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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배경 및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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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민영익은 땅에 뿌리를 묻지 못하고 허공에 둥둥 떠 있는 듯한 노근란을 통하여 나라를 잃고 망명 생활을 하면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화가의 회한과 울분을 담아 작품을 창작하였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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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근란은 정사초로부터 유래하였다. 정사초는 남송이 원나라에 의하여 멸망된 뒤 쑤저우에 은거하면서 그는 뿌리를 드러낸 난초를 그려 나라를 빼앗긴 비애를 표현하였으며, 이로부터 노근란은 충의와 정절의 상징이 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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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국을 잃어버린 한이 서린 그림으로 뿌리를 그리지 않은 것은 뿌리내릴 흙이 없다는 것이고, 흙이 없다는 것은 국토가 이미 외적에 의해 강탈당했다는 뜻이 숨어있다. 그는 [노근묵란도]를 통해 망국의 설움을 표현했고 난의 문화상징이 새롭게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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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시기 및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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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근묵란도는 1930-1940년대 사이에 제작되었으며 삼성미술관 리움이 소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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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background-color:lightblue; margin: 0; border: 3px solid ForestGreen;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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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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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설명 및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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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은 고결한 이미지를 가졌으며 임금을 향한 충신의 일편단심을 상징하는 꽃으로 문인화가였던 민영익은 이를 대상으로 자주 그림을 그렸다. [노엽풍지도]는 탄력있는 이파리, 탐스러운 꽃망울로 작품의 생기를 더한다.꽃 이파리를 보아도 거침없이 시원스럽게 펼쳐서 망울진 작은 봉오리와 함께 길고 짧고 크고 작은 조화의 극치를 보이며 작은 한 획 속에도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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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시기 및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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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엽풍지도는 1896년도에 창작되었다. 현재는 호암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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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미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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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역인은 상해 서화가들과 시서화로 교유하며 독자적인 운미란을 완성하였는데, 이는 비수와 삼전이 없는 난엽이 곧으면서 힘 있게 곡선을 그리다 끝이 뭉툭한 것이 특징이다. 운미란은 석파란과 함께 널리 유행했을 뿐 아니라 현대까지도 지속되어 현대 사군자의 양식적 연원이나 계보와 관련해 중요한 위치에 있다. 즉, 회화 교류에 있어 중추적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미술사적 의미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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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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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미란의 여러 작품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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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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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은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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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중국에서 망명하는 동안 그곳의 서화가들과 어울리며 그의 예술적 영감에 많은 영향을 받게 된다. 중국 서화가들 중 특히 오창석과의 만남은 그의 예술을 진일보하게 하였다. 청나라의 대표적인 서화가인 오창석은 민영익에게 서화를 가르치기도 하고 미술에 대한 식견을 넓혀줄 뿐 아니라 인장을 많이 새겨 주기도 하였다. 대나무 그림에 능했던 서화가 포화 역시 민영익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민영익이 난초를 그리면 포화는 글씨를 얹는 경우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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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친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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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익의 화풍은 근대 한국화단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석재는 중국에서 직접 민영익과 교유하였으며 김진만, 서상하, 배효원, 서동균등은 운미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김규진이나 김용진의 작품에서도 민영익의 화풍을 따랐음을 느낄 수 있다. 더불어 유학파들의 서체는 한국 서화가의 큰 변화의 흐름을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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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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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상화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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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유파의 하나로 '해파'라고도 한다. 전통의 기초 위에 파격적인 참신함과 자유로운 유파를 추구하여 개성이 분명하고 품학수양을 중시한다. 민간 예술과의 관계 속에서 아속공상의 경지를 이룩하고 외래 예술을 흡수하는 특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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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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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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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양반 사대부들은 학문적 수양을 통해 관직에 나가는 것을 출세로 여길 뿐 아니라, 시, 서, 화 모두에 능한 것을 최고의 재주로 여겼다. 조선의 서예는 양반사회에 있어 학자라면 누구나 터득해야 할 교양이었으므로 글씨에 능한 사람이 많았으며, 독특한 서체를 개발한 이도 적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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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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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서화는 우아한 고전미를 지녔다. 고려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중국의 고풍도 지향했다.또한, 왕실 행사와 관료들의 모임을 그린 그림은 군신관계나 관료간의 화학 등의 유교적 덕목을 격조에 맞게 표현했다. 서예는 원나라의 서체가 바탕이 되어 명의 최신 서화 경향을 선별적으로 수용하면서 조선만의 정제된 서화를 완성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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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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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포도.매화를 잘 그린 세 화가가 삼절로 일컬어졌으며, 신사임당이 섬세하고 정교한 여성적인 필치로써 꽃과 나비,오리 등을 잘 그려 이름이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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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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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에는 실학의 움직임과 더불어 회화에도 새로운 변화를 보였다. 한국의 자연을 그려내는 데 적합한 진경산수화를 개척하거나 산수화와 풍속화에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화가도 존재했다. 양반의 풍류생활 뿐 아니라 부녀자의 모습도 묘사하며 18세기 말 이후로는 서양화법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화풍이 개발되었으며 19세기에는 복고적 화풍이 다시 풍미해 사실적이고 생동력 있는 필력이 유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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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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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화는 글씨와 그림이 어우러지면서 문학과 상상, 현실과 소망이 한데 뒤섞인 옛 서화가의 마음자리가 드러난다. 