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구 근대건축물"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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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박노수가옥, 걸어서 근현대사 속으로]] [[분류:배고파요]]
 
[[분류:박노수가옥, 걸어서 근현대사 속으로]] [[분류:배고파요]]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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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조선 말기(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 사이에 지어진 건축문화재들 중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현존하는 건축물들에 대해 다룰 예정이다.
 
: 조선 말기(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 사이에 지어진 건축문화재들 중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현존하는 건축물들에 대해 다룰 예정이다.
  
==조선 후기(개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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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개화기'''==
  
===기기국 번사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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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기국 번사창'''===
: [[파일:기기국_번사창.jpg|400픽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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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일:기기국_번사창.jpg|500픽셀]]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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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특별시 시도유형문화재(1984년 12월 17일 지정)
* 소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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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대: 고종 21년(18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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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로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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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유주: 한국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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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사창(飜沙廠)은 1884년(고종 21)에 건축된 기기국(機器局)의 무기고로 건평 198㎡쯤 되는 이 집은 장대석과 사괴석(四塊石)으로 된 토대 위에 세워졌으며, 겉은 회색 벽돌로 벽체를 쌓았고, 붉은 벽돌로 견치형(犬齒形)의 띠를 두른 위에 왕대공 지붕틀이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놓여져서 맞배지붕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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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입문에는 아치를 틀었고 특히 정문은 화강석으로 꾸며졌으며, 측면문은 붉은 벽돌로 띠를 넣어 장식하고 있어서 매우 특이한 건축양식을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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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찍이 이곳 삼청동에는 군기시(軍器寺) 소속이던 화약도감(火藥都監)이 있었고, 이에 딸린 화약고 별창(別倉)이 있었다. 따라서, 별창자리에 번사창이 들어서면서 무기고를 겸한 화약제조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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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집은 일제강점기에 세균실험실이 되었고 광복 후 미군정 때는 중앙방역연구소, 정부수립 후 국립사회복지연구원으로도 쓰이다가 1970년 한국은행 소유로 되었다.<ref>사진 및 내용 출처: 김영상, "번사창 (飜沙廠)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2514</ref>
  
==대한제국 시기==
+
=='''대한제국 시대'''==
  
===서울 대한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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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대한의원'''===
: [[파일:서울대한의원전경1(촬영년도2015년).JPG|400픽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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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일:서울대한의원전경1(촬영년도2015년).JPG|500픽셀]]
* 사적 제24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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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적(1976년 11월 16일 지정)
* 시대: 융희2년, 순종2년(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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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대: 융희 2년=순종 2년(1908)
* 소재지: 서울 종로구 연건동 28-21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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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재지: 서울 종로구 연건동 28-21번지 (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내)
 
* 소유주: 서울대학교 병원
 
* 소유주: 서울대학교 병원
 
: 서울 대한의원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내에 있는 대한제국시대의 대한의원 건물이다.
 
: 서울 대한의원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내에 있는 대한제국시대의 대한의원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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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0년 대한의원은 조선총독부의원으로 바뀌었고, 1911년에는 부속 의학강습소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1926년에는 경성제국 대학에 포함되면서 대학병원으로 되었다. 광복 뒤에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병원의 본관이 되었고, 1970년대말 새 건물이 세워진 뒤에 부속건물이 되었고, 현재는 서울대학교병원 부설 병원연구소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 1910년 대한의원은 조선총독부의원으로 바뀌었고, 1911년에는 부속 의학강습소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1926년에는 경성제국 대학에 포함되면서 대학병원으로 되었다. 광복 뒤에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병원의 본관이 되었고, 1970년대말 새 건물이 세워진 뒤에 부속건물이 되었고, 현재는 서울대학교병원 부설 병원연구소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 건물의 구조는 지상 2층으로 현관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형으로 되어 있으며, 자동차로 직접 현관까지 들어갈 수 있도록 현관에 차 대는 곳을 만들어 정면 입구를 강조한 것이 특징이다.
 
: 건물의 구조는 지상 2층으로 현관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형으로 되어 있으며, 자동차로 직접 현관까지 들어갈 수 있도록 현관에 차 대는 곳을 만들어 정면 입구를 강조한 것이 특징이다.
: 본관의 지붕은 앞면에서 봤을 때 사다리꼴 모양을 한 우진각 지붕이며, 중앙에 높이 솟은 시계탑은 바로크양식을 하고 있어 본격적인 서양식 건축물의 특징을 찾을 수 있다. <ref>문화재청, "서울 대한의원 (서울 大韓醫院)",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pageNo=1_1_2_0&ccbaCpno=1331102480000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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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관의 지붕은 앞면에서 봤을 때 사다리꼴 모양을 한 우진각 지붕이며, 중앙에 높이 솟은 시계탑은 바로크양식을 하고 있어 본격적인 서양식 건축물의 특징을 찾을 수 있다. <ref>사진 및 내용 출처: 문화재청, "서울 대한의원 (서울 大韓醫院)",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pageNo=1_1_2_0&ccbaCpno=1331102480000 </ref>
  
