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산총파업"의 두 판 사이의 차이
1번째 줄: | 1번째 줄: | ||
+ | |||
+ | {{애국사건 | ||
+ | |이미지 = 원산총파업.jpg | ||
+ | |사건 이름 = 원산총파업 | ||
+ | |한자 표기 = 元山總罷業 | ||
+ | |발생 날짜 = 1929년 1월 13일 ~ 1929년 4월 6일 | ||
+ | |발생 지역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강화도 원산시 | ||
+ | |발생 원인 = 문평 라이징선 제유회사의 일본인 감독의 폭력 | ||
+ | |사건 종류 = 파업 | ||
+ | |결과 = 노동조합 탄압 | ||
+ | }} | ||
+ | |||
+ | ==간단한 설명== | ||
+ | ===원산총파업=== | ||
+ | {{글색 | ||
+ | |color=#F5F5F5 | ||
+ | |text='''원산총파업은 1929년 발생한 한국 노동운동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파업이다!''' | ||
+ | }} | ||
+ | <html> | ||
+ | <p align="middle"> | ||
+ | <iframe width="483" height="300" src="https://www.youtube.com/embed/_khNb5nkwGg" title="오늘096_원산 총파업 | 큰★별쌤의 오늘"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 allowfullscreen></iframe> | ||
+ | </html> | ||
+ | <div style="text-align:center;"> | ||
+ | <font size ="3">'''1929년 3개월 동안 원산노동연합회 산하 노동조합원 2200여 명이 참여한 대규모 파업!'''</font> | ||
+ | </div> | ||
+ | |||
+ | ===원산은 어디에 있을까?=== | ||
+ | <html> | ||
+ | <p align="middle"> | ||
+ | <iframe src="https://www.google.com/maps/d/u/0/embed?mid=1Ej3TnXqq_ztG641k7RyM-yZwNG3CGsQ&ehbc=2E312F" width="640" height="480"></iframe> | ||
+ | </html> | ||
+ | |||
+ | ==발생 배경== | ||
+ | ===사회주의의 도입=== | ||
+ | 1910년대부터 세계 각지에서 공산당 세력이 생겨나기 시작했으며, 사회주의 관련 활동이 증가하게 된다. 우리나라에 사회주의가 처음 도입된 것은 1920년대였다. 사회주의 이념이 도입된 이후, 이를 접한 수많은 노동자들과 농민들이 각성을 하게 된다. 이때 등장하게 된 것이 농민조합<ref>농민들의 사회 경제적 지위 향상과 권익실현을 위해 만든 조직</ref>과 노동조합이다. 이후 농민과 노동자 사이에서는 서로 단결하여 지주나 자본가에게 저항하는 움직임이 강해지게 되었으며, 원산 총파업 역시 이러한 흐름 하에 등장하게 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 ||
+ | |||
+ | ===라이징 선 제유공장 사건=== | ||
+ | 1928년 문평의 제유공장에서 시작되었다. 해당 제유공장의 이름은 '라이징 선'으로, 영국인이 경영하는 곳이었으며 지배인이나 주요 간부들은 모두 일본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일제강점기였던 당시, 관리직의 일본인들은 한국인 노동자들에게 온갖 폭력을 일삼았다고 한다. 또한 살인적일 만큼의 장시간 노동과 열악한 근무환경, 터무니없이 적은 월급 등도 라이징 선 노동자들의 환경을 악화시키는 데 일조하였다. 이에 참다 못한 120여 명의 노동자들이 1929년 1월 13일 파업에 돌입함에 따라 원산총파업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 ||
+ | |||
+ | ==전개 과정== | ||
+ | ===1929년 1월 13일 첫 저항과 결과=== | ||
+ | 노동자들이 강하게 저항을 하자, 공장 측은 노동자들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한다. 그 중에는 다음 세 가지 정도가 있다. | ||
+ | # '''폭행한 감독 축출''' | ||
+ | # '''새로운 임금 협상''' | ||
+ | # '''생활 조건의 개선''' | ||
+ | 그러나 그 약속은 3개월이 지나도 지켜지지 않았다. | ||
+ | |||
+ | ===약속 불이행으로 인한 총파업 재돌입=== | ||
+ | 그리하여 노동자 단체였던 원산 노동 연합회는 다시 한 번 총파업에 돌입한다. | ||
+ | {| | ||
+ | |[[파일:원산노동연합회.png|200px]] | ||
+ | | | ||
+ | * '''원산노동연합회관 사진''' | ||
+ | * <font color=CadetBlue>'''원산노동연합회'''</font> : 1921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조직되었던 <span style="background:PowderBlue">노동운동단체</span>. | ||
+ | * 연합회는 1921년 3월 15일, "노동운동의 동일성과 무산자의 세계적 제휴를 도모하며 무산계급의 ○를 기함",“교양에 노력하며 노동자의 지식을 계발하며 당면의 이익을 도모하며 당면의 이익을 위하여 투쟁함으로써 정치적 또는 경제적으로 노동자의 생활을 향상케 함"의 두 강령과 함께 개설되었다. | ||
