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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한국전쟁국군.jpeg|500px|한국전쟁국군]]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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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냉전 종식.jpg|500px|냉전 종식]] </br>
한국전쟁 당시 대한민국 국군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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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부시 대통령(왼쪽)과 소련의 고르바초프(오른쪽) 서기장의 모습이다.
  
 
==개요==
 
==개요==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위 38°선 전역에 걸쳐 북한군이 불법 남침함으로써 발발한 전쟁이다. 광복 후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의 신탁 통치에 이어서 남북에 별개의 정부가 수립되었는데, 막강한 군사력을 갖춘 북한이 통일을 명분으로 남침하였다.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이루어지면서 전쟁이 중지되었다. 한민족 전체에 큰 손실을 끼쳤고 이후 남북분단이 더욱 고착화되어 아직도 휴전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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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칙적으로는 탈냉전 시기 이전 냉전이 종식되어가는 시기를 가리키나, 대한민국의 국제 관계 서술을 위하여 탈냉전 시기까지 포함하였다. 탈냉전 시기는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공산권의 붕괴와 함께 냉전이 종식되면서 나타난 시대를 가리킨다. 시기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나, 대체로 대한민국의 제6공화국 시작과 맞물린다고 볼 수 있다.
  
 
==배경==
 
==배경==
===전후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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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슨 독트린===
38선을 경계로 남북한은 미소 양군에 의하여 분할, 점령되었고 한반도에 5년 간 신탁통치를 실시할 것을 합의하였다. 이에 대해 한국 내 반대 의견이 있었고 미소공동위원회가 두 차례에 걸쳐 개최되지만 마땅한 결론 없이 협상이 모두 결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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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에서 상당한 피해를 입은 후, 미국의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미국이 소련을 군사적으로 압도하지 못한다는 판단 아래 세계에서 미국의 역할을 이전보다 축소시키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외교정책을 타국 분쟁에 직접 개입하는 방식에서 동맹구과의 협력을 통해 간접 개입하는 것으로 선회하였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47년 9월에 미국은 소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국 문제를 일방적으로 유엔에 제기하였고, 유엔에서는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의하였지만 북한을 점령한 소련 측에서 총선거 위원단 입국을 거절하며 남북한 총선거가 아닌 선거 감시가 가능한 지역, 즉 남한만의 총선거가 행해지게 되었다. 이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유엔 총회에서는 해당 정부를 합법 정부로 승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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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앞으로 베트남전쟁과 같은 군사적 개입을 피한다.
  
한편, 북한에서는 김일성을 중심으로 선거를 실시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정부를 선포했고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의 나라들이 이를 승인하며 한반도에 남북한 별개의 정부가 설립된다. 북한은 이후 미소 양군의 철병을 요청하였고, 소련의 빠른 철병에 이어 미군 역시 남한에서 철병을 완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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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미국은 아시아 제국(諸國)과의 조약상 약속을 지키지만, 강대국의 핵에 의한 위협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내란이나 침략에 대하여 아시아 각국이 스스로 협력하여 그에 대처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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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군사력 증강===
 
정부 수립 이후 북한은 소련에 의한 계획적인 군사력 증강에 박차를 가하여 소련군 철병 당시 이미 상당한 군사 조직을 형성하였다. 1949년에는 소련과 북한, 중공과 북한 간에 비밀군사협정 및 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었다. 막강한 군사력을 갖추게 된 김일성은 무력통일을 구상하게 된다.
 
  
반면 남한에서도 기존 미군정 산하의 국방경비대와 해안경비대를 국군으로 개편하고 해병대와 공군 역시 신규 편성하였으나, 장비가 빈약하여 북한의 군사력에 비하면 한참 뒤떨어지는 수준에 그쳤다. 또한 국군 세력 중 절반에 가까운 세력은 공산게릴라 소탕에 여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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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미국은 ‘태평양 국가’로서 그 지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계속하지만 직접적·군사적인 또는 정치적인 과잉개입은 하지 않으며 자조(自助)의 의사를 가진 아시아 제국의 자주적 행동을 측면 지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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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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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아시아 제국에 대한 원조는 경제중심으로 바꾸며 다수국간 방식을 강화하여 미국의 과중한 부담을 피한다.
[[파일:한국전쟁 진행.jpeg|500px|한국전쟁 진행]] </br>
 
  
  1950.06.25 북한, 38선 전역에 걸친 국군 방어진지 기습공격 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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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⑤ 아시아 제국이 5∼10년의 장래에는 상호안전보장을 위한 군사기구를 만들기를 기대한다.
  