==일제강점기(191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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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공업전습소 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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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일:구공업전습소본관.JPG|500픽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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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적(1981년 09월 25일 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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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대: 융희 2년=순종 2년(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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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재지: 서울 종로구 동숭동 169-1번지 (현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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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유주: 교육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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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제국 순종 융희 2년(1908)에 건립된 이 건물은 건편 997㎡의 2층 목조(木造)로서 당시의 탁지부(度支部) 건축소에서 설계했다. 당시의 목조건물로는 유일하게 남은 것으로 벽은 독일식 비늘판이며, 외형은 르네상스 양식을 모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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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건물은 본래 전환국시대로부터 기계시험소(機械試驗所)가 있던 터에다 1906년 공업전습소가 발족됨에 따라 그 본관으로 지은 것이다. 후일 국립공업시험원 본관이 되었고, 다시 통신대학에서 사용하여 오늘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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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계는 구 한국정부의 탁지부(度支部)건축소에서 전담하였고, 시공은 일본인 요시다겐조오(吉田謙造)가 밑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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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면은 H 자형으로 중앙부에 현관을 두었으며 외벽은 나무비늘판이음이고, 지붕은 기와이음이다. 특히 중앙 현관부 상부에는 탑을 두고, 탑위에 반원구의 돔을 얹었으며 좌우 양측 돌출부 1층과 2층 상부에는 파라디오(Palladio)가 즐겨쓴 디오크레티안윈도우(Dioclentian window)를 설치하여 전체적으로 르네상스시대의 빠랏조풍(Palazzo 風)을 이루고 있다.<ref>사진 및 내용 출처: 문화재청, "구 공업전습소 본관 (舊 工業傳習所 本館)",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pageNo=1_1_2_0&ccbaCpno=1331102790000</ref>
  
===구 공업전습소 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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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1910년대)'''==
  
===배화여자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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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배화학원 캐롤라이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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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일:서울_배화학원_캐롤라이나관.JPG|500픽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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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등록문화재(2017년 01월 06일 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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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대: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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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필운대로1길 34 (필운동, 배화여자대학교,배화여자중,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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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유주: 학교법인 배화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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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 배화여자고등학교는 1898년 10월 미국 남감리교 여선교사 캠벨(J. P. Campbell)에 의해 서울 종로구 내자동에서 캐롤라이나학당으로 설립되었다. 교육을 통한 기독교 복음 전파와 여성계몽을 목적으로 설립하여 초등교육을 실시하였고, 1916년 1월서울 종로구 필운동 현재의 위치로 교사를 이전하였다.1925년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로 개칭하고 이듬해에 캠벨기념관을 신축하였으며, 1938년 3월 배화고등여학교로 개칭하였다.<ref>"배화여자고등학교 (培花女子高等學校) - 한민족문화대백과",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1954</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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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때 캐롤라이나관은 1915년 지상 2층 규모로 신축된 이후, 1922년 3층과 4층(지붕층)을 증축하여 지상 4층 규모로 확장되었으며, 처음에는 교사로 건립하여 현재 과학관으로 쓰고 있는 건물이다. 전면과 후면에 출입구와 계단을 두고 그 양쪽으로 교실을 배치한 독특한 실내 공간 구성을 하고 있으며, 이는 입면(立面)상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외관의 특징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등록 명칭은 1898년 배화학당 당시 명칭인 '캐롤라이나 학당'을 이어 「서울 배화학원 캐롤라이나관」으로 부여하였다.<ref>사진 및 내용 출처: 문화재청, "서울 배화학원 캐롤라이나관 (서울 培花學院 캐롤라이나館)", 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pageNo=1_1_2_0&VdkVgwKey=79,06720000,11</ref>
  
===서울 중앙고등학교 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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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회동 백인제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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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일:백인제_가옥_안뜰_180707_01.jpg|500픽셀]]<ref> 사진 출처: "가회동 백인제 가옥 - 위키백과", By Jjw - 자작, CC BY-SA 4.0,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70654024</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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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특별시 시도민속문화재(1977년 03월 17일 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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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대: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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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재지:서울특별시 종로구 북촌로8길 16 (가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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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유주: 서울특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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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인제 가옥은 1913년 한성은행 전무였던 한상룡이 건립한 이래 한성은행, 최선익 등을 거쳐 1944년 백인제에게 소유권이 이전되었다. 한성은행이 소유했던 시절에는 천도교 단체가 가옥을 임차하여 지방에서 상경한 교도들의 숙소 겸 회합 장소로 사용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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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후 소유자인 최선익은 개성 출신의 청년 부호로, 1932년 27세의 나이로 조선중앙일보를 인수하여 민족운동가인 여운형을 사장으로 추대하는 등 민족 언론사에 중요한 자취를 남긴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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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4년 이후에는 당시 국내 의술계의 일인자였던 백인제와 그 가족이 소유하였으며, 건축적·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1977년 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 제22호로 지정되었다. 2009년 서울시에서 인수 후 문화재 개·보수 공사를 거쳐, 우리 한옥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전시·체험 공간으로 조성하여 2015.11.18 역사가옥박물관으로 개관하였다.<ref>"백인제가옥 - 서울역사박물관", https://museum.seoul.go.kr/www/intro/annexIntro/annex_22/annex_22_03.jsp?sso=ok</ref>
  
===가회동 백인제 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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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1920년대)'''==
  