+ | * 원산노동연합회는 상당히 '''청렴결백'''한 단체였다! : 원산총파업 당시 일제는 연합회를 탄압할 빌미를 찾기 위해 경리장부를 압수하였지만, 단 하나의 부정조차 찾아낼 수 없었다고 한다. | ||
+ | |} | ||
+ | |||
+ | ===수많은 단체의 지원=== | ||
+ | 그러나 공장과 연합회의 대립으로 인해 파업이 장기화가 되니, '''파업 기금이 고갈'''되어 버렸고, 이로 인해 노동자들의 생활은 극도로 어려워졌다.</br> | ||
+ | 이때 세계 곳곳의 노동자들이 원산에 '''구호품과 지지의 뜻'''을 보내오기 시작하였다. 전국 각지의 노동조합, 청년단체, 농민단체 및 일본, 중국, 프랑스, 소련 등의 노동단체들이 지원과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br> | ||
+ | <span style="background:PowderBlue">'''[[신간회]]'''</span> 역시 지원금을 보냄으로써 원산총파업을 지지하였던 국내 단체 중 하나였다. | ||
+ | |||
+ | ===계속되는 탄압=== | ||
+ | 그러나 수많은 지원과 후원 속에서도 일제의 탄압은 빠르게 진행되었다.</br> | ||
+ | 총파업의 진행을 막기 위해 일본경찰은 원산노동연합회 위원장을 비롯한 주요 간부를 계속 체포하거나 가두었다. </br> | ||
+ | 이로 인해 마치 [[신간회]]의 경우처럼, 자리를 비운 간부들을 대신한 새로운 지도부는 점차 투항주의적인 경향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일부 노동자들이 이러한 연합회를 탈퇴하였고, 큰 위기가 찾아왔다.</br> | ||
+ | |||
+ | ===노동자의 패배=== | ||
+ | 이러한 '''노동 단체 내에서의 분열'''과 '''일제의 계속되는 탄압''', 그리고 별다른 성과를 보지 못한 '''자본가 계층과의 타협''' 끝에 원산총파업은 <span style="background:PowderBlue">'''노동자측의 패배'''</span>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 ||
+ | |||
+ | ==결과== | ||
+ | '''일제시대 최대 규모 파업'''이었던 원산총파업은 후에 1930년대에 일어나는 <span style="background:PowderBlue">'''노동운동에 큰 영향'''</span>을 끼쳤다. 당시 많은 저항 운동이 일제의 '''문화통치''' 아래서 어느정도의 타협점을 찾아가는 '''합법적인 운동'''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 속에는 여전히 탄압이 존재했기 때문에 운동을 지속하는 데에는 '''한계점이 항상 존재'''하였다. 이 점을 일깨워 준 것이 바로 '''원산총파업'''인 것이다. 원산총파업은 일제의 탄압 속에서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보여줌으로써 비합법적인 정치 투쟁의 계기를 마련하였으며, 전국적인 조직화의 필요성을 깨닫게 하여 산업별 노조 건설설이 이루어지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원산총파업이 전국 각지와 전세계에서까지 열렬한 성원을 받았다는 점은 원산총파업이 단순히 노동운동사에서뿐 아니라, 반일민족해방투쟁사에서도 큰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보여준다. | ||
+ | |||
+ | ==주석== | ||
+ | <references/> | ||
+ | |||
+ | ==참고문헌== | ||
+ | <font size= "2"> | ||
+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069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원산총파업] | ||
+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068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원산노동연합회] | ||
+ | *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i402600&code=kc_age_40 우리역사넷 원산총파업] | ||
+ | </font> | ||
+ | |||
[[분류:애국계몽운동]] | [[분류:애국계몽운동]] | ||
[[분류:까마귀]] | [[분류:까마귀]] |
2023년 12월 11일 (월) 20:41 기준 최신판
⁕- 원산총파업 -⁕ | |
사건 정보 | |
사건 이름 | 원산총파업 |
---|---|
한자 표기 | 元山總罷業 |
발생 날짜 | 1929년 1월 13일 ~ 1929년 4월 6일 |
발생 지역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강화도 원산시 |
기타 정보 | |
발생 원인 | 문평 라이징선 제유회사의 일본인 감독의 폭력 |
사건 종류 | 파업 |
결과 | 노동조합 탄압 |
목차
간단한 설명
원산총파업
원산총파업은 1929년 발생한 한국 노동운동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파업이다! |
1929년 3개월 동안 원산노동연합회 산하 노동조합원 2200여 명이 참여한 대규모 파업!
