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의 두 판 사이의 차이

dh_edu
이동: 둘러보기, 검색
(진행)
(당시 한국 정치에 미친 영향)
38번째 줄: 38번째 줄:
 
</br>
 
</br>
  
==당시 한국 정치에 미친 영향==
+
==영향==
 +
한국전쟁은 한민족 전체에게 엄청난 재해를 일으켰다. 남북한을 합쳐 인적 피해만 약 300만 명 가까이 사망 또는 실종되었고, 전쟁에 참여했던 지원국 군대 역시 많은 인원이 사상 피해를 입었다. 많은 문화재가 소실되었고, 경제적 피해 역시 양측 모두에게 말할 것도 없이 막대했다.
  
베트남 전쟁 파병으로 인해 베트남 특수가 왔고 신흥 대기업이 성장하는 등 한국의 경제 성장은 가속화되었으나, 그 과정에서 군인이나 노동자에 대한 보상이 불충분한 문제가 발생하였다. 따라서, 박정희 정부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거나, 노동자들이 빌딩에 불을 지르는 등의 혼란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
해당 문서가 정치교류사에 대해 다루고 있는 만큼, 전쟁 이후 대한민국의 국제 관계에 미친 영향을 중점적으로 서술한다.
또한, 박정희 정부는 전투 파병 인원과 그로 인한 공백을 메울 인원을 모집하기 위해 21~30살의 청년들을 징병했다. 이 과정에서 징병 기피자들, 24살 이상 대학생들, 장기 휴학생들을 대상으로도 집요하게 징병하였고 예비역을 재입대 시키기도 했다. 이를 통해 박정희 정권에 불만을 품고 저항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세대 중 하나인 20대 남성 청년 세대에 대한 통제 시스템을 강화할 수 있었다. 또한, 원활한 징병 등 여러 이유를 근거로 주민등록법을 시행하여, 전 세대를 대상으로 통제를 강화했다. 이러한 통제 시스템은 차후 박정희 정권의 유신 개헌에 대한 반대를 용이하게 통제하도록 했고 독재 체제 강화 및 유지의 밑거름이 되었다.
+
 
 +
우선 미국에 대해서는, 국민들 사이에서 미국을 구원자로 여기는 절대적 믿음이 심어지고 미국과의 동맹관계가 국가 안보의 필수 조건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휴전 이후 친미외교는 더욱 강화되었으며 대한민국은 미국의 대외정책을 철저히 지켰다. 미국과의 우호 관계의 연장선으로 유엔에 대한 믿음 역시 두터워졌다. 유엔의 도움으로 인해 북한으로부터 대한민국이 살아남았다는 인식이 강하게 뿌리내려 당시 유엔창설일이 공휴일로 삼아지기까지 했으며, 유엔을 상대한 외교가 상당히 중시되었다.
 +
 
 +
반면 소련과 중국에 대해서는 철저한 반공주의를 바탕으로 배척하였다. 냉전 종식 이전까지 소련 및 중국과의 교류는 아예 없다시피했다. 당시 정부는 대한민국의 국가 기반을 튼튼히 하기 위해서는 철저히 반공해야 한다는 극단적인 반공주의를 전면에 내세워 국내 정치에 활용하였다. 이는 때로 친미 인식을 능가하기까지 하였다. 예를 들어 미국이 소련과 평화공존을 지향하던 1950년대 말 당시 대한민국 정부는 이를 비판한 바 있다. 또한 인도와 같은 친서방 중립국가조차 완전한 자유주의 진영이 아니라면 용공시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1960년대 중반 이후 진정되었다.
  
 
==관련 영상==
 
==관련 영상==

2024년 6월 22일 (토) 21:16 판

한국전쟁국군
한국전쟁 당시 대한민국 국군의 모습이다.

개요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위 38°선 전역에 걸쳐 북한군이 불법 남침함으로써 발발한 전쟁이다. 광복 후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의 신탁 통치에 이어서 남북에 별개의 정부가 수립되었는데, 막강한 군사력을 갖춘 북한이 통일을 명분으로 남침하였다.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이루어지면서 전쟁이 중지되었다. 한민족 전체에 큰 손실을 끼쳤고 이후 남북분단이 더욱 고착화되어 아직도 휴전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배경

전후 상황

38선을 경계로 남북한은 미소 양군에 의하여 분할, 점령되었고 한반도에 5년 간 신탁통치를 실시할 것을 합의하였다. 이에 대해 한국 내 반대 의견이 있었고 미소공동위원회가 두 차례에 걸쳐 개최되지만 마땅한 결론 없이 협상이 모두 결렬된다.