==일제강점기(192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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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앙고등학교 서관, 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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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일:서울_중앙고등학교_서관_전경.jpg|500픽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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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적(1981년 09월 25일 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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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대: 1921(서관), 1923(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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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재지: 서울 종로구 창덕궁길 164 (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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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유주: 학교법인 고려중앙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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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고등학교는 민족선각자들이 교육을 통해 인재를 양성하여 나라를 구하겠다는 구국정신으로 설립한 학교다. 1908년 기호지방의 우국지사들이 설립한 기호학교(畿湖學校)가 1910년 흥사단에서 설립한 융희학교(隆熙學校)와 합병되면서 새롭게 탄생된 학교다. 1917년 제1회 졸업생인 김성수가 중학과정을 가르치던 이 학교를 인수한 후 백두산을 상징하는 백산학교로 이름을 바꾸려고 하였으나 일본의 방해로 결국 중앙고등보통학교라 이름짓고(1951년 3년제 중앙고등학교로 개편) 건물을 새로 지었는데, 가운데 본관을 중심으로 좌우에 동관과 서관을 2층 벽돌조로 지었다.<ref>김정신,"서울중앙고등학교 본관 (서울中央高等學校 本館) - 한민족문화대백과",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3827</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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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고등학교 서관은 1921년에 준공한 2층 붉은 벽돌집으로 1934년에 불탄 옛 본관의 오른편에 지었다. 동관과 쌍을 이루고 있으며 설계자와 시공자 모두 알려지지 않았다. 뾰족한 아치형의 창틀과 가파른 고딕식 지붕 및 화강암과 붉은 벽돌로 엇물려 쌓은 정교한 솜씨로 보아, 우리나라 20세기 전기 건축양식의 기념비적 건물이다. 또한 3·1운동 이후 조선 소년군 창설, 6·10만세운동, 광주학생운동을 시작한 곳이기도 하다.<ref>사진 및 내용 출처: 문화재청, "서울 중앙고등학교 서관 (서울 中央高等學校 西館)",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ulPageNo=1&region=1&searchCondition=%ec%84%9c%ec%9a%b8%ec%a4%91%ec%95%99%ea%b3%a0%eb%93%b1%ed%95%99%ea%b5%90&searchCondition2=&s_kdcdArr=&s_ctcdArr=&ccbaPcd1Arr=&ccbaKdcd=13&ccbaAsno=02820000&ccbaCtcd=11&ccbaCpno=1331102820000&ccbaCndt=&ccbaLcto=&stCcbaAsno=&endCcbaAsno=&stCcbaAsdt=&endCcbaAsdt=&chGubun=&header=view&returnUrl=%2fheri%2fcul%2fculSelectViewList.do&pageNo=1_1_1_0&sngl=Y</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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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고등학교 동관은 1923년 10월에 준공한 2층 붉은 벽돌집으로, 1934년에 불에 탄 옛 본관의 왼쪽에 지어 서관과 쌍을 이루고 있다. 건물구조는 T자형으로 서관과 동일하며 1920년대의 순수 민간인이 세운 사립학교 건물로서 현재까지 전해오는 건물이다.<ref>문화재청, "서울 중앙고등학교 동관 (서울 中央高等學校 東館)",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ulPageNo=1&region=1&searchCondition=%ec%84%9c%ec%9a%b8%ec%a4%91%ec%95%99%ea%b3%a0%eb%93%b1%ed%95%99%ea%b5%90&searchCondition2=&s_kdcdArr=&s_ctcdArr=&ccbaPcd1Arr=&ccbaKdcd=13&ccbaAsno=02830000&ccbaCtcd=11&ccbaCpno=1331102830000&ccbaCndt=&ccbaLcto=&stCcbaAsno=&endCcbaAsno=&stCcbaAsdt=&endCcbaAsdt=&chGubun=&header=view&returnUrl=%2fheri%2fcul%2fculSelectViewList.do&pageNo=1_1_1_0&sngl=Y</ref>
  
===서울 중앙고등학교 서관, 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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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 중앙대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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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일:서울_천도교_중앙대교당_전경.jpg|400픽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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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1978년 12월 18일 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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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대: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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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재지: 서울 종로구 삼일대로 457 (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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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유주: 천도교유지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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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도교의 중앙교당으로 종교의식과 일반 행사를 한다. 천도교교당은 여러 곳에 있으나 일정한 건축양식이 정해져 있지 않다. 그리고 타종교의 법당이나 성당, 예배당과 같이 절대 신성시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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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도교중앙대교당은 1918년 4월 5일 천도교 부구(部區) 총회에서 새로운 교당을 짓기로 결의, 이 해 12월 1일에 개기식(開基式)을 하였고, 1919년 7월에 착공하여, 1921년 2월에 준공, 2월 28일에 이사함으로써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규모는 대지 1,824평, 건평 212평이며, 기초는 화강석으로, 벽은 붉은 벽돌로, 지붕은 철근앵글로 중간에 기둥이 없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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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전면에 2층 사무실을 그 위에 탑모양의 바로크풍으로 높이 올렸다. 수용인원은 800명에서 1,000명이다. 천도교 제3대 교주 손병희(孫秉熙)는 처음 건평 400평 규모의 대교당을 계획하고 당국에 건축허가를 신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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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8년 7월에 조선총독부는 교당이 지나치게 거창하다는 것과 중앙에 기둥이 없어 위험하다는 구실을 붙여 불허하였다. 그래서 절반으로 줄여 겨우 허가를 받아 1919년 봄에 착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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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공사비는 교인 1호당 10원씩을 목표로 성금을 모아 약 30만 원을 모금, 충당하였다. 공사기간 중 시공자인 장시영의 구속과 자재구입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석재는 창신동 석산에서 채취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으나 붉은 벽돌 구입에 애로가 있었고, 천장 앵글철재는 미국에서 수입하였다. 총건축비는 22만 원(사무실까지 27만 원)이 소요되었고 나머지는 3·1운동자금으로 사용되었다.<ref>사진 및 내용 출처: 표영삼, "천도교 중앙대교당 (天道敎 中央大敎堂)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5823</ref>
  
