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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의 부시 대통령(왼쪽)과 소련의 고르바초프(오른쪽) 서기장의 모습이다. | ||
+ | ==개요== | ||
+ | 원칙적으로는 탈냉전 시기 이전 냉전이 종식되어가는 시기를 가리키나, 대한민국의 국제 관계 서술을 위하여 탈냉전 시기까지 포함하였다. 탈냉전 시기는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공산권의 붕괴와 함께 냉전이 종식되면서 나타난 시대를 가리킨다. 시기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나, 대체로 대한민국의 제6공화국 시작과 맞물린다고 볼 수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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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닉슨 독트린=== | ||
+ | 베트남 전쟁에서 상당한 피해를 입은 후, 미국의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미국이 소련을 군사적으로 압도하지 못한다는 판단 아래 세계에서 미국의 역할을 이전보다 축소시키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외교정책을 타국 분쟁에 직접 개입하는 방식에서 동맹구과의 협력을 통해 간접 개입하는 것으로 선회하였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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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① 미국은 앞으로 베트남전쟁과 같은 군사적 개입을 피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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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② 미국은 아시아 제국(諸國)과의 조약상 약속을 지키지만, 강대국의 핵에 의한 위협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내란이나 침략에 대하여 아시아 각국이 스스로 협력하여 그에 대처하여야 할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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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③ 미국은 ‘태평양 국가’로서 그 지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계속하지만 직접적·군사적인 또는 정치적인 과잉개입은 하지 않으며 자조(自助)의 의사를 가진 아시아 제국의 자주적 행동을 측면 지원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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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④ 아시아 제국에 대한 원조는 경제중심으로 바꾸며 다수국간 방식을 강화하여 미국의 과중한 부담을 피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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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⑤ 아시아 제국이 5∼10년의 장래에는 상호안전보장을 위한 군사기구를 만들기를 기대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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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국의 안보는 스스로 우선적으로 지켜야 한다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후 미국은 공산주의 진영에 대해 우호적 태도를 취했고, 이후 1972년 미국과 중국의 회담이 이어지면서 본격적으로 냉전 종식이 시작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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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냉전 종식== | ||
+ | ===몰타 회담=== | ||
+ | 1989년 12월에 미국 대통령 조지 부시와 소련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 간의 미소정상회담을 가리킨다. 미국과 소련 간 적대 행위의 중단을 그 내용으로 하며, 공식적으로 냉전을 종식시킨 회담으로 평가받는다. 이 회담에서 미소 양국 간 공식적으로 조인된 조약은 없으나, 양국 모두 군비 축소 및 군사 규모 축소, 미소 간 평화와 화합, 경제협력, 남미와 중동의 지역분쟁해소 등에 대해 동의하였다. 비록 여러 현안에 대해 원칙적인 의견을 교환한 것이며 구체적 협의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으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새로운 국제질서의 방향을 제시한 회담으로 여겨진다. | ||
+ | ===공산권의 붕괴=== | ||
+ | 미하일 고르바초프 집권 당시 소련의 경제 체계는 굉장히 약화되어 있었다. 소련 경제 개선을 위해 1987년부터 다양한 개혁을 시도하였지만 쉽지 않았다. 이 틈을 타서 1989년 동독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이에 따라 바르샤바 조약기구 국가들의 붕괴가 시작되었다. 같은 해에 우크라이나가 독립하였고, 폴란드, 루마니아, 체코, 유고슬라비아 등 동유럽 국가들은 1990년 들어 점차 자유선거르 시행하고 전후 체제에서 일탈하였으며, 알바니아에서도 1991년 자유선거가 이뤄지며 탈공산화를 이룩했다. 소련 역시 1991년 소련 건국의 주요자들이 퇴직하며 해체 수순을 밟았고, 냉전의 두 주체 중 하나였던 소련이 사라지면서 냉전이 공식적으로 종결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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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향== | ||
+ | ===러시아=== | ||
+ | 당시 대한민국 또한 1990년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이 시행되고 있었고, 냉전의 종식 분위기에 따라 대한민국과 소련은 갈등 관계를 해소 후 수교하게 된다. 또한 그동안 한국의 UN 가입에 반대하던 소련이 한소수교로 인해 더 이상 가입을 반대하지 않음으로써 1991년 한국의 UN 가입 또한 이루어졌다. 이후 소련이 해체하며 한소수교는 한러수교로 승계되게 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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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 ||
+ | 소련과의 수교에 이어 중국과의 수교 역시 이어졌다. 1991년 한국과 중국은 무역대표부를 설치해 새로운 교류의 시작을 알렸다. 중국과의 관계에 있어 걸림돌이 되던 남북관계는 1991년 남북한 UN 공동 가입 이후 남북한 기본합의서 채택에 따라 개선되었다. 이에 따라 1992년 4월에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수교 협상이 개시되었고 같은 해 8월 24일 수교를 확정지었다. 다만 한중수교의 후속 조치로 중국 측이 요구한 한국과 대만의 단교가 뒤따를 수 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 ||
+ | </br> | ||
+ | ==관련 영상== | ||
+ | <html> | ||
+ | <iframe width="910" height="512" src="https://www.youtube.com/embed/U2a0Z3V_dOA" title="'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의 해체와 냉전 종식의 주역 KBS 080812 방송"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 referrerpolicy="strict-origin-when-cross-origin" allowfullscreen></iframe> | ||
+ | </html> | ||
+ | |||
+ | ==참고문헌== | ||
+ | <<닉슨 독트린과 몰타 회담, 한소수교에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078826&cid=40942&categoryId=31657 두산백과][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094301&cid=40942&categoryId=31659 두산백과]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67578&cid=40942&categoryId=33385 두산백과] 참조>> | ||
+ | <<공산권 붕괴에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726927&cid=42140&categoryId=42140 21세기 정치학대사전] 참조>> | ||
+ | <<한중 수교에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374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 ||
+ | |||
+ | ==분류== | ||
+ | [[분류:개항부터_현재까지의_정치_교류]] [[분류:소금토마토]] |
2024년 6월 22일 (토) 22:11 기준 최신판
미국의 부시 대통령(왼쪽)과 소련의 고르바초프(오른쪽) 서기장의 모습이다.