1950.09.15 유엔군, 인천상륙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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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국의 안보는 스스로 우선적으로 지켜야 한다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후 미국은 공산주의 진영에 대해 우호적 태도를 취했고, 이후 1972년 미국과 중국의 회담이 이어지면서 본격적으로 냉전 종식이 시작되었다.
1950.10 유엔군, 평양을 수복하고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진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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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11 중공군 개입
 
 
 
1951.07 개성에서 휴전회담 시작
 
 
 
1952.10 공산측의 비타협적인 태도를 문제로 유엔군 사령부 회담 중지
 
 
 
1953.07.27 판문점에서 유엔군 사령관과 공산군 사령관 간 휴전이 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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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 종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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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타 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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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12월에 미국 대통령 조지 부시와 소련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 간의 미소정상회담을 가리킨다. 미국과 소련 간 적대 행위의 중단을 그 내용으로 하며, 공식적으로 냉전을 종식시킨 회담으로 평가받는다. 이 회담에서 미소 양국 간 공식적으로 조인된 조약은 없으나, 양국 모두 군비 축소 및 군사 규모 축소, 미소 간 평화와 화합, 경제협력, 남미와 중동의 지역분쟁해소 등에 대해 동의하였다. 비록 여러 현안에 대해 원칙적인 의견을 교환한 것이며 구체적 협의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으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새로운 국제질서의 방향을 제시한 회담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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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권의 붕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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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일 고르바초프 집권 당시 소련의 경제 체계는 굉장히 약화되어 있었다. 소련 경제 개선을 위해 1987년부터 다양한 개혁을 시도하였지만 쉽지 않았다. 이 틈을 타서 1989년 동독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이에 따라 바르샤바 조약기구 국가들의 붕괴가 시작되었다. 같은 해에 우크라이나가 독립하였고, 폴란드, 루마니아, 체코, 유고슬라비아 등 동유럽 국가들은 1990년 들어 점차 자유선거르 시행하고 전후 체제에서 일탈하였으며, 알바니아에서도 1991년 자유선거가 이뤄지며 탈공산화를 이룩했다. 소련 역시 1991년 소련 건국의 주요자들이 퇴직하며 해체 수순을 밟았고, 냉전의 두 주체 중 하나였던 소련이 사라지면서 냉전이 공식적으로 종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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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향==
 