서화는 종이와 비단 위를 쓸고 간 붓 흔적과 채색을 통해 부귀, 다산, 관운 등과 같은 현실적인 바람을 담거나 고사한 선비의 정신과 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다채로운 특징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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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된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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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ss="wikitable" style="text-align:center“ style="width: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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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대'' || ''조선전기'' || ''조선중기'' || ''조선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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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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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 윤삼산,안견,김정희,최경, 이상,강희안, 이암 || 이정,황집중,어몽룡,신사임당, 양사언, 한석봉 || 윤제홍,서병오,김규진,김수진, 김홍도, 이인상, 이한복, 이윤영, 강세황, 김응원,민영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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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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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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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화가는 '문인화'를 주로 그리는 작가를 일컫는 용어이다. 문인화는 그림을 직업으로 그리지 않는 순수한 문인이 그린 그림으로 왕실의 귀족이나 사대부, 또는 벼슬을 하지 않은 선비들이 그리는 그림을 포괄적으로 뜻한다. 사물의 외형을 꼼꼼하게 그리기보다는 마음속의 사상을 표현하는 사의에 치중하는 특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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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소재 및 소장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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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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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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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난초.png|200px|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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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는 난이라고 한다. 단자엽식물에 속하는 난초과는 국화과,콩과 다음으로 큰 과로 땅에서 자라는 것, 나무나 바위표면에 붙어서 자라는 것, 다른 식물에 기생하는 것 등 다양하다. 형태는 잎은 단엽이고 꽃은 양성인데 간혹 단성도 있다. 화피는 6개가 내외로 배열되어 있으며 1개의 암술은 암술머리가 2~3개로 갈라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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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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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초는 깊은 산중에서 은은한 향기를 멀리까지 퍼뜨린다. 이러한 난초의 특성은 선비의 인성을 드러내는 사군자로서 작용한다. 난초의 향기와 고귀함의 찬미, 그리고 충성심과 절개의 상징이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 자라는 성질이 있어 남들이 보지 않은 곳에서 묵묵히 제 할일을 하는 선비를 말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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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사적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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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초는 사군자의 하나로 예로부터 시와 그림의 소재로 많이 등장하고 있다. 작품 속에 투영된 꽃의 상징을 통해 얻게 되는 심상과 미감은 감상자로 하여금 감정을 불러 일으키고 공감을 만들어낸다. 조선시대 사군자로서 난은 꽃의 색깔, 모양,향기 등 외면적,물리적 미추보다는 관념 속의 윤리성과 도덕성을 바탕으로 꽃의 관념화를 통해 예술로서 승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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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용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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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익 <묵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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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묵란도.jpg|50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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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응원 <묵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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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 묵란도2.jpg|50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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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영 <석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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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석란도.jpg|50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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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진 <묵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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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묵죽도.jpg|100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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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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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은 천연의 무기질 고체로서 모래보다는 크고 바위보다는 작은 광물질이다. 돌은 인간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신앙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일상생활의 도구로 이용되기도 하였으며, 무덤에 쓰여 사후의 안주처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석탑, 석불, 고인돌은 돌이 예술활동에 어떻게 쓰이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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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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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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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는 단자엽식물이므로 나이테가 없고 비대생장을 하지 않는다. 줄기는 원통형이고 가운데가 비었다.표면은 녹색에서 황록색으로 변하며 포엽은 일찍 떨어진다. 과거 대나무는 활,화살과 같은 무기, 퉁소,피리,붓 등 예술활동의 재료로 쓰이기도 하며 약재나 식재료로도 자주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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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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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는 모든 식물의 잎이 떨어진 추운 겨울에도 푸른 잎을 계속 유지한다는 각 식물 특유의 장점을 지니고 있다. 또한, 대나무의 대를 보면 올곧게 올라가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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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사적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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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를 활용하여 선비들은 묵죽화를 주로 그렸으며 이를 통해 선비의 올곧은 기개,강인함을 표현하였다. 대나무는 '세한삼우'라는 총칭 아래 원대에 많이 그려졌으며 죽석,고목죽석,석란 등의 배합으로도 그려졌다.즉, 사군자로서 대나무는 선비의 꼿꼿한 절개와 효행의 의미를 담고 있으며 조선시대 이상적 인간상인 군자의 상징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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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용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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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는 미술작품 뿐만 아니라 시나 설화, 민요 등에도 자주 등장하는 소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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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ss="wikitable" style="text-align:center“ style="width: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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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분 || ''설화'' || ''미술'' || ''시조'' || ''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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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 연기설화,만파식적,미추왕과 죽엽군 || 묵죽도,풍죽도,설죽도,죽석도 || 오우가, 눈마저 휘여진 대를,대 || 대타령,대나무노래,오죽대,한쌍을 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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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 낙산사,『삼국유사』 권2 기이(紀異) 만파식적조와 『삼국사기』 권32 잡지 제1 악조(樂條)에 실림,『삼국유사』 기이편(紀異篇) 제1에 수록|| 이정,유영완,김규진 || 윤선도,원천석,김교한 || 작자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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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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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민영익: 민족문화백과대사전</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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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서병오: 민족문화백과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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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근대역사인물]] [[분류: 최민서]]

