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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내용 전반에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214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
− | << | + | <<한국전쟁 진행 과정에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33118&cid=40942&categoryId=31778 두산백과]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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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6월 22일 (토) 21:19 기준 최신판
개요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위 38°선 전역에 걸쳐 북한군이 불법 남침함으로써 발발한 전쟁이다. 광복 후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의 신탁 통치에 이어서 남북에 별개의 정부가 수립되었는데, 막강한 군사력을 갖춘 북한이 통일을 명분으로 남침하였다.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이루어지면서 전쟁이 중지되었다. 한민족 전체에 큰 손실을 끼쳤고 이후 남북분단이 더욱 고착화되어 아직도 휴전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배경
전후 상황
38선을 경계로 남북한은 미소 양군에 의하여 분할, 점령되었고 한반도에 5년 간 신탁통치를 실시할 것을 합의하였다. 이에 대해 한국 내 반대 의견이 있었고 미소공동위원회가 두 차례에 걸쳐 개최되지만 마땅한 결론 없이 협상이 모두 결렬된다.
1947년 9월에 미국은 소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국 문제를 일방적으로 유엔에 제기하였고, 유엔에서는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의하였지만 북한을 점령한 소련 측에서 총선거 위원단 입국을 거절하며 남북한 총선거가 아닌 선거 감시가 가능한 지역, 즉 남한만의 총선거가 행해지게 되었다. 이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유엔 총회에서는 해당 정부를 합법 정부로 승인하였다.
한편, 북한에서는 김일성을 중심으로 선거를 실시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정부를 선포했고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의 나라들이 이를 승인하며 한반도에 남북한 별개의 정부가 설립된다. 북한은 이후 미소 양군의 철병을 요청하였고, 소련의 빠른 철병에 이어 미군 역시 남한에서 철병을 완료한다.
북한의 군사력 증강
정부 수립 이후 북한은 소련에 의한 계획적인 군사력 증강에 박차를 가하여 소련군 철병 당시 이미 상당한 군사 조직을 형성하였다. 1949년에는 소련과 북한, 중공과 북한 간에 비밀군사협정 및 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었다. 막강한 군사력을 갖추게 된 김일성은 무력통일을 구상하게 된다.
반면 남한에서도 기존 미군정 산하의 국방경비대와 해안경비대를 국군으로 개편하고 해병대와 공군 역시 신규 편성하였으나, 장비가 빈약하여 북한의 군사력에 비하면 한참 뒤떨어지는 수준에 그쳤다. 또한 국군 세력 중 절반에 가까운 세력은 공산게릴라 소탕에 여념이 없었다.
진행
1950.06.25 북한, 38선 전역에 걸친 국군 방어진지 기습공격 개시
1950.09.15 유엔군, 인천상륙작전
1950.10 유엔군, 평양을 수복하고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진격
1950.11 중공군 개입
1951.07 개성에서 휴전회담 시작
1952.10 공산측의 비타협적인 태도를 문제로 유엔군 사령부 회담 중지
1953.07.27 판문점에서 유엔군 사령관과 공산군 사령관 간 휴전이 조인
영향
한국전쟁은 한민족 전체에게 엄청난 재해를 일으켰다. 남북한을 합쳐 인적 피해만 약 300만 명 가까이 사망 또는 실종되었고, 전쟁에 참여했던 지원국 군대 역시 많은 인원이 사상 피해를 입었다. 많은 문화재가 소실되었고, 경제적 피해 역시 양측 모두에게 말할 것도 없이 막대했다.
해당 문서가 정치교류사에 대해 다루고 있는 만큼, 전쟁 이후 대한민국의 국제 관계에 미친 영향을 중점적으로 서술한다.
우선 미국에 대해서는, 국민들 사이에서 미국을 구원자로 여기는 절대적 믿음이 심어지고 미국과의 동맹관계가 국가 안보의 필수 조건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휴전 이후 친미외교는 더욱 강화되었으며 대한민국은 미국의 대외정책을 철저히 지켰다. 미국과의 우호 관계의 연장선으로 유엔에 대한 믿음 역시 두터워졌다. 유엔의 도움으로 인해 북한으로부터 대한민국이 살아남았다는 인식이 강하게 뿌리내려 당시 유엔창설일이 공휴일로 삼아지기까지 했으며, 유엔을 상대한 외교가 상당히 중시되었다.
반면 소련과 중국에 대해서는 철저한 반공주의를 바탕으로 배척하였다. 냉전 종식 이전까지 소련 및 중국과의 교류는 아예 없다시피했다. 당시 정부는 대한민국의 국가 기반을 튼튼히 하기 위해서는 철저히 반공해야 한다는 극단적인 반공주의를 전면에 내세워 국내 정치에 활용하였다. 이는 때로 친미 인식을 능가하기까지 하였다. 예를 들어 미국이 소련과 평화공존을 지향하던 1950년대 말 당시 대한민국 정부는 이를 비판한 바 있다. 또한 인도와 같은 친서방 중립국가조차 완전한 자유주의 진영이 아니라면 용공시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1960년대 중반 이후 진정되었다.
관련 영상
참고문헌
<<내용 전반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한국전쟁 진행 과정에 두산백과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