==영향==
한국전쟁은 한민족 전체에게 엄청난 재해를 일으켰다. 남북한을 합쳐 인적 피해만 약 300만 명 가까이 사망 또는 실종되었고, 전쟁에 참여했던 지원국 군대 역시 많은 인원이 사상 피해를 입었다. 많은 문화재가 소실되었고, 경제적 피해 역시 양측 모두에게 말할 것도 없이 막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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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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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대한민국 또한 1990년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이 시행되고 있었고, 냉전의 종식 분위기에 따라 대한민국과 소련은 갈등 관계를 해소 후 수교하게 된다. 또한 그동안 한국의 UN 가입에 반대하던 소련이 한소수교로 인해 더 이상 가입을 반대하지 않음으로써 1991년 한국의 UN 가입 또한 이루어졌다. 이후 소련이 해체하며 한소수교는 한러수교로 승계되게 된다.
해당 문서가 정치교류사에 대해 다루고 있는 만큼, 전쟁 이후 대한민국의 국제 관계에 미친 영향을 중점적으로 서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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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우선 미국에 대해서는, 국민들 사이에서 미국을 구원자로 여기는 절대적 믿음이 심어지고 미국과의 동맹관계가 국가 안보의 필수 조건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휴전 이후 친미외교는 더욱 강화되었으며 대한민국은 미국의 대외정책을 철저히 지켰다. 미국과의 우호 관계의 연장선으로 유엔에 대한 믿음 역시 두터워졌다. 유엔의 도움으로 인해 북한으로부터 대한민국이 살아남았다는 인식이 강하게 뿌리내려 당시 유엔창설일이 공휴일로 삼아지기까지 했으며, 유엔을 상대한 외교가 상당히 중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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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과의 수교에 이어 중국과의 수교 역시 이어졌다. 1991년 한국과 중국은 무역대표부를 설치해 새로운 교류의 시작을 알렸다. 중국과의 관계에 있어 걸림돌이 되던 남북관계는 1991년 남북한 UN 공동 가입 이후 남북한 기본합의서 채택에 따라 개선되었다. 이에 따라 1992년 4월에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수교 협상이 개시되었고 같은 해 8월 24일 수교를 확정지었다. 다만 한중수교의 후속 조치로 중국 측이 요구한 한국과 대만의 단교가 뒤따를 수 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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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소련과 중국에 대해서는 철저한 반공주의를 바탕으로 배척하였다. 냉전 종식 이전까지 소련 및 중국과의 교류는 아예 없다시피했다. 당시 정부는 대한민국의 국가 기반을 튼튼히 하기 위해서는 철저히 반공해야 한다는 극단적인 반공주의를 전면에 내세워 국내 정치에 활용하였다. 이는 때로 친미 인식을 능가하기까지 하였다. 예를 들어 미국이 소련과 평화공존을 지향하던 1950년대 말 당시 대한민국 정부는 이를 비판한 바 있다. 또한 인도와 같은 친서방 중립국가조차 완전한 자유주의 진영이 아니라면 용공시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1960년대 중반 이후 진정되었다.
 
 
 
 
==관련 영상==
 
==관련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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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rame width="910" height="512" src="https://www.youtube.com/embed/ovI5ATUN_jY" title="[#벌거벗은세계사] 한국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은 사람들✨ 탱크 하나 없이 열악했던 남한이 이길 수 있었던 이유 | #지금꼭볼동영상"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 referrerpolicy="strict-origin-when-cross-origin" allowfullscreen></ifr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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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참고문헌==
<<내용 전반에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214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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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슨 독트린과 몰타 회담, 한소수교에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078826&cid=40942&categoryId=31657 두산백과][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094301&cid=40942&categoryId=31659 두산백과]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67578&cid=40942&categoryId=33385 두산백과] 참조>>
<<한국전쟁 진행 과정에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33118&cid=40942&categoryId=31778 두산백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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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권 붕괴에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726927&cid=42140&categoryId=42140 21세기 정치학대사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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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 수교에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374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분류==
 
==분류==
 
[[분류:개항부터_현재까지의_정치_교류]] [[분류:소금토마토]]
 
[[분류:개항부터_현재까지의_정치_교류]] [[분류:소금토마토]]

2024년 6월 22일 (토) 22:11 기준 최신판

냉전 종식
미국의 부시 대통령(왼쪽)과 소련의 고르바초프(오른쪽) 서기장의 모습이다.

개요

원칙적으로는 탈냉전 시기 이전 냉전이 종식되어가는 시기를 가리키나, 대한민국의 국제 관계 서술을 위하여 탈냉전 시기까지 포함하였다. 탈냉전 시기는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공산권의 붕괴와 함께 냉전이 종식되면서 나타난 시대를 가리킨다. 시기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나, 대체로 대한민국의 제6공화국 시작과 맞물린다고 볼 수 있다.

