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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돈덕전은 고종 즉위 40주년 기념 행사장으로 쓰기 위해 세워진 서양식 건물로 외교를 위한 영빈관과 알현관으로 사용됐다. 프랑스 파리에서 유행한 화려한 건축양식으로 세워져 당시에도 큰 존재감을 나타낸 건물로 1920년대 일제에 의해 철거됐다가.2023년 9월 복원이 완료됐다.<br/> | ||
+ | - 길이 약 127척, 폭 95척<br/> | ||
+ | - 함석지붕으로 앞뒤에 서로 크기가 다른 튜렛(탑) 3개를 세워 르네상스와 고딕을 절충한 형식<br/> | ||
+ | - 남면 1, 2층 모두 발코니에 아케이드 장식<br/> | ||
=='''참고문헌'''== | =='''참고문헌'''== | ||
==각주== | ==각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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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6월 6일 (목) 14:49 판
개요
- 위치 : 서울시 중구 세종대로 99 (정동)
- 사적 제 124호
- 대한문, 중화전, 중명전, 석조전, 정관헌 등
정동에 위치한 조선과 대한 제국의 궁궐이다. 조선 초기에는 월산대군의 사가였는데 임진왜란 후 선조가 임시거처로 사용하면서 정릉동 행궁으로 불리다가 광해군 때 정식 궁궐로 승격돼 경운궁으로 개칭되었다.
을미사변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이 구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후 1897년 2월에 경운궁으로 환궁하면서부터 역사에 다시 등장하게 되었다. 대한제국이라는 황제국을 선포한 뒤에 황궁으로서의 규모와 격식을 갖추게 되었지만 1904년 대화재로 중심 건물이 모두 소실되었다. 1907년에는 고종이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되고 이때부터 경운궁은 고종의 궁호인 '덕수'를 따 덕수궁으로 불리게 되었다.
연혁
XXXX년 X월 X일 증축 XXXX년 X월 X일 용도 변경…
특징
건물 배치는 크게 정전(중화전)과 침전(함녕전)이 있는 부분 / 선원전이 있는 부분 / 서양식 건물인 중명전이 있는 부분으로 나뉜다.
궁의 배치는 1904년 화재 뒤로 변화되었고 서양식 건물들이 지어지면서 기존의 건물과 조화를 잃게 되었다.
특히 나중에 지어진 석조전 등은 기존 정전 건물들과 축이 일치되지 않고 그 위치도 정전과 인접하게 대규모로 지어지면서 종래의 궁궐의 공간적 규범을 깨뜨리고 말았다.
19세기 이후 들어선 궁내 서양식 가운데 돈덕전과 석조전이 가장 큰 규모의 건물이었다.
건축물
중명전
정관헌
석조전
돈덕전
돈덕전은 고종 즉위 40주년 기념 행사장으로 쓰기 위해 세워진 서양식 건물로 외교를 위한 영빈관과 알현관으로 사용됐다. 프랑스 파리에서 유행한 화려한 건축양식으로 세워져 당시에도 큰 존재감을 나타낸 건물로 1920년대 일제에 의해 철거됐다가.2023년 9월 복원이 완료됐다.
- 길이 약 127척, 폭 95척
- 함석지붕으로 앞뒤에 서로 크기가 다른 튜렛(탑) 3개를 세워 르네상스와 고딕을 절충한 형식
- 남면 1, 2층 모두 발코니에 아케이드 장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