원산은 어디에 있을까?
발생 배경
사회주의의 도입
1910년대부터 세계 각지에서 공산당 세력이 생겨나기 시작했으며, 사회주의 관련 활동이 증가하게 된다. 우리나라에 사회주의가 처음 도입된 것은 1920년대였다. 사회주의 이념이 도입된 이후, 이를 접한 수많은 노동자들과 농민들이 각성을 하게 된다. 이때 등장하게 된 것이 농민조합[1]과 노동조합이다. 이후 농민과 노동자 사이에서는 서로 단결하여 지주나 자본가에게 저항하는 움직임이 강해지게 되었으며, 원산 총파업 역시 이러한 흐름 하에 등장하게 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라이징 선 제유공장 사건
1928년 문평의 제유공장에서 시작되었다. 해당 제유공장의 이름은 '라이징 선'으로, 영국인이 경영하는 곳이었으며 지배인이나 주요 간부들은 모두 일본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일제강점기였던 당시, 관리직의 일본인들은 한국인 노동자들에게 온갖 폭력을 일삼았다고 한다. 또한 살인적일 만큼의 장시간 노동과 열악한 근무환경, 터무니없이 적은 월급 등도 라이징 선 노동자들의 환경을 악화시키는 데 일조하였다. 이에 참다 못한 120여 명의 노동자들이 1929년 1월 13일 파업에 돌입함에 따라 원산총파업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전개 과정
1929년 1월 13일 첫 저항과 결과
노동자들이 강하게 저항을 하자, 공장 측은 노동자들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한다. 그 중에는 다음 세 가지 정도가 있다.
- 폭행한 감독 축출
- 새로운 임금 협상
- 생활 조건의 개선
그러나 그 약속은 3개월이 지나도 지켜지지 않았다.
약속 불이행으로 인한 총파업 재돌입
그리하여 노동자 단체였던 원산 노동 연합회는 다시 한 번 총파업에 돌입한다.
수많은 단체의 지원
그러나 공장과 연합회의 대립으로 인해 파업이 장기화가 되니, 파업 기금이 고갈되어 버렸고, 이로 인해 노동자들의 생활은 극도로 어려워졌다.
이때 세계 곳곳의 노동자들이 원산에 구호품과 지지의 뜻을 보내오기 시작하였다. 전국 각지의 노동조합, 청년단체, 농민단체 및 일본, 중국, 프랑스, 소련 등의 노동단체들이 지원과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신간회 역시 지원금을 보냄으로써 원산총파업을 지지하였던 국내 단체 중 하나였다.
계속되는 탄압
그러나 수많은 지원과 후원 속에서도 일제의 탄압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총파업의 진행을 막기 위해 일본경찰은 원산노동연합회 위원장을 비롯한 주요 간부를 계속 체포하거나 가두었다.
이로 인해 마치 신간회의 경우처럼, 자리를 비운 간부들을 대신한 새로운 지도부는 점차 투항주의적인 경향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일부 노동자들이 이러한 연합회를 탈퇴하였고, 큰 위기가 찾아왔다.
노동자의 패배
이러한 노동 단체 내에서의 분열과 일제의 계속되는 탄압, 그리고 별다른 성과를 보지 못한 자본가 계층과의 타협 끝에 원산총파업은 노동자측의 패배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결과
일제시대 최대 규모 파업이었던 원산총파업은 후에 1930년대에 일어나는 노동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당시 많은 저항 운동이 일제의 문화통치 아래서 어느정도의 타협점을 찾아가는 합법적인 운동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 속에는 여전히 탄압이 존재했기 때문에 운동을 지속하는 데에는 한계점이 항상 존재하였다. 이 점을 일깨워 준 것이 바로 원산총파업인 것이다. 원산총파업은 일제의 탄압 속에서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보여줌으로써 비합법적인 정치 투쟁의 계기를 마련하였으며, 전국적인 조직화의 필요성을 깨닫게 하여 산업별 노조 건설설이 이루어지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원산총파업이 전국 각지와 전세계에서까지 열렬한 성원을 받았다는 점은 원산총파업이 단순히 노동운동사에서뿐 아니라, 반일민족해방투쟁사에서도 큰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보여준다.
주석
- ↑ 농민들의 사회 경제적 지위 향상과 권익실현을 위해 만든 조직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