 지원을 받은 중국 관헌의 압박으로 학교와 신문사 폐쇄.
 
* '''1920년 7월''': 중일 합동 수색대의 습격과 일제의 가중된 탄압으로 학교는 폐교됨.
 
  
== 신흥무관학교의 설립과 역할 ==
+
== 참고 자료 ==
 +
* 「조선혁명간부학교 (朝鮮革命幹部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2266 (검색일: 2024년 11월 30일).
 +
* 「김세광 (金世光)」,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3831 (검색일: 2024년 12월 2일).
 +
* 「신악 (申岳)」,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3817 (검색일: 2024년 12월 2일).
 +
*「왕통 (王通)」,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3818 (검색일: 2024년 12월 2일).
 +
* 김광재,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의 결성과 활동」,  『독립기념관』, https://www.i815.or.kr/upload/kr/magazine/magazine/83/post-919.html (검색일: 2024년 12월 2일)
 +
* 심용환, 「교육, 어둠을 밝힌 등불이 되다」,  『독립기념관』, https://www.i815.or.kr/upload/kr/magazine/magazine/4/post-38.html (검색일: 2024년 12월 2일)
 +
* 밀양독립운동기념관,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밀양독립운동기념관』, http://www.miryang815.or.kr/bbs/board.php?bo_table=data&wr_id=10 (검색일: 2024년 12월 2일)
  
=== a. 설립 당시 교직원 현황 ===
+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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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직원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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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위 !! 이름
 
|-
 
| 교장 || 이세영
 
|-
 
| 부교장 || 양규열
 
|-
 
| 학감 || 윤기섭
 
|-
 
| 훈련감 || 이장녕
 
|-
 
| 교관 || 박두희, 성준용, 백종렬, 오상세, 원병상
 
|}
 
 
 
=== b. 교육 과정 및 분교 운영 ===
 
* '''분교 위치'''
 
  * 통화현 쾌대모자(快大帽子)
 
  * 임강현 토애(臨江縣 土崖)
 
  * 해룡현 성수하자(聖水河子)
 
 
 
*'''교육 과정'''
 
  * 하사관반: 3개월 과정
 
  * 특별훈련반: 1개월 과정
 
  * 장교반: 6개월 과정
 
 
 
* '''교육 내용'''
 
  * 보병, 기병, 포병, 공병 등으로 나뉘어 육군형법, 편제학, 훈련교범, 측량학, 위수복무, 전략, 전술 등을 교육.
 
 
 
=== c. 군사 교육과 민족정신 교육 ===
 
* '''주 교육 내용''' : 군사 교육 중심, 일본군과 중국군의 병서를 윤기섭이 우리 실정에 맞게 수정하여 사용.
 
* '''민족정신 교육''' : 국어, 국사, 지리 교육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
 
 
 
=== d. 졸업생들의 활동 ===
 
* '''만주 지역''': 서로군정서, 북로군정서에서 핵심 간부로 활약.
 
* '''중국 본토''': 1919년 11월 길림에서 의열단 결성, 임시정부 산하 광복군에서 독립운동 전개.
 
 
 
== 참고 자료 ==
 
* 한국학중앙연구원,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 (검색일: 2024년 11월 17일).
 
* 국사편천위원회, "신흥무관학교[신흥 강습소]", 우리역사넷, http://www.history.go.kr (검색일: 2024년 11월 17일).
 
  
 
</onlyinclu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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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이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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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이민희]] [[분류:독립운동사의 근간, 교육구국운동(敎育救國運動)]]

2024년 12월 22일 (일) 01:16 기준 최신판

개요



조선혁명간부학교(朝鮮革命幹部學校)는 1932년 의열단(義烈團) 단장 김원봉(金元鳳)이 중국의 장제스(蔣介石)의 지원으로 독립운동 군사 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중국의 난징(南京)에 설립한 군사간부양성학교이다. 1932년 개교 이래 1935년 9월 폐교까지 1기생 26명, 2기생 55명, 3기생 44명 등 총 125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설립

1932년 단장 김원봉에 의해 중국의 난징에 설립되어, 당해 10월부터 1935년 9월에 이르는 3년여 동안 청년 투사를 양성했다.