배경

닉슨 독트린

베트남 전쟁에서 상당한 피해를 입은 후, 미국의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미국이 소련을 군사적으로 압도하지 못한다는 판단 아래 세계에서 미국의 역할을 이전보다 축소시키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외교정책을 타국 분쟁에 직접 개입하는 방식에서 동맹구과의 협력을 통해 간접 개입하는 것으로 선회하였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미국은 앞으로 베트남전쟁과 같은 군사적 개입을 피한다.
② 미국은 아시아 제국(諸國)과의 조약상 약속을 지키지만, 강대국의 핵에 의한 위협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내란이나 침략에 대하여 아시아 각국이 스스로 협력하여 그에 대처하여야 할 것이다.
③ 미국은 ‘태평양 국가’로서 그 지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계속하지만 직접적·군사적인 또는 정치적인 과잉개입은 하지 않으며 자조(自助)의 의사를 가진 아시아 제국의 자주적 행동을 측면 지원한다.
④ 아시아 제국에 대한 원조는 경제중심으로 바꾸며 다수국간 방식을 강화하여 미국의 과중한 부담을 피한다.
⑤ 아시아 제국이 5∼10년의 장래에는 상호안전보장을 위한 군사기구를 만들기를 기대한다.


각국의 안보는 스스로 우선적으로 지켜야 한다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후 미국은 공산주의 진영에 대해 우호적 태도를 취했고, 이후 1972년 미국과 중국의 회담이 이어지면서 본격적으로 냉전 종식이 시작되었다.

냉전 종식

몰타 회담

1989년 12월에 미국 대통령 조지 부시와 소련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 간의 미소정상회담을 가리킨다. 미국과 소련 간 적대 행위의 중단을 그 내용으로 하며, 공식적으로 냉전을 종식시킨 회담으로 평가받는다. 이 회담에서 미소 양국 간 공식적으로 조인된 조약은 없으나, 양국 모두 군비 축소 및 군사 규모 축소, 미소 간 평화와 화합, 경제협력, 남미와 중동의 지역분쟁해소 등에 대해 동의하였다. 비록 여러 현안에 대해 원칙적인 의견을 교환한 것이며 구체적 협의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으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새로운 국제질서의 방향을 제시한 회담으로 여겨진다.

공산권의 붕괴

미하일 고르바초프 집권 당시 소련의 경제 체계는 굉장히 약화되어 있었다. 소련 경제 개선을 위해 1987년부터 다양한 개혁을 시도하였지만 쉽지 않았다. 이 틈을 타서 1989년 동독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이에 따라 바르샤바 조약기구 국가들의 붕괴가 시작되었다. 같은 해에 우크라이나가 독립하였고, 폴란드, 루마니아, 체코, 유고슬라비아 등 동유럽 국가들은 1990년 들어 점차 자유선거르 시행하고 전후 체제에서 일탈하였으며, 알바니아에서도 1991년 자유선거가 이뤄지며 탈공산화를 이룩했다. 소련 역시 1991년 소련 건국의 주요자들이 퇴직하며 해체 수순을 밟았고, 냉전의 두 주체 중 하나였던 소련이 사라지면서 냉전이 공식적으로 종결되었다.

영향

러시아

당시 대한민국 또한 1990년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이 시행되고 있었고, 냉전의 종식 분위기에 따라 대한민국과 소련은 갈등 관계를 해소 후 수교하게 된다. 또한 그동안 한국의 UN 가입에 반대하던 소련이 한소수교로 인해 더 이상 가입을 반대하지 않음으로써 1991년 한국의 UN 가입 또한 이루어졌다. 이후 소련이 해체하며 한소수교는 한러수교로 승계되게 된다.

중국

소련과의 수교에 이어 중국과의 수교 역시 이어졌다. 1991년 한국과 중국은 무역대표부를 설치해 새로운 교류의 시작을 알렸다. 중국과의 관계에 있어 걸림돌이 되던 남북관계는 1991년 남북한 UN 공동 가입 이후 남북한 기본합의서 채택에 따라 개선되었다. 이에 따라 1992년 4월에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수교 협상이 개시되었고 같은 해 8월 24일 수교를 확정지었다. 다만 한중수교의 후속 조치로 중국 측이 요구한 한국과 대만의 단교가 뒤따를 수 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관련 영상

참고문헌

<<닉슨 독트린과 몰타 회담, 한소수교에 두산백과두산백과 두산백과 참조>> <<공산권 붕괴에 21세기 정치학대사전 참조>> <<한중 수교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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