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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궤와 고속열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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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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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판으로 찍어내는 형태의 지도이며, 대동여지도 형태의 22첩과 동여도의 특징을 따른 목록 1첩으로 총 23첩으로 구성되 병풍처럼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다. 전체를 펼치면 그 크기가 가로 4m×세로 7m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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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에서 주요 행사가 있을 때 그 행사의 준비와 과정들을 정리한 기록물인 의궤이다. 같은 내용의 의궤가 분상용 의궤<ref>기록을 보관하는 춘추관이나 지방에 위치한 사고에 보관할 용도로 제작한 의궤이다.</ref>와 어람용 의궤<ref>왕에게 진상하고 규장각에 보관할 용도로 만들어진 의궤이다. 분상용 의궤에 비해 좋은 품질의 재료를 사용하여 제작하였다.</ref>로 나뉘어 여러개가 제작되었는데, 병인양요 때 반출되었다가 반환한 것은 어람용 의궤이다.
  
 
====내용====
 
====내용====
이 대동여지도 판본의 가장 큰 특징은 대동여지도 목판본에 동여도의 지리 정보를 필사했다는 것이다. 목판 지도인 대동여지도와는 달리, 동여도는 손으로 그린 지도이기 때문에 동여도에는 당시의 교통로, 군사 시설 등의 지리 정보와 1만8000개의 지명이 담겨 더욱 자세한 정보를 알 수 있었다. 즉 대동여지도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만들어진 지도로 추정된다. 다만 필체가 김정호와 다르고 인물을 특정할 만한 단서가 없어 이 지도가 만들어진 시기와 필사한 인물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딱 4부만 발행된 동여도의 내용을 입수할 수 있었던 고위층 인물이 제작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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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 22년 정조의 후궁이었던 수빈 박씨의 장례 절차와 묘소인 휘경원을 조성하는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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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출 경위====
 
====유출 경위====
  
정확한 유출 경위는 알 수 없으나, 조선 국경에 위치한 백두산정계비와 주요 군사시설 간 거리가 표기돼 있고 울릉도 일대가 묘사된 14첩에는 울릉도행 배가 떠나는 위치가 적혀 있는 등의 특징을 볼 때 무역상인 등이 사용하였고 이 과정에서 유출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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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공격하는 와중 강화행궁과 외규장각에 불을 지르고, 휘경원원소도감의궤를 비롯한 외규장각 의궤들을 약탈해 갔다. 그 후 프랑스 국립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었다.
  
 
====환수 과정====
 
====환수 과정====
  
이 지도를 소장하고 있던 일본인이 매도 의사를 밝히자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은 2022년 7월 일본의 고서점이 대동여지도를 소장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뒤, 자료 검토와 전문가 평가 등을 거쳐 복권기금으로 지도를 구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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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FRANCE)]] 국립 도서관 사서로 일하던 박병선 박사가 수장고에 외규장각 의궤들이 보관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고, 반환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당시 프랑스 대통령이던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이 1993년 9월 방한하여 김영삼 대통령에게 직접 외규장각 의궤 중 권을 건네주었고, 의궤가 바로 휘경원원소도감의궤였다.
  