2023년 12월 12일 (화) 09:52 기준 최신판

주요 작품

노근묵란도

작가

민영익

민영익사진.jpg

작품

노근묵란도.jpg

창작배경 및 특징

 작가 민영익은 땅에 뿌리를 묻지 못하고 허공에 둥둥 떠 있는 듯한 노근란을 통하여 나라를 잃고 망명 생활을 하면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화가의 회한과 울분을 담아 작품을 창작하였다. 
노근란은 정사초로부터 유래하였다. 정사초는 남송이 원나라에 의하여 멸망된 뒤 쑤저우에 은거하면서 그는 뿌리를 드러낸 난초를 그려 나라를 빼앗긴 비애를 표현하였으며, 이로부터 노근란은 충의와 정절의 상징이 되었다.
조국을 잃어버린 한이 서린 그림으로 뿌리를 그리지 않은 것은 뿌리내릴 흙이 없다는 것이고, 흙이 없다는 것은 국토가 이미 외적에 의해 강탈당했다는 뜻이 숨어있다. 그는 [노근묵란도]를 통해 망국의 설움을 표현했고 난의 문화상징이 새롭게 나타났다.

창작시기 및 소장

노근묵란도는 1930-1940년대 사이에 제작되었으며 삼성미술관 리움이 소장하고 있다.

지도

노엽풍지도

작가

민영익

작품

노엽풍지도2.jpg

작품설명 및 특징

난은 고결한 이미지를 가졌으며 임금을 향한 충신의 일편단심을 상징하는 꽃으로 문인화가였던 민영익은 이를 대상으로 자주 그림을 그렸다. [노엽풍지도]는 탄력있는 이파리, 탐스러운 꽃망울로 작품의 생기를 더한다.꽃 이파리를 보아도 거침없이 시원스럽게 펼쳐서 망울진 작은 봉오리와 함께 길고 짧고 크고 작은 조화의 극치를 보이며 작은 한 획 속에도 드러난다.

창작시기 및 소장

노엽풍지도는 1896년도에 창작되었다. 현재는 호암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지도

운미란

민역인은 상해 서화가들과 시서화로 교유하며 독자적인 운미란을 완성하였는데, 이는 비수와 삼전이 없는 난엽이 곧으면서 힘 있게 곡선을 그리다 끝이 뭉툭한 것이 특징이다. 운미란은 석파란과 함께 널리 유행했을 뿐 아니라 현대까지도 지속되어 현대 사군자의 양식적 연원이나 계보와 관련해 중요한 위치에 있다. 즉, 회화 교류에 있어 중추적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미술사적 의미를 가진다.

