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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립운동이 실질적인 항일 투쟁의 형태로 진행되기 위해서 한인 청년들이 군벌 산하의 군사학교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고자 노력했다. <ref> 신규식이나 여운형은 중국의 우페이푸(吳佩孚) 등이 지휘하는 군벌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우페이푸는 친한파 군벌 중 하나로서, 중국군이 한국을 거쳐 일본에 진공해야 함을 주장했는데, 이러한 측면에서 여운형 등이 활동했던 한국노병회와 뜻이 맞아 교섭하였다. </ref> 하지만, 명확한 결과가 나오지 못했다. 임시정부가 군사 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상하이에 세웠던 육군무관학교는 6개월간의 초급장교 양성과정에서 1920년 상반기 19명, 하반기 24명 배출을 끝으로 안타깝게 폐교했고,. 임시정부 군무총장 노백린은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비행사양성소를 설립했으나 이 역시 비행대 편성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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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렇게 무장 투쟁을 위한 시도가 무산되자, 1919년 조직된 무장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은 중국국민당과의 합작을 통해 돌파구를 마련하고자했다. 또한, 단원 상당수가 국민당과 함께 북벌에 참가했기 때문에 국민당 입장에서도 김원봉과 의열단을 지원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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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2일 (월) 11:06 판
개요
조선혁명간부학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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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朝鮮革命軍事政治幹部學校 | |
설립일 | 1932년 | |
설립자 | 김원봉(金元鳳) | |
설립위치 | 난징(南京)교외 선사묘(善祠廟) | |
계승 | 민족혁명당 군사부 훈련반 | |
관련링크 | http://www.miryang815.or.kr/bbs/board.php?bo_table=data&wr_id=10 |
조선혁명간부학교(朝鮮革命幹部學校)는 1932년 의열단(義烈團) 단장 김원봉(金元鳳)이 중국의 장제스(蔣介石)의 지원으로 독립운동 군사 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중국의 난징(南京)에 설립한 군사간부양성학교이다. 1932년 개교 이래 1935년 9월 폐교까지 1기생 26명, 2기생 55명, 3기생 44명 등 총 125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설립
배경
독립운동이 실질적인 항일 투쟁의 형태로 진행되기 위해서 한인 청년들이 군벌 산하의 군사학교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고자 노력했다. [1] 하지만, 명확한 결과가 나오지 못했다. 임시정부가 군사 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상하이에 세웠던 육군무관학교는 6개월간의 초급장교 양성과정에서 1920년 상반기 19명, 하반기 24명 배출을 끝으로 안타깝게 폐교했고,. 임시정부 군무총장 노백린은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비행사양성소를 설립했으나 이 역시 비행대 편성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이렇게 무장 투쟁을 위한 시도가 무산되자, 1919년 조직된 무장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은 중국국민당과의 합작을 통해 돌파구를 마련하고자했다. 또한, 단원 상당수가 국민당과 함께 북벌에 참가했기 때문에 국민당 입장에서도 김원봉과 의열단을 지원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특징
의의
졸업생들의 활동
- 만주 지역: 서로군정서, 북로군정서에서 핵심 간부로 활약.
- 중국 본토: 1919년 11월 길림에서 의열단 결성, 임시정부 산하 광복군에서 독립운동 전개.
참고 자료
- 한국학중앙연구원,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 (검색일: 2024년 11월 17일).
- 국사편천위원회, "신흥무관학교[신흥 강습소]", 우리역사넷, http://www.history.go.kr (검색일: 2024년 11월 1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