 
====의미와 중요성====
 
====의미와 중요성====
  
문화재청<ref>현 국가유산청</ref>은 지도에 대해 “대동여지도와 동여도를 합친 지도가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조선의 지도 제작 기술을 살펴볼 수 있는 매우 희귀한 연구 자료”라며 “대동여지도가 보급되면서 변화된 형태로 추정된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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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규장각 의궤 환수는 한국 내에서는 문화재의 중요성을 재인식하게 하고, 이를 보호하기 위한 법적·제도적 노력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많은 문화유산들을 환수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과 문화재 보존에 관한 법률들도 때 개정되거나 만들어졌다. 또한 전 세계적으로는 약탈 문화재 반환 문제를 논의하는 데 있어 중요한 사례가 되어, 각국은 과거의 제국주의적 약탈에 대한 책임을 인식하고, 문화재 반환에 대한 국제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환수에 참여한 복권 기금은 이미 다양한 공익 활동에 참여해 왔었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번 대동여지도 환수 과정에 복권 기금이 참여한 것은 화제성이 높은 문화유산을 통해 복권 기금의 공익 활동을 홍보할 뿐만 아니라 향후 복권 기금과 문화유산 환수 사업의 협력에 탄력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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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규장각 의궤의 반환 방법이 ‘5년마다 자동 갱신 임대’(휘경원원소도감의궤는 3년)’로 독특한 반환의 방법이다. 이는 ‘문화유산 반환’이라는 표현은 프랑스 국내법상 사용할 수 없고, ‘영구임대’는 당시 의궤를 소장하던 프랑스 국립 도서관 사서들이 반대한다는 이유로 저런 이상한 형식으로 환수하게 된 것이다. 심지어 갱신 기간마다 프랑스에게 임대료까지 지불해야하는 조건이다. 이를 두고 당시에도 ‘문화유산이 한국 땅으로 들어왔으니 실리적으로 성공한 협상이다’라는 의견과 ‘소유권을 완전히 가져오지 못한 실패한 협상이다.’라는 의견이 대립하였습다. 이후에 환수된 문화유산들의 경우에도 매입이나 기증으로 소유권을 완전히 되찾은 경우도 있지만 임대의 형식으로 가져온 것들도 많다. 문화유산 환수 과정에서‘실리’와‘명분'사이에 무엇을 선택해야 옳은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남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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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존====
 
====보존====
  
국립고궁박불관 수장고에 보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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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 중앙 연구원 장서각에서 소장하고 있다.
  
 
====전시와 연구====
 
====전시와 연구====
  
최근에 환수 받은 문화유산인 만큼 여전히 전문가들의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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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환수에서 워낙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 사례이기 때문에 꾸준히 학자들에게 연구되었으며, 연구 결과도 대중들에게 바로바로 공개되었다.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에서 2023년 5월16일부터 6월18일까지 기획전시실에서 '다시 마주한 우리 땅, 돌아온 대동여지도' 특별공개전을 개최하여 대중들에게 공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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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부 때 모든 외규장각 의궤가 한국으로 돌아오자 2011년 7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외규장각 의궤 특별전'개최하여 전시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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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cc3333">관련 에피소드</font>===
 
===<font color="#cc3333">관련 에피소드</font>===
  
====김정호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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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궤와 고속열차====
김정호는 평생을 지도 제작에 매달렸다. 가장 잘 알려진 <대동여지도> 외에도 <동여도>, <청구도>, <수선전도>, <지구전후도> 등의 지도를 제작했으며, 중 다수가 보물<ref>대한민국의 보물: 유형문화유산 중에서 역사적, 학술적, 예술적, 기술적 가치가 큰 것을 문화유산심의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정부가 지정하는 것이며 국보 다음 가는 격을 가진다.</ref>로 지정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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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프랑스가 이 의궤들을 돌려준 이유에 대해서 재밌는 추정이 있다. 바로 기차를 팔기 위해서 였다는 추정이다. 당시 경기 침체로 미테랑 대통령의 지지율이 크게 떨어진 상황에서<ref>사회당 출신의 좌파 대통령으로서 국유화, 국가 주도 경기부양 등 정책을 펼쳤으나 경제적인 효과가 미미하여 지지율이 하락했다.</ref>, 미테랑 대통령이 외규장각 의궤 반환을 미끼로 한국에 프랑스 기차를 팔아 이익을 얻으려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한국을 대표하는 열차인 KTX가 이 때 만들어졌는데, 프랑스 고속열차 TGV의 기술을 수입해서 만든 것이다. 거기에 당시 프랑스 내부에서 의궤 반환에 반대하는 목소리까지 있던 상황이라 미테랑이 굳이 반환을 약속한 것에 대해 이러한 일종의 뒷거래가 있지 않았겠냐는 추정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ref>이런 추정이 진실인지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관련 기사가 여럿 존재하고, 프랑스의 문화유산 반환은 대부분 외교적, 경제적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만큼 어느정도 신빈성이 있는 추정이라고 볼 수 있다. <del>당시에 프랑스에서 유학하던 고려대 불어불문학과 교수님들도 추정을 진실이라고 믿고 자주 언급하실 정도이다...</del></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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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cc3333">자료 출처</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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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cc3333">참고 문헌</font>===
[https://www.ytn.co.kr/_ln/0106_202303310005212312 YT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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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904464&CMPT_CD=P0010&utm_source=naver&utm_medium=newsearch&utm_campaign=naver_news 오마이뉴스, 2023, 「14년 전 외규장각 의궤를 안아본 사람입니다 서울에서 재회한 '파리의 연인'... '외규장각 의궤, 그 고귀함의 의미' 특별전 3월 19일까지」]
  