주요 인물과 활동

인물 역할 및 기여
김원봉 단장, 조선혁명간부학교 설립
신악 조선혁명간부학교 교육 주임, 군사 훈련 담당, 의열단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추후 조선의용대 부대장, 한국광복군 중교 등을 역임
김세광 조선혁명간부학교 교관, 1933년 9월∼1934년 4월에 조선혁명간부학교 제2기 과정 교육을 담당하였으며 조선민족혁명당 중앙군사학 편찬위원으로 군사학 편찬에 종사
왕통 조선혁명간부학교 입학, 졸업 후 조선의용대 정치지도원, 조선민족혁명당 중앙위원,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 한국광복군 지대장으로 활동

배경

독립운동이 실질적인 항일 투쟁의 형태로 진행되기 위해서 한인 청년들이 군벌 산하의 군사학교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고자 노력했다. [1] 하지만, 명확한 결과가 나오지 못했다. 임시정부가 군사 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상하이에 세웠던 육군무관학교는 6개월간의 초급장교 양성과정에서 1920년 상반기 19명, 하반기 24명 배출을 끝으로 안타깝게 폐교했고, 임시정부 군무총장 노백린은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비행사양성소를 설립했으나 이 역시 비행대 편성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이렇게 무장 투쟁을 위한 시도가 무산되자, 1919년 조직된 무장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은 중국국민당과의 합작을 통해 돌파구를 마련하고자했다. 또한, 단원 상당수가 국민당과 함께 북벌에 참가했기 때문에 국민당 입장에서도 김원봉과 의열단을 지원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특징

조선혁명간부학교가 운영되는 3년 동안, 중국 국민당은 매월 경상비 2,000~3,000원, 수시 필요경비 1,000~1만 원, 기타 운영비 400~1,000원 등 각종 운영자금 전액과 화기·탄약·피복 등을 지원했다. 학생들은 군사학뿐 아니라 별도 신설된 정치학, 자연과학을 포함해 경제학·사회학·철학·혁명학·물리학·화학·지리학까지 다양한 학문을 공부할 수 있었다.

의의

조선혁명간부학교는 일제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하여 의열단과 중국 정부 사이에 형성된 한중연합의 결실이었다. 의열단은 중국 정부와 연대를 항일투쟁의 침체국면을 탈피할 수 있는 계기로 인식하였다. 따라서 의열단의 간부학교 운영은 국제적 연대 측면과 의열단 활동의 활성화라는 양면성을 가졌다.


조선혁명간부학교의 교장인 김원봉은 개교사에서 간부학교의 설립 취지가 의열단의 항일 투쟁 정신을 계승하는 데 있음을 전제하고, 교육 목적은 군사학과 무기 사용법 등 군사 지식을 익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조선혁명간부학교의 교육 목표는 일본과의 총결전에서 투쟁의 주체가 될 조직을 구축하기 위한 선행 단계로서, 대중역량의 조직화와 체계화를 선도할 중견 간부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즉, 국지적·부분적 단계의 항일 투쟁 국면을 대중 투쟁의 단계로 발전시키는 방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졸업생들의 활동

간부학교 졸업생들은 민족혁명당의 항일투쟁체계로 편입되어 항일 투쟁을 이어나갔다. 일부는 조선의용대의 핵심 세력으로 성장하였고, 다른 일부는 한국광복군의 주요 무장 인력이 되기도 했다. 또한, 조선의용대의 일원으로서 화북 지역으로 이동하여 화북조선동맹과 조선의용군에 가담하였다.

참고 자료

각주

  1. 신규식이나 여운형은 중국의 우페이푸(吳佩孚) 등이 지휘하는 군벌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우페이푸는 친한파 군벌 중 하나로서, 중국군이 한국을 거쳐 일본에 진공해야 함을 주장했는데, 이러한 측면에서 여운형 등이 활동했던 한국노병회와 뜻이 맞아 교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