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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 12일 (화) 02:59 기준 최신판
흥선대원군의 집권
개요
1864년 1월 21일 고종이 11살의 나이로 조선의 26대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그리고 고종의 나이를 이유로 그의 아버지 이하응이 대원군의 지위로 조선을 섭정하기 시작하였다.
영향
흥선대원군[1]은 집권 이후 내정 개혁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집권기에 조선은 세도 정치기의 삼정의 문란이 극에 달해있었다.
이에 흥선대원군은 양전사업을 실시하고 비변사[2]를 폐지하며 의정부와 삼군부를 부활시켜 세도정치 세력을 몰아내고자 노력하였다. 또한 서원을 폐지하고 경복궁을 중건하여 왕권 강화를 도모하였다.
또한 흥선대원군은 집권 시기에 종교를 탄압하였다. 흥선대원군이 명령한 병인박해[3]는 천주교 신자들을 탄압하는 정책이었고 이는 병인양요[4]로 이어졌다.
병인양요와 이후 신미양요[5]를 거치며 쇄국 정책에 대한 흥선대원군의 의지는 더욱 커졌고 이는 10년 간의 섭정이 끝날때까지 이어졌다.
평가
긍정적
- 세도정치의 종결 : 세도정치를 끝내기 위해 세도가와 정치적인 협력 등을 통하여 고종을 보위에 앉히고, 능력을 중시하는 고른 인재 등용을 표방하여 조정을 구성하였다.
- 쇄국정책 : 쇄국정책을 통해 조선의 정통성을 유지하고 서양 열강에 의해 침탈당하는 것을 방지하였다.
부정적
- 당백전 발행의 실패 : 당백전이라는 신 화폐의 출현으로 인해 시중에 유통되는 화폐가 늘어나 화폐가치가 폭락해 조선 경제의 물가를 파탄내었다.
- 쇄국정책 : 서양을 지나치게 배척하는 쇄국정책을 통해 서양의 신기술을 도입하는데 차질을 빚었고 비슷한 시기 일본에서 메이지 유신이 들어서고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해 보았을 때 지나친 쇄국정책에 대한 비판이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