===천도교 중앙대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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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1930년대)'''==
  
==일제강점기(193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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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앙고등학교 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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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일:중앙고등학교본관.jpg|500픽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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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적(1981년 09월 25일 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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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대: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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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재지: 서울 종로구 창덕궁길 164 (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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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유주: 고려중앙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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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건물은 1917년에 지은 구 중앙고등학교 본관이 1934년 화재로 소실된 후 한국인 건축가 박동진이 설계한 것으로 1937년 9월에 완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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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건물은 고딕식 학교건물로, 당시 유럽과 미국의 학교 건축의 영향을 받았다. 가운데 튜더 아치문의 주현관홀을 통과하면 뒷 정원이 나오는데 좌우로 적벽돌의 동관과 서관, 그리고 맞은편의 석조 신관이 둘러싸고 있다. 4층의 중앙탑은 앞뒤 모서리에 8각 소탑(turret)이 붙어있고, 1층은 튜더 아치, 2, 3층은 퇴창(또는 돌출창, bay window), 4층은 사각창, 그리고 꼭대기는 흉벽난간을 둘렀다. 좌우 익부의 측면 박공면이 정면과 후면을 향해 있어 본관의 정면뿐만 아니라 배면도 아름다운 파사드를 형성하고 있다. 창 둘레는 화강석 잔다듬으로 정교하게 마감하고, 벽면은 거친 다듬의 바른층 쌓기, 그리고 튜렛을 비롯하여 부분 부분에는 혹두기의 거친 다듬을 사용해 중후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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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 초기양식으로 민간인이 세운 학교의 기념비적 건물이며, 또한 우리나라 건축가에 의하여 설계되었다는 점에서 의의 있는 건물이다.<ref>사진 및 내용 출처: 김정신,"서울중앙고등학교 본관 (서울中央高等學校 本館) - 한민족문화대백과",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3827</ref>
  
===중앙고등학교 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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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홍파동 홍난파 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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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일:서울_홍파동_홍난파_가옥_전경.JPG|500픽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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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등록문화재(2004년 09월 04일 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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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대: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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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재지: 서울측별시 종로구 송월1길 38, 2-46 (홍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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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유주: 종로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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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특별시 종로구 홍파동에 있는 서양식 근대 건축물로 1930년에 독일인 선교사가 지었다고 전한다. 독일인 선교사가 거처한 다음에 세 사람의 한국인 소유자를 거쳐서, 1936년에 난파(蘭坡) 홍영후의 소유가 되었다. 홍난파는 1918년부터 1년 미만으로 일본의 도쿄에 유학한 적이 있었고, 1931년부터 2년간 미국의 시카고에 유학한 적이 있었다. 이러한 외국 생활의 경험이 홍난파가 이 집을 구매한 원인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홍난파는 1934년에 소프라노 이대형과 재혼하였기에, 홍난파 부부는 1936년부터 홍난파가 숨지는 1941년까지 함께 이 집에서 살았다. 1942년에 이 집의 소유자는 일본인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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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주택은 현재 본채, 별채, 외부 계단실의 세 덩어리로 구성되어 있다. 본채는 홍난파가 살았던 당시의 모습이고, 별채는 1967년 이후에 증축된 것이라고 추정한다. 계단실은 본채와 별채를 연결하기 위해 생겨난 것인데, 본채의 외벽에 덧대어 지하 2층까지 내려가는 별채를 지원하고 있다. 홍난파 가옥 전체에서 남쪽과 북쪽은 1개 층의 높이 차이가 있다. 본채의 현관은 남쪽에서 계단으로 1.42m 올라가서 나오고, 현관을 들어서면 오른쪽에 큰 방이 있고, 왼쪽에 거실과 작은 방이 나온다. 지금은 기념관으로 쓰면서 1층의 칸막이 벽들을 없앴다. 이 1층이 이 주택의 중심 공간으로 홍난파 선생의 대표곡들이 작곡된 곳이고, 거실에는 3개짜리 전구다발과 벽난로가 있다. 지하층에는 현관, 주방 겸 식당, 다락, 계단실이 있다. 지하층은 개념상 지하라고 지칭하지만, 경사로 인하여 부분적으로 지상인 셈이다. 1층의 현관 밑에 지하층의 현관이 있어서, 주인 가족과 하인들의 동선을 분리할 수가 있고, 본채 안에서 북쪽에 1층과 지하층을 연결하는 계단실이 마련되어 있다. 본채를 지은 다음에 차차 증축한 별채와 외부 계단실은 경사지의 공간을 알뜰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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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난파 가옥은 작곡가 홍난파의 자취가 서린 곳이라는 장소적 의미에 더하여, 1930년 이래 계단과 경사지를 사용한 서양풍 주택의 공간 활용이 그 이후에 지어지는 도시 단독주택의 선례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2004년 9월 4일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ref>사진 및 내용 출처: "서울 홍파동 홍난파 가옥 (서울 紅把洞 洪蘭坡 家屋)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7604</ref>
  
