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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4년 1월 21일 고종이 11살의 나이로 조선의 26대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1864년 1월 21일 고종이 11살의 나이로 조선의 26대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그리고 고종의 나이를 이유로 그의 아버지 이하응이 대원군의 지위로 조선을 섭정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고종의 나이를 이유로 그의 아버지 이하응이 대원군의 지위로 조선을 섭정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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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은 집권 이후 내정 개혁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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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https://namu.wiki/w/흥선대원군]은 집권 이후 내정 개혁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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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흥선대원군은 양전사업을 실시하고 비변사를 폐지하며 의정부와 삼군부를 부활시켜 세도정치 세력을 몰아내고자 노력하였다. 또한 서원을 폐지하고 경복궁을 중건하여 왕권 강화를 도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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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흥선대원군은 양전사업을 실시하고 비변사[https://namu.wiki/w/비변사]를 폐지하며 의정부와 삼군부를 부활시켜 세도정치 세력을 몰아내고자 노력하였다. 또한 서원을 폐지하고 경복궁을 중건하여 왕권 강화를 도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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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흥선대원군은 집권 시기에 종교를 탄압하였다. 흥선대원군이 명령한 병인박해[https://namu.wiki/w/병인박해]는 천주교 신자들을 탄압하는 정책이었고 이는 병인양요[https://namu.wiki/w/병인양요]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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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양요와 이후 신미양요[https://namu.wiki/w/신미양요]를 거치며 쇄국 정책에 대한 흥선대원군의 의지는 더욱 커졌고 이는 10년 간의 섭정이 끝날때까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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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도정치의 종결 : 세도정치를 끝내기 위해 세도가와 정치적인 협력 등을 통하여 고종을 보위에 앉히고, 능력을 중시하는 고른 인재 등용을 표방하여 조정을 구성하였다.
  
또한 흥선대원군은 집권 시기에 종교를 탄압하였다. 흥선대원군이 명령한 병인박해는 천주교 신자들을 탄압하는 정책이었고 이는 병인양요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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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쇄국정책 : 쇄국정책을 통해 조선의 정통성을 유지하고 서양 열강에 의해 침탈당하는 것을 방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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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백전 발행의 실패 : 당백전이라는 신 화폐의 출현으로 인해 시중에 유통되는 화폐가 늘어나 화폐가치가 폭락해 조선 경제의 물가를 파탄내었다.
  
병인양요와 이후 신미양요을 거치며 쇄국 정책에 대한 흥선대원군의 의지는 더욱 커졌고 이는 10년 간의 섭정이 끝날때까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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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쇄국정책 : 서양을 지나치게 배척하는 쇄국정책을 통해 서양의 신기술을 도입하는데 차질을 빚었고 비슷한 시기 일본에서 메이지 유신이 들어서고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해 보았을 때 지나친 쇄국정책에 대한 비판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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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 12일 (화) 02:59 기준 최신판

흥선대원군의 집권

개요

1864년 1월 21일 고종이 11살의 나이로 조선의 26대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그리고 고종의 나이를 이유로 그의 아버지 이하응이 대원군의 지위로 조선을 섭정하기 시작하였다.

흥선대원군.jpg

영향

흥선대원군[1]은 집권 이후 내정 개혁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집권기에 조선은 세도 정치기의 삼정의 문란이 극에 달해있었다.


이에 흥선대원군은 양전사업을 실시하고 비변사[2]를 폐지하며 의정부와 삼군부를 부활시켜 세도정치 세력을 몰아내고자 노력하였다. 또한 서원을 폐지하고 경복궁을 중건하여 왕권 강화를 도모하였다.


또한 흥선대원군은 집권 시기에 종교를 탄압하였다. 흥선대원군이 명령한 병인박해[3]는 천주교 신자들을 탄압하는 정책이었고 이는 병인양요[4]로 이어졌다.


병인양요와 이후 신미양요[5]를 거치며 쇄국 정책에 대한 흥선대원군의 의지는 더욱 커졌고 이는 10년 간의 섭정이 끝날때까지 이어졌다.


평가

긍정적

  • 세도정치의 종결 : 세도정치를 끝내기 위해 세도가와 정치적인 협력 등을 통하여 고종을 보위에 앉히고, 능력을 중시하는 고른 인재 등용을 표방하여 조정을 구성하였다.
  • 쇄국정책 : 쇄국정책을 통해 조선의 정통성을 유지하고 서양 열강에 의해 침탈당하는 것을 방지하였다.

부정적

  • 당백전 발행의 실패 : 당백전이라는 신 화폐의 출현으로 인해 시중에 유통되는 화폐가 늘어나 화폐가치가 폭락해 조선 경제의 물가를 파탄내었다.
  • 쇄국정책 : 서양을 지나치게 배척하는 쇄국정책을 통해 서양의 신기술을 도입하는데 차질을 빚었고 비슷한 시기 일본에서 메이지 유신이 들어서고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해 보았을 때 지나친 쇄국정책에 대한 비판이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