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익李容翊"의 두 판 사이의 차이

dh_edu
이동: 둘러보기, 검색
(생애)
(생애)
42번째 줄: 42번째 줄:
 
<br/>
 
<br/>
 
'''3. 정계 진출'''<br/>
 
'''3. 정계 진출'''<br/>
 +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 때, 명성황후를 장호원으로 피신시키고 명성황후와 민영익 사이에서 연락책의 역할을 한다. 이러한 공을 인정 받아 감역(監役)으로 임명된다.
  
 
==평가==
 
==평가==

2024년 12월 20일 (금) 05:54 판

기본정보



약력

[이용익 약력[1]]
일자 직무
1882년 감역(監役) 벼슬
1882년~1887년 단천부사, 북청부사, 영흥부사[2]
1887년 함경남도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1894년 함경도 광무(鑛務) 관리[3], 함경남도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1896년 여러 지역의 광산을 관리하는 임무를 맡음, 평안북도관찰사(觀察使)
1897년 중추원(中樞院) 의관(議官), 탁지부(度支部) 전환국장, 유배
1899년 내장원경(內藏院卿)

생애

1. 출생
1854년 1월 6일, 함경북도 명천(鳴川)에서 아버지 이병효(李秉斅)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2. 성장

  • 5~15세까지 서당에서 한학(漢學)을 수학하였다.
  • 20대초까지 주자학자 초병덕(楚秉悳)의 지도로 학문을 배웠다.
  • 21세에 학문을 그만두고 고향을 떠났다.
  • 이후 정계에 진출 전까지 보부상(褓負商)이나 물장수로 일하며 돈을 모으고, 함경남도 단천에서 금광에 투자하여 큰 돈을 벌었다는 추측이 가장 지배적이다.


3. 정계 진출

  •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 때, 명성황후를 장호원으로 피신시키고 명성황후와 민영익 사이에서 연락책의 역할을 한다. 이러한 공을 인정 받아 감역(監役)으로 임명된다.

평가

각주

  1. 보부상 출신에서 대한제국의 실세로, 우리역사넷,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n403900&code=kc_age_40, 접속일: 2024. 12. 20. 해당 페이지의 내용을 정리하였다.
  2. 광무감리(鑛務監理)를 겸임함.
  3.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의 임명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