===[[박노수가옥(박노수미술관)]]===
+
==='''[[박노수가옥(박노수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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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참고)'''
  
 
+
=='''참고문헌'''==
 
 
==참고문헌==
 
 
*"대한민국의 근대 건축물",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B%8C%80%ED%95%9C%EB%AF%BC%EA%B5%AD%EC%9D%98_%EA%B7%BC%EB%8C%80_%EA%B1%B4%EC%B6%95%EB%AC%BC
 
*"대한민국의 근대 건축물",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B%8C%80%ED%95%9C%EB%AF%BC%EA%B5%AD%EC%9D%98_%EA%B7%BC%EB%8C%80_%EA%B1%B4%EC%B6%95%EB%AC%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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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 11일 (월) 19:25 기준 최신판


개요

조선 말기(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 사이에 지어진 건축문화재들 중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현존하는 건축물들에 대해 다룰 예정이다.

조선 후기 개화기

기기국 번사창

기기국 번사창.jpg
  • 서울특별시 시도유형문화재(1984년 12월 17일 지정)
  • 시대: 고종 21년(1884)
  •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로 118
  • 소유주: 한국은행
번사창(飜沙廠)은 1884년(고종 21)에 건축된 기기국(機器局)의 무기고로 건평 198㎡쯤 되는 이 집은 장대석과 사괴석(四塊石)으로 된 토대 위에 세워졌으며, 겉은 회색 벽돌로 벽체를 쌓았고, 붉은 벽돌로 견치형(犬齒形)의 띠를 두른 위에 왕대공 지붕틀이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놓여져서 맞배지붕을 이루고 있다.
출입문에는 아치를 틀었고 특히 정문은 화강석으로 꾸며졌으며, 측면문은 붉은 벽돌로 띠를 넣어 장식하고 있어서 매우 특이한 건축양식을 갖추고 있다.
일찍이 이곳 삼청동에는 군기시(軍器寺) 소속이던 화약도감(火藥都監)이 있었고, 이에 딸린 화약고 별창(別倉)이 있었다. 따라서, 별창자리에 번사창이 들어서면서 무기고를 겸한 화약제조소가 되었다.
이 집은 일제강점기에 세균실험실이 되었고 광복 후 미군정 때는 중앙방역연구소, 정부수립 후 국립사회복지연구원으로도 쓰이다가 1970년 한국은행 소유로 되었다.[1]

대한제국 시대

서울 대한의원

서울대한의원전경1(촬영년도2015년).JPG
  • 사적(1976년 11월 16일 지정)
  • 시대: 융희 2년=순종 2년(1908)
  • 소재지: 서울 종로구 연건동 28-21번지 (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내)
  • 소유주: 서울대학교 병원
서울 대한의원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내에 있는 대한제국시대의 대한의원 건물이다.
1907년 대한제국 정부가 임금의 명령에 의해 의정부 직속으로 창경궁의 바깥 정원인 함춘원의 언덕에 지었다. 일본인 기술자의 설계로 1907년 건물을 짓기 시작하여 1908년에 완성하였다. 처음에는 병동과 부검실, 의학교가 지어졌으나 현재는 본관건물만 남아 있다.
1910년 대한의원은 조선총독부의원으로 바뀌었고, 1911년에는 부속 의학강습소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1926년에는 경성제국 대학에 포함되면서 대학병원으로 되었다. 광복 뒤에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병원의 본관이 되었고, 1970년대말 새 건물이 세워진 뒤에 부속건물이 되었고, 현재는 서울대학교병원 부설 병원연구소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건물의 구조는 지상 2층으로 현관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형으로 되어 있으며, 자동차로 직접 현관까지 들어갈 수 있도록 현관에 차 대는 곳을 만들어 정면 입구를 강조한 것이 특징이다.
본관의 지붕은 앞면에서 봤을 때 사다리꼴 모양을 한 우진각 지붕이며, 중앙에 높이 솟은 시계탑은 바로크양식을 하고 있어 본격적인 서양식 건축물의 특징을 찾을 수 있다. [2]

구 공업전습소 본관

구공업전습소본관.JPG
  • 사적(1981년 09월 25일 지정)
  • 시대: 융희 2년=순종 2년(1908)
  • 소재지: 서울 종로구 동숭동 169-1번지 (현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내)
  • 소유주: 교육부
대한제국 순종 융희 2년(1908)에 건립된 이 건물은 건편 997㎡의 2층 목조(木造)로서 당시의 탁지부(度支部) 건축소에서 설계했다. 당시의 목조건물로는 유일하게 남은 것으로 벽은 독일식 비늘판이며, 외형은 르네상스 양식을 모방했다.
이 건물은 본래 전환국시대로부터 기계시험소(機械試驗所)가 있던 터에다 1906년 공업전습소가 발족됨에 따라 그 본관으로 지은 것이다. 후일 국립공업시험원 본관이 되었고, 다시 통신대학에서 사용하여 오늘에 이른다.
설계는 구 한국정부의 탁지부(度支部)건축소에서 전담하였고, 시공은 일본인 요시다겐조오(吉田謙造)가 밑아 하였다.
평면은 H 자형으로 중앙부에 현관을 두었으며 외벽은 나무비늘판이음이고, 지붕은 기와이음이다. 특히 중앙 현관부 상부에는 탑을 두고, 탑위에 반원구의 돔을 얹었으며 좌우 양측 돌출부 1층과 2층 상부에는 파라디오(Palladio)가 즐겨쓴 디오크레티안윈도우(Dioclentian window)를 설치하여 전체적으로 르네상스시대의 빠랏조풍(Palazzo 風)을 이루고 있다.[3]