1947년 9월에 미국은 소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국 문제를 일방적으로 유엔에 제기하였고, 유엔에서는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의하였지만 북한을 점령한 소련 측에서 총선거 위원단 입국을 거절하며 남북한 총선거가 아닌 선거 감시가 가능한 지역, 즉 남한만의 총선거가 행해지게 되었다. 이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유엔 총회에서는 해당 정부를 합법 정부로 승인하였다.

한편, 북한에서는 김일성을 중심으로 선거를 실시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정부를 선포했고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의 나라들이 이를 승인하며 한반도에 남북한 별개의 정부가 설립된다. 북한은 이후 미소 양군의 철병을 요청하였고, 소련의 빠른 철병에 이어 미군 역시 남한에서 철병을 완료한다.

북한의 군사력 증강

정부 수립 이후 북한은 소련에 의한 계획적인 군사력 증강에 박차를 가하여 소련군 철병 당시 이미 상당한 군사 조직을 형성하였다. 1949년에는 소련과 북한, 중공과 북한 간에 비밀군사협정 및 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었다. 막강한 군사력을 갖추게 된 김일성은 무력통일을 구상하게 된다.

반면 남한에서도 기존 미군정 산하의 국방경비대와 해안경비대를 국군으로 개편하고 해병대와 공군 역시 신규 편성하였으나, 장비가 빈약하여 북한의 군사력에 비하면 한참 뒤떨어지는 수준에 그쳤다. 또한 국군 세력 중 절반에 가까운 세력은 공산게릴라 소탕에 여념이 없었다.

진행

한국전쟁 진행

1950.06.25 북한, 38선 전역에 걸친 국군 방어진지 기습공격 개시
1950.09.15 유엔군, 인천상륙작전
1950.10 유엔군, 평양을 수복하고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진격
1950.11 중공군 개입
1951.07 개성에서 휴전회담 시작
1952.10 공산측의 비타협적인 태도를 문제로 유엔군 사령부 회담 중지
1953.07.27 판문점에서 유엔군 사령관과 공산군 사령관 간 휴전이 조인


영향

한국전쟁은 한민족 전체에게 엄청난 재해를 일으켰다. 남북한을 합쳐 인적 피해만 약 300만 명 가까이 사망 또는 실종되었고, 전쟁에 참여했던 지원국 군대 역시 많은 인원이 사상 피해를 입었다. 많은 문화재가 소실되었고, 경제적 피해 역시 양측 모두에게 말할 것도 없이 막대했다.

해당 문서가 정치교류사에 대해 다루고 있는 만큼, 전쟁 이후 대한민국의 국제 관계에 미친 영향을 중점적으로 서술한다.

우선 미국에 대해서는, 국민들 사이에서 미국을 구원자로 여기는 절대적 믿음이 심어지고 미국과의 동맹관계가 국가 안보의 필수 조건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휴전 이후 친미외교는 더욱 강화되었으며 대한민국은 미국의 대외정책을 철저히 지켰다. 미국과의 우호 관계의 연장선으로 유엔에 대한 믿음 역시 두터워졌다. 유엔의 도움으로 인해 북한으로부터 대한민국이 살아남았다는 인식이 강하게 뿌리내려 당시 유엔창설일이 공휴일로 삼아지기까지 했으며, 유엔을 상대한 외교가 상당히 중시되었다.

반면 소련과 중국에 대해서는 철저한 반공주의를 바탕으로 배척하였다. 냉전 종식 이전까지 소련 및 중국과의 교류는 아예 없다시피했다. 당시 정부는 대한민국의 국가 기반을 튼튼히 하기 위해서는 철저히 반공해야 한다는 극단적인 반공주의를 전면에 내세워 국내 정치에 활용하였다. 이는 때로 친미 인식을 능가하기까지 하였다. 예를 들어 미국이 소련과 평화공존을 지향하던 1950년대 말 당시 대한민국 정부는 이를 비판한 바 있다. 또한 인도와 같은 친서방 중립국가조차 완전한 자유주의 진영이 아니라면 용공시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1960년대 중반 이후 진정되었다.

관련 영상

참고문헌

<<베트남전의 영향 및 배경과 관련하여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베트남전쟁 파병" 참조>> <<베트남전의 파병 배경과 관련하여는 우리역사넷, "월남전은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노도희. (2015). 박정희 대통령의 베트남 파병에 내포된 국가정체성 [석사학위논문, 이화여자대학교]. http://www.riss.kr/link?id=T13819087 참조 >>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