[https://www.khan.co.kr/article/202303300905001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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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incheontoday.com/news/articleView.html?idxno=255758 인천투데이, 2024, 「박병선 박사, 프랑스서 외규장각 의궤 발견」]
  
[https://www.newsis.com/view/?id=NISX20230516_0002304271&cID=10701&pID=10700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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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1993/09/16/1993091670106.html 조선일보, 1993, 「옛문서 1권 전달/순조때 휘경원원소도감의궤 /미테랑,김대통령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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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mk.co.kr/news/culture/4956984 매일경제, 2011, 「`145년만의 귀환` 展…외규장각 의궤 특별전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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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9C%98%EA%B2%BD%EC%9B%90%EC%9B%90%EC%86%8C%EB%8F%84%EA%B0%90%EC%9D%98%EA%B6%A4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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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푸루리]]

2024년 12월 21일 (토) 01:01 기준 최신판

기본정보

외규장각의궤

환수일자 1993.09.16
환수주체 김영삼 정부
환수경로 대여(프랑스)
제작시기 조선시대
형태 문서
현 소장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 중앙 연구원 장서각


조선 왕조 왕실 의궤이자, 외규장각에 보관되던 외규장각 의궤이다.



외관

형태

국가에서 주요 행사가 있을 때 그 행사의 준비와 과정들을 정리한 기록물인 의궤이다. 같은 내용의 의궤가 분상용 의궤[1]와 어람용 의궤[2]로 나뉘어 여러개가 제작되었는데, 병인양요 때 반출되었다가 반환한 것은 어람용 의궤이다.

내용

순조 22년 정조의 후궁이었던 수빈 박씨의 장례 절차와 묘소인 휘경원을 조성하는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유출과 환수 스토리

유출 경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공격하는 와중 강화행궁과 외규장각에 불을 지르고, 휘경원원소도감의궤를 비롯한 외규장각 의궤들을 약탈해 갔다. 그 후 프랑스 국립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었다.

환수 과정

프랑스(FRANCE) 국립 도서관 사서로 일하던 박병선 박사가 수장고에 외규장각 의궤들이 보관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고, 반환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당시 프랑스 대통령이던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이 1993년 9월 방한하여 김영삼 대통령에게 직접 외규장각 의궤 중 한 권을 건네주었고, 이 의궤가 바로 휘경원원소도감의궤였다.