일제강점기(1910년대)

서울 배화학원 캐롤라이나관

서울 배화학원 캐롤라이나관.JPG
  • 국가등록문화재(2017년 01월 06일 지정)
  • 시대: 1915
  •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필운대로1길 34 (필운동, 배화여자대학교,배화여자중,고등학교)
  • 소유주: 학교법인 배화학원
현 배화여자고등학교는 1898년 10월 미국 남감리교 여선교사 캠벨(J. P. Campbell)에 의해 서울 종로구 내자동에서 캐롤라이나학당으로 설립되었다. 교육을 통한 기독교 복음 전파와 여성계몽을 목적으로 설립하여 초등교육을 실시하였고, 1916년 1월서울 종로구 필운동 현재의 위치로 교사를 이전하였다.1925년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로 개칭하고 이듬해에 캠벨기념관을 신축하였으며, 1938년 3월 배화고등여학교로 개칭하였다.[4]
이때 캐롤라이나관은 1915년 지상 2층 규모로 신축된 이후, 1922년 3층과 4층(지붕층)을 증축하여 지상 4층 규모로 확장되었으며, 처음에는 교사로 건립하여 현재 과학관으로 쓰고 있는 건물이다. 전면과 후면에 출입구와 계단을 두고 그 양쪽으로 교실을 배치한 독특한 실내 공간 구성을 하고 있으며, 이는 입면(立面)상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외관의 특징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등록 명칭은 1898년 배화학당 당시 명칭인 '캐롤라이나 학당'을 이어 「서울 배화학원 캐롤라이나관」으로 부여하였다.[5]

가회동 백인제가옥

백인제 가옥 안뜰 180707 01.jpg[6]
  • 서울특별시 시도민속문화재(1977년 03월 17일 지정)
  • 시대: 1913
  • 소재지:서울특별시 종로구 북촌로8길 16 (가회동)
  • 소유주: 서울특별시
백인제 가옥은 1913년 한성은행 전무였던 한상룡이 건립한 이래 한성은행, 최선익 등을 거쳐 1944년 백인제에게 소유권이 이전되었다. 한성은행이 소유했던 시절에는 천도교 단체가 가옥을 임차하여 지방에서 상경한 교도들의 숙소 겸 회합 장소로 사용하기도 했다.
이후 소유자인 최선익은 개성 출신의 청년 부호로, 1932년 27세의 나이로 조선중앙일보를 인수하여 민족운동가인 여운형을 사장으로 추대하는 등 민족 언론사에 중요한 자취를 남긴 인물이다.
1944년 이후에는 당시 국내 의술계의 일인자였던 백인제와 그 가족이 소유하였으며, 건축적·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1977년 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 제22호로 지정되었다. 2009년 서울시에서 인수 후 문화재 개·보수 공사를 거쳐, 우리 한옥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전시·체험 공간으로 조성하여 2015.11.18 역사가옥박물관으로 개관하였다.[7]

일제강점기(1920년대)

서울 중앙고등학교 서관, 동관

서울 중앙고등학교 서관 전경.jpg
  • 사적(1981년 09월 25일 지정)
  • 시대: 1921(서관), 1923(동관)
  • 소재지: 서울 종로구 창덕궁길 164 (계동)
  • 소유주: 학교법인 고려중앙학원
중앙고등학교는 민족선각자들이 교육을 통해 인재를 양성하여 나라를 구하겠다는 구국정신으로 설립한 학교다. 1908년 기호지방의 우국지사들이 설립한 기호학교(畿湖學校)가 1910년 흥사단에서 설립한 융희학교(隆熙學校)와 합병되면서 새롭게 탄생된 학교다. 1917년 제1회 졸업생인 김성수가 중학과정을 가르치던 이 학교를 인수한 후 백두산을 상징하는 백산학교로 이름을 바꾸려고 하였으나 일본의 방해로 결국 중앙고등보통학교라 이름짓고(1951년 3년제 중앙고등학교로 개편) 건물을 새로 지었는데, 가운데 본관을 중심으로 좌우에 동관과 서관을 2층 벽돌조로 지었다.[8]
중앙고등학교 서관은 1921년에 준공한 2층 붉은 벽돌집으로 1934년에 불탄 옛 본관의 오른편에 지었다. 동관과 쌍을 이루고 있으며 설계자와 시공자 모두 알려지지 않았다. 뾰족한 아치형의 창틀과 가파른 고딕식 지붕 및 화강암과 붉은 벽돌로 엇물려 쌓은 정교한 솜씨로 보아, 우리나라 20세기 전기 건축양식의 기념비적 건물이다. 또한 3·1운동 이후 조선 소년군 창설, 6·10만세운동, 광주학생운동을 시작한 곳이기도 하다.[9]
중앙고등학교 동관은 1923년 10월에 준공한 2층 붉은 벽돌집으로, 1934년에 불에 탄 옛 본관의 왼쪽에 지어 서관과 쌍을 이루고 있다. 건물구조는 T자형으로 서관과 동일하며 1920년대의 순수 민간인이 세운 사립학교 건물로서 현재까지 전해오는 건물이다.[10]