개요
원칙적으로는 탈냉전 시기 이전 냉전이 종식되어가는 시기를 가리키나, 대한민국의 국제 관계 서술을 위하여 탈냉전 시기까지 포함하였다. 탈냉전 시기는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공산권의 붕괴와 함께 냉전이 종식되면서 나타난 시대를 가리킨다. 시기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나, 대체로 대한민국의 제6공화국 시작과 맞물린다고 볼 수 있다.
배경
닉슨 독트린
베트남 전쟁에서 상당한 피해를 입은 후, 미국의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미국이 소련을 군사적으로 압도하지 못한다는 판단 아래 세계에서 미국의 역할을 이전보다 축소시키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외교정책을 타국 분쟁에 직접 개입하는 방식에서 동맹구과의 협력을 통해 간접 개입하는 것으로 선회하였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미국은 앞으로 베트남전쟁과 같은 군사적 개입을 피한다.
② 미국은 아시아 제국(諸國)과의 조약상 약속을 지키지만, 강대국의 핵에 의한 위협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내란이나 침략에 대하여 아시아 각국이 스스로 협력하여 그에 대처하여야 할 것이다.
③ 미국은 ‘태평양 국가’로서 그 지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계속하지만 직접적·군사적인 또는 정치적인 과잉개입은 하지 않으며 자조(自助)의 의사를 가진 아시아 제국의 자주적 행동을 측면 지원한다.
④ 아시아 제국에 대한 원조는 경제중심으로 바꾸며 다수국간 방식을 강화하여 미국의 과중한 부담을 피한다.
⑤ 아시아 제국이 5∼10년의 장래에는 상호안전보장을 위한 군사기구를 만들기를 기대한다.
각국의 안보는 스스로 우선적으로 지켜야 한다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후 미국은 공산주의 진영에 대해 우호적 태도를 취했고, 이후 1972년 미국과 중국의 회담이 이어지면서 본격적으로 냉전 종식이 시작되었다.
냉전 종식
몰타 회담
1989년 12월에 미국 대통령 조지 부시와 소련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 간의 미소정상회담을 가리킨다. 미국과 소련 간 적대 행위의 중단을 그 내용으로 하며, 공식적으로 냉전을 종식시킨 회담으로 평가받는다. 이 회담에서 미소 양국 간 공식적으로 조인된 조약은 없으나, 양국 모두 군비 축소 및 군사 규모 축소, 미소 간 평화와 화합, 경제협력, 남미와 중동의 지역분쟁해소 등에 대해 동의하였다. 비록 여러 현안에 대해 원칙적인 의견을 교환한 것이며 구체적 협의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으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새로운 국제질서의 방향을 제시한 회담으로 여겨진다.
공산권의 붕괴
미하일 고르바초프 집권 당시 소련의 경제 체계는 굉장히 약화되어 있었다. 소련 경제 개선을 위해 1987년부터 다양한 개혁을 시도하였지만 쉽지 않았다. 이 틈을 타서 1989년 동독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이에 따라 바르샤바 조약기구 국가들의 붕괴가 시작되었다. 같은 해에 우크라이나가 독립하였고, 폴란드, 루마니아, 체코, 유고슬라비아 등 동유럽 국가들은 1990년 들어 점차 자유선거르 시행하고 전후 체제에서 일탈하였으며, 알바니아에서도 1991년 자유선거가 이뤄지며 탈공산화를 이룩했다. 소련 역시 1991년 소련 건국의 주요자들이 퇴직하며 해체 수순을 밟았고, 냉전의 두 주체 중 하나였던 소련이 사라지면서 냉전이 공식적으로 종결되었다.
영향
러시아
당시 대한민국 또한 1990년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이 시행되고 있었고, 냉전의 종식 분위기에 따라 대한민국과 소련은 갈등 관계를 해소 후 수교하게 된다. 또한 그동안 한국의 UN 가입에 반대하던 소련이 한소수교로 인해 더 이상 가입을 반대하지 않음으로써 1991년 한국의 UN 가입 또한 이루어졌다. 이후 소련이 해체하며 한소수교는 한러수교로 승계되게 된다.
중국
소련과의 수교에 이어 중국과의 수교 역시 이어졌다. 1991년 한국과 중국은 무역대표부를 설치해 새로운 교류의 시작을 알렸다. 중국과의 관계에 있어 걸림돌이 되던 남북관계는 1991년 남북한 UN 공동 가입 이후 남북한 기본합의서 채택에 따라 개선되었다. 이에 따라 1992년 4월에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수교 협상이 개시되었고 같은 해 8월 24일 수교를 확정지었다. 다만 한중수교의 후속 조치로 중국 측이 요구한 한국과 대만의 단교가 뒤따를 수 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관련 영상
참고문헌
<<닉슨 독트린과 몰타 회담, 한소수교에 두산백과두산백과 두산백과 참조>> <<공산권 붕괴에 21세기 정치학대사전 참조>> <<한중 수교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