의미와 중요성

외규장각 의궤 환수는 한국 내에서는 문화재의 중요성을 재인식하게 하고, 이를 보호하기 위한 법적·제도적 노력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많은 문화유산들을 환수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과 문화재 보존에 관한 법률들도 이 때 개정되거나 만들어졌다. 또한 전 세계적으로는 약탈 문화재 반환 문제를 논의하는 데 있어 중요한 사례가 되어, 각국은 과거의 제국주의적 약탈에 대한 책임을 인식하고, 문화재 반환에 대한 국제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외규장각 의궤의 반환 방법이 ‘5년마다 자동 갱신 임대’(휘경원원소도감의궤는 3년)’로 독특한 반환의 방법이다. 이는 ‘문화유산 반환’이라는 표현은 프랑스 국내법상 사용할 수 없고, ‘영구임대’는 당시 의궤를 소장하던 프랑스 국립 도서관 사서들이 반대한다는 이유로 저런 이상한 형식으로 환수하게 된 것이다. 심지어 갱신 기간마다 프랑스에게 임대료까지 지불해야하는 조건이다. 이를 두고 당시에도 ‘문화유산이 한국 땅으로 들어왔으니 실리적으로 성공한 협상이다’라는 의견과 ‘소유권을 완전히 가져오지 못한 실패한 협상이다.’라는 의견이 대립하였습다. 이후에 환수된 문화유산들의 경우에도 매입이나 기증으로 소유권을 완전히 되찾은 경우도 있지만 임대의 형식으로 가져온 것들도 많다. 문화유산 환수 과정에서‘실리’와‘명분'사이에 무엇을 선택해야 옳은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남기게 되었다.



환수 후의 활용과 보존

보존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 중앙 연구원 장서각에서 소장하고 있다.

전시와 연구

문화유산 환수에서 워낙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 사례이기 때문에 꾸준히 학자들에게 연구되었으며, 연구 결과도 대중들에게 바로바로 공개되었다.

이명박 정부 때 모든 외규장각 의궤가 한국으로 돌아오자 2011년 7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외규장각 의궤 특별전'을 개최하여 전시되기도 하였다.



관련 에피소드

의궤와 고속열차

먼저 프랑스가 이 의궤들을 돌려준 이유에 대해서 재밌는 추정이 있다. 바로 기차를 팔기 위해서 였다는 추정이다. 당시 경기 침체로 미테랑 대통령의 지지율이 크게 떨어진 상황에서[3], 미테랑 대통령이 외규장각 의궤 반환을 미끼로 한국에 프랑스 기차를 팔아 이익을 얻으려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한국을 대표하는 열차인 KTX가 이 때 만들어졌는데, 프랑스 고속열차 TGV의 기술을 수입해서 만든 것이다. 거기에 당시 프랑스 내부에서 의궤 반환에 반대하는 목소리까지 있던 상황이라 미테랑이 굳이 반환을 약속한 것에 대해 이러한 일종의 뒷거래가 있지 않았겠냐는 추정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4]



참고 문헌

오마이뉴스, 2023, 「14년 전 외규장각 의궤를 안아본 사람입니다 서울에서 재회한 '파리의 연인'... '외규장각 의궤, 그 고귀함의 의미' 특별전 3월 19일까지」

인천투데이, 2024, 「박병선 박사, 프랑스서 외규장각 의궤 발견」

조선일보, 1993, 「옛문서 1권 전달/순조때 휘경원원소도감의궤 /미테랑,김대통령방문」

매일경제, 2011, 「`145년만의 귀환` 展…외규장각 의궤 특별전시회」

위키백과



외부 링크

국가유산청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국립고궁박물관



  1. 기록을 보관하는 춘추관이나 지방에 위치한 사고에 보관할 용도로 제작한 의궤이다.
  2. 왕에게 진상하고 규장각에 보관할 용도로 만들어진 의궤이다. 분상용 의궤에 비해 좋은 품질의 재료를 사용하여 제작하였다.
  3. 사회당 출신의 좌파 대통령으로서 국유화, 국가 주도 경기부양 등 정책을 펼쳤으나 경제적인 효과가 미미하여 지지율이 하락했다.
  4. 이런 추정이 진실인지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관련 기사가 여럿 존재하고, 프랑스의 문화유산 반환은 대부분 외교적, 경제적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만큼 어느정도 신빈성이 있는 추정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시에 프랑스에서 유학하던 고려대 불어불문학과 교수님들도 이 추정을 진실이라고 믿고 자주 언급하실 정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