흑란

운미란의 여러 작품 중 하나이다.

영향

받은 영향

그가 중국에서 망명하는 동안 그곳의 서화가들과 어울리며 그의 예술적 영감에 많은 영향을 받게 된다. 중국 서화가들 중 특히 오창석과의 만남은 그의 예술을 진일보하게 하였다. 청나라의 대표적인 서화가인 오창석은 민영익에게 서화를 가르치기도 하고 미술에 대한 식견을 넓혀줄 뿐 아니라 인장을 많이 새겨 주기도 하였다. 대나무 그림에 능했던 서화가 포화 역시 민영익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민영익이 난초를 그리면 포화는 글씨를 얹는 경우가 많았다.

끼친 영향

민영익의 화풍은 근대 한국화단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석재는 중국에서 직접 민영익과 교유하였으며 김진만, 서상하, 배효원, 서동균등은 운미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김규진이나 김용진의 작품에서도 민영익의 화풍을 따랐음을 느낄 수 있다. 더불어 유학파들의 서체는 한국 서화가의 큰 변화의 흐름을 가져왔다.

소속 단체

해상화파

중국유파의 하나로 '해파'라고도 한다. 전통의 기초 위에 파격적인 참신함과 자유로운 유파를 추구하여 개성이 분명하고 품학수양을 중시한다. 민간 예술과의 관계 속에서 아속공상의 경지를 이룩하고 외래 예술을 흡수하는 특징이 있다.

서화가

조선의 서화

조선시대 양반 사대부들은 학문적 수양을 통해 관직에 나가는 것을 출세로 여길 뿐 아니라, 시, 서, 화 모두에 능한 것을 최고의 재주로 여겼다. 조선의 서예는 양반사회에 있어 학자라면 누구나 터득해야 할 교양이었으므로 글씨에 능한 사람이 많았으며, 독특한 서체를 개발한 이도 적지 않았다.

조선 전기

조선 전기의 서화는 우아한 고전미를 지녔다. 고려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중국의 고풍도 지향했다.또한, 왕실 행사와 관료들의 모임을 그린 그림은 군신관계나 관료간의 화학 등의 유교적 덕목을 격조에 맞게 표현했다. 서예는 원나라의 서체가 바탕이 되어 명의 최신 서화 경향을 선별적으로 수용하면서 조선만의 정제된 서화를 완성해갔다.

조선 중기

대.포도.매화를 잘 그린 세 화가가 삼절로 일컬어졌으며, 신사임당이 섬세하고 정교한 여성적인 필치로써 꽃과 나비,오리 등을 잘 그려 이름이 높았다.

조선 후기

후기에는 실학의 움직임과 더불어 회화에도 새로운 변화를 보였다. 한국의 자연을 그려내는 데 적합한 진경산수화를 개척하거나 산수화와 풍속화에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화가도 존재했다. 양반의 풍류생활 뿐 아니라 부녀자의 모습도 묘사하며 18세기 말 이후로는 서양화법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화풍이 개발되었으며 19세기에는 복고적 화풍이 다시 풍미해 사실적이고 생동력 있는 필력이 유행하였다.

특징

서화는 글씨와 그림이 어우러지면서 문학과 상상, 현실과 소망이 한데 뒤섞인 옛 서화가의 마음자리가 드러난다. 서화는 종이와 비단 위를 쓸고 간 붓 흔적과 채색을 통해 부귀, 다산, 관운 등과 같은 현실적인 바람을 담거나 고사한 선비의 정신과 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다채로운 특징을 가진다.

소속된 인물

시대 조선전기 조선중기 조선후기
작가 윤삼산,안견,김정희,최경, 이상,강희안, 이암 이정,황집중,어몽룡,신사임당, 양사언, 한석봉 윤제홍,서병오,김규진,김수진, 김홍도, 이인상, 이한복, 이윤영, 강세황, 김응원,민영익,

문인화가

문인화가는 '문인화'를 주로 그리는 작가를 일컫는 용어이다. 문인화는 그림을 직업으로 그리지 않는 순수한 문인이 그린 그림으로 왕실의 귀족이나 사대부, 또는 벼슬을 하지 않은 선비들이 그리는 그림을 포괄적으로 뜻한다. 사물의 외형을 꼼꼼하게 그리기보다는 마음속의 사상을 표현하는 사의에 치중하는 특징이 있다.