천도교 중앙대교당

서울 천도교 중앙대교당 전경.jpg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1978년 12월 18일 지정)
  • 시대: 1921
  • 소재지: 서울 종로구 삼일대로 457 (경운동)
  • 소유주: 천도교유지재단
천도교의 중앙교당으로 종교의식과 일반 행사를 한다. 천도교교당은 여러 곳에 있으나 일정한 건축양식이 정해져 있지 않다. 그리고 타종교의 법당이나 성당, 예배당과 같이 절대 신성시하지 않는다.
천도교중앙대교당은 1918년 4월 5일 천도교 부구(部區) 총회에서 새로운 교당을 짓기로 결의, 이 해 12월 1일에 개기식(開基式)을 하였고, 1919년 7월에 착공하여, 1921년 2월에 준공, 2월 28일에 이사함으로써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규모는 대지 1,824평, 건평 212평이며, 기초는 화강석으로, 벽은 붉은 벽돌로, 지붕은 철근앵글로 중간에 기둥이 없게 지었다.
그리고 전면에 2층 사무실을 그 위에 탑모양의 바로크풍으로 높이 올렸다. 수용인원은 800명에서 1,000명이다. 천도교 제3대 교주 손병희(孫秉熙)는 처음 건평 400평 규모의 대교당을 계획하고 당국에 건축허가를 신청하였다.
1918년 7월에 조선총독부는 교당이 지나치게 거창하다는 것과 중앙에 기둥이 없어 위험하다는 구실을 붙여 불허하였다. 그래서 절반으로 줄여 겨우 허가를 받아 1919년 봄에 착공하였다.
총공사비는 교인 1호당 10원씩을 목표로 성금을 모아 약 30만 원을 모금, 충당하였다. 공사기간 중 시공자인 장시영의 구속과 자재구입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석재는 창신동 석산에서 채취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으나 붉은 벽돌 구입에 애로가 있었고, 천장 앵글철재는 미국에서 수입하였다. 총건축비는 22만 원(사무실까지 27만 원)이 소요되었고 나머지는 3·1운동자금으로 사용되었다.[11]

일제강점기(1930년대)

서울 중앙고등학교 본관

중앙고등학교본관.jpg
  • 사적(1981년 09월 25일 지정)
  • 시대: 1937
  • 소재지: 서울 종로구 창덕궁길 164 (계동)
  • 소유주: 고려중앙학원
본 건물은 1917년에 지은 구 중앙고등학교 본관이 1934년 화재로 소실된 후 한국인 건축가 박동진이 설계한 것으로 1937년 9월에 완공되었다.
이 건물은 고딕식 학교건물로, 당시 유럽과 미국의 학교 건축의 영향을 받았다. 가운데 튜더 아치문의 주현관홀을 통과하면 뒷 정원이 나오는데 좌우로 적벽돌의 동관과 서관, 그리고 맞은편의 석조 신관이 둘러싸고 있다. 4층의 중앙탑은 앞뒤 모서리에 8각 소탑(turret)이 붙어있고, 1층은 튜더 아치, 2, 3층은 퇴창(또는 돌출창, bay window), 4층은 사각창, 그리고 꼭대기는 흉벽난간을 둘렀다. 좌우 익부의 측면 박공면이 정면과 후면을 향해 있어 본관의 정면뿐만 아니라 배면도 아름다운 파사드를 형성하고 있다. 창 둘레는 화강석 잔다듬으로 정교하게 마감하고, 벽면은 거친 다듬의 바른층 쌓기, 그리고 튜렛을 비롯하여 부분 부분에는 혹두기의 거친 다듬을 사용해 중후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근대 초기양식으로 민간인이 세운 학교의 기념비적 건물이며, 또한 우리나라 건축가에 의하여 설계되었다는 점에서 의의 있는 건물이다.[12]