작품 소재 및 소장 장소

난초

난초.png

일반적으로는 난이라고 한다. 단자엽식물에 속하는 난초과는 국화과,콩과 다음으로 큰 과로 땅에서 자라는 것, 나무나 바위표면에 붙어서 자라는 것, 다른 식물에 기생하는 것 등 다양하다. 형태는 잎은 단엽이고 꽃은 양성인데 간혹 단성도 있다. 화피는 6개가 내외로 배열되어 있으며 1개의 암술은 암술머리가 2~3개로 갈라져 있다.

특징

난초는 깊은 산중에서 은은한 향기를 멀리까지 퍼뜨린다. 이러한 난초의 특성은 선비의 인성을 드러내는 사군자로서 작용한다. 난초의 향기와 고귀함의 찬미, 그리고 충성심과 절개의 상징이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 자라는 성질이 있어 남들이 보지 않은 곳에서 묵묵히 제 할일을 하는 선비를 말하기도 한다.

예술사적 의의

난초는 사군자의 하나로 예로부터 시와 그림의 소재로 많이 등장하고 있다. 작품 속에 투영된 꽃의 상징을 통해 얻게 되는 심상과 미감은 감상자로 하여금 감정을 불러 일으키고 공감을 만들어낸다. 조선시대 사군자로서 난은 꽃의 색깔, 모양,향기 등 외면적,물리적 미추보다는 관념 속의 윤리성과 도덕성을 바탕으로 꽃의 관념화를 통해 예술로서 승화되었다.

활용 작품

민영익 <묵란도>

묵란도.jpg

김응원 <묵란도>

묵란도2.jpg

이회영 <석란도>

석란도.jpg

김규진 <묵죽도>

묵죽도.jpg

석(돌)

돌은 천연의 무기질 고체로서 모래보다는 크고 바위보다는 작은 광물질이다. 돌은 인간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신앙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일상생활의 도구로 이용되기도 하였으며, 무덤에 쓰여 사후의 안주처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석탑, 석불, 고인돌은 돌이 예술활동에 어떻게 쓰이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대나무

대나무

대나무는 단자엽식물이므로 나이테가 없고 비대생장을 하지 않는다. 줄기는 원통형이고 가운데가 비었다.표면은 녹색에서 황록색으로 변하며 포엽은 일찍 떨어진다. 과거 대나무는 활,화살과 같은 무기, 퉁소,피리,붓 등 예술활동의 재료로 쓰이기도 하며 약재나 식재료로도 자주 쓰였다.

특징

대나무는 모든 식물의 잎이 떨어진 추운 겨울에도 푸른 잎을 계속 유지한다는 각 식물 특유의 장점을 지니고 있다. 또한, 대나무의 대를 보면 올곧게 올라가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예술사적 의의

대나무를 활용하여 선비들은 묵죽화를 주로 그렸으며 이를 통해 선비의 올곧은 기개,강인함을 표현하였다. 대나무는 '세한삼우'라는 총칭 아래 원대에 많이 그려졌으며 죽석,고목죽석,석란 등의 배합으로도 그려졌다.즉, 사군자로서 대나무는 선비의 꼿꼿한 절개와 효행의 의미를 담고 있으며 조선시대 이상적 인간상인 군자의 상징물이었다.

활용작품

대나무는 미술작품 뿐만 아니라 시나 설화, 민요 등에도 자주 등장하는 소재이다.

구분 설화 미술 시조 민요
작품 연기설화,만파식적,미추왕과 죽엽군 묵죽도,풍죽도,설죽도,죽석도 오우가, 눈마저 휘여진 대를,대 대타령,대나무노래,오죽대,한쌍을 치지 마
작가 낙산사,『삼국유사』 권2 기이(紀異) 만파식적조와 『삼국사기』 권32 잡지 제1 악조(樂條)에 실림,『삼국유사』 기이편(紀異篇) 제1에 수록 이정,유영완,김규진 윤선도,원천석,김교한 작자미상

참고문헌

1. 민영익: 민족문화백과대사전
2. 서병오: 민족문화백과대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