서울 홍파동 홍난파 가옥

서울 홍파동 홍난파 가옥 전경.JPG
  • 국가등록문화재(2004년 09월 04일 지정)
  • 시대: 1930
  • 소재지: 서울측별시 종로구 송월1길 38, 2-46 (홍파동)
  • 소유주: 종로구청
서울특별시 종로구 홍파동에 있는 서양식 근대 건축물로 1930년에 독일인 선교사가 지었다고 전한다. 독일인 선교사가 거처한 다음에 세 사람의 한국인 소유자를 거쳐서, 1936년에 난파(蘭坡) 홍영후의 소유가 되었다. 홍난파는 1918년부터 1년 미만으로 일본의 도쿄에 유학한 적이 있었고, 1931년부터 2년간 미국의 시카고에 유학한 적이 있었다. 이러한 외국 생활의 경험이 홍난파가 이 집을 구매한 원인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홍난파는 1934년에 소프라노 이대형과 재혼하였기에, 홍난파 부부는 1936년부터 홍난파가 숨지는 1941년까지 함께 이 집에서 살았다. 1942년에 이 집의 소유자는 일본인으로 바뀌었다.
이 주택은 현재 본채, 별채, 외부 계단실의 세 덩어리로 구성되어 있다. 본채는 홍난파가 살았던 당시의 모습이고, 별채는 1967년 이후에 증축된 것이라고 추정한다. 계단실은 본채와 별채를 연결하기 위해 생겨난 것인데, 본채의 외벽에 덧대어 지하 2층까지 내려가는 별채를 지원하고 있다. 홍난파 가옥 전체에서 남쪽과 북쪽은 1개 층의 높이 차이가 있다. 본채의 현관은 남쪽에서 계단으로 1.42m 올라가서 나오고, 현관을 들어서면 오른쪽에 큰 방이 있고, 왼쪽에 거실과 작은 방이 나온다. 지금은 기념관으로 쓰면서 1층의 칸막이 벽들을 없앴다. 이 1층이 이 주택의 중심 공간으로 홍난파 선생의 대표곡들이 작곡된 곳이고, 거실에는 3개짜리 전구다발과 벽난로가 있다. 지하층에는 현관, 주방 겸 식당, 다락, 계단실이 있다. 지하층은 개념상 지하라고 지칭하지만, 경사로 인하여 부분적으로 지상인 셈이다. 1층의 현관 밑에 지하층의 현관이 있어서, 주인 가족과 하인들의 동선을 분리할 수가 있고, 본채 안에서 북쪽에 1층과 지하층을 연결하는 계단실이 마련되어 있다. 본채를 지은 다음에 차차 증축한 별채와 외부 계단실은 경사지의 공간을 알뜰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홍난파 가옥은 작곡가 홍난파의 자취가 서린 곳이라는 장소적 의미에 더하여, 1930년 이래 계단과 경사지를 사용한 서양풍 주택의 공간 활용이 그 이후에 지어지는 도시 단독주택의 선례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2004년 9월 4일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13]

박노수가옥(박노수미술관)

(페이지 참고)

참고문헌

각주

  1. 사진 및 내용 출처: 김영상, "번사창 (飜沙廠)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2514
  2. 사진 및 내용 출처: 문화재청, "서울 대한의원 (서울 大韓醫院)",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pageNo=1_1_2_0&ccbaCpno=1331102480000
  3. 사진 및 내용 출처: 문화재청, "구 공업전습소 본관 (舊 工業傳習所 本館)",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pageNo=1_1_2_0&ccbaCpno=1331102790000
  4. "배화여자고등학교 (培花女子高等學校) - 한민족문화대백과",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1954
  5. 사진 및 내용 출처: 문화재청, "서울 배화학원 캐롤라이나관 (서울 培花學院 캐롤라이나館)", 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pageNo=1_1_2_0&VdkVgwKey=79,06720000,11
  6. 사진 출처: "가회동 백인제 가옥 - 위키백과", By Jjw - 자작, CC BY-SA 4.0,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70654024
  7. "백인제가옥 - 서울역사박물관", https://museum.seoul.go.kr/www/intro/annexIntro/annex_22/annex_22_03.jsp?sso=ok
  8. 김정신,"서울중앙고등학교 본관 (서울中央高等學校 本館) - 한민족문화대백과",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3827
  9. 사진 및 내용 출처: 문화재청, "서울 중앙고등학교 서관 (서울 中央高等學校 西館)",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ulPageNo=1&region=1&searchCondition=%ec%84%9c%ec%9a%b8%ec%a4%91%ec%95%99%ea%b3%a0%eb%93%b1%ed%95%99%ea%b5%90&searchCondition2=&s_kdcdArr=&s_ctcdArr=&ccbaPcd1Arr=&ccbaKdcd=13&ccbaAsno=02820000&ccbaCtcd=11&ccbaCpno=1331102820000&ccbaCndt=&ccbaLcto=&stCcbaAsno=&endCcbaAsno=&stCcbaAsdt=&endCcbaAsdt=&chGubun=&header=view&returnUrl=%2fheri%2fcul%2fculSelectViewList.do&pageNo=1_1_1_0&sngl=Y
  10. 문화재청, "서울 중앙고등학교 동관 (서울 中央高等學校 東館)",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ulPageNo=1&region=1&searchCondition=%ec%84%9c%ec%9a%b8%ec%a4%91%ec%95%99%ea%b3%a0%eb%93%b1%ed%95%99%ea%b5%90&searchCondition2=&s_kdcdArr=&s_ctcdArr=&ccbaPcd1Arr=&ccbaKdcd=13&ccbaAsno=02830000&ccbaCtcd=11&ccbaCpno=1331102830000&ccbaCndt=&ccbaLcto=&stCcbaAsno=&endCcbaAsno=&stCcbaAsdt=&endCcbaAsdt=&chGubun=&header=view&returnUrl=%2fheri%2fcul%2fculSelectViewList.do&pageNo=1_1_1_0&sngl=Y
  11. 사진 및 내용 출처: 표영삼, "천도교 중앙대교당 (天道敎 中央大敎堂)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5823
  12. 사진 및 내용 출처: 김정신,"서울중앙고등학교 본관 (서울中央高等學校 本館) - 한민족문화대백과",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3827
  13. 사진 및 내용 출처: "서울 홍파동 홍난파 가옥 (서울 紅把洞 洪蘭坡 家屋)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76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