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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하계 베를린 올림픽과 일장기 말소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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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베를린 올림픽의 마라톤 경기<ref>1936년 8월 9일</ref>는 우승 후보로 꼽히던 아르헨티나의 후안 사발라와 손기정의 다툼이었다. 결국 후반의 막바지 코스인 비스마르크 언덕에서 손기정이 앞서 가던 사발라를 추월하면서 손기정의 우승으로 결판이 났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의 마라톤 경기<ref>1936년 8월 9일</ref>는 우승 후보로 꼽히던 아르헨티나의 후안 사발라와 손기정의 다툼이었다. 결국 후반의 막바지 코스인 비스마르크 언덕에서 손기정이 앞서 가던 사발라를 추월하면서 손기정의 우승으로 결판이 났다.  
  

2023년 12월 9일 (토) 23:39 판

목차

손기정.jpg

개요

일제강점기부터 대한민국 정부 수립 초기까지 활약했던 대한민국의 육상 선수. 한국인 운동선수 최초로 올림픽을 제패한 한국 체육계의 선구자다.


정보

  • 출생일: 1912년 10월 9일
  • 출생지: 일제강점기 평안북도 의주부
  • 사망일: 2002년 11월 15일
  • 사망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 국적: 일본 제국령 조선,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한민국
  • 직업: 육상 선수, 스포츠 행정가, 수필가, 저술가
  • 학력: 양정고등보통학교
    보성전문학교[1]
    메이지대학 [2]

생애

전반

일제 강점기 시절 조선의 평안북도 의주부 광성면 민포리에서 출생[3]하여 성장했다. 보통학교 5학년이었던 1926년에 해일이 발생해 동네가 바닷물에 잠겨 학업을 중단하고 장사에 나섰다. 14세의 나이로 참외장사, 각설탕 장사, 군밤장사 등을 했다. 덕분에 2학기부터 약죽보통학교에 다시 다닐 수 있었으나, 6학년 졸업을 할 때까지 낮에는 학교에 가고 저녁에는 장사해야 하였다. 손기정은 집에서 학교까지 약 2킬로미터의 자갈길을 항상 뛰어다녔다고 한다.

손기정은 양정고등보통학교에서 공부하였는데, 개신교 사상가인 김교신 선생이 교사로 일한 학교였으므로 김교신 선생과 교사와 제자로서의 친분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36년 하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후 인촌 김성수의 권유로 보성전문학교 상과에 입학하지만, 일제의 감시로 자퇴했다. 그 후 다시는 육상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1940년에 일본의 메이지 대학에 입학하여 법학부를 졸업했다. 그는 중학교 시절부터 육상 선수로 활약했으며, 1933년부터 1936년까지 마라톤 대회 13개에 참가했고 그 중 10개에서 우승했다. 그는 1935년 11월 3일에 2시간 26분 42초의 비공인 세계 신기록을 세웠으며, 이 기록은 1947년까지 유지되었다. 개인 최고 기록은 이보다 더 좋은데, 표준 마라톤보다 더 긴 코스(42.715 km)에서는 2시간 25분 14초, 더 짧은 코스에서는 2시간 24분 51초를 기록했다.

1990년대 이후 간혹 방송과 인터뷰에 참여하였다. 2002년 11월 15일에 지병이던 만성 신부전증과 폐렴으로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에서 향년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사후 체육훈장 청룡장이 추서되었다. 서울역 서부 출구에서 멀지 않은 그의 모교가 있었던 자리에는 손기정공원과 손기정 기념관이 만들어졌다. 손기정 기념관은 나라를 잃은 어려운 시절, 세계를 재패해 우리 민족의 긍지를 높여준 손기정 선수[4]의 뜻을 기리고, 국제적인 스포츠 관광자원으로 개발하고자 1918년 만리동에 건립된 손기정 선수[5]의 모교인 양정의숙 건물을 리모델링 하여 손기정 탄생 100주년인 2012년 10월 14일에 개관하였다.


독립운동 및 업적

1936년 하계 베를린 올림픽과 일장기 말소 사건

일장기말소.png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의 마라톤 경기[6]는 우승 후보로 꼽히던 아르헨티나의 후안 사발라와 손기정의 다툼이었다. 결국 후반의 막바지 코스인 비스마르크 언덕에서 손기정이 앞서 가던 사발라를 추월하면서 손기정의 우승으로 결판이 났다.

손기정은 42.195km를 2시간 29분 19.2초에 주파해 당시 올림픽 신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땄다. 1936년 당시에는 대한제국이 일본의 지배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그는 일본 대표팀에서 뛰어야 했고, 이름의 로마자 표기도 일본식으로 읽은 손 기테이(Son Kitei, そん きてい)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하지만 손기정은 한국어 이름으로만 서명했으며 그 옆에 한반도를 그려 넣기도 했다. 인터뷰에서도 그는 자신의 모국이 대한민국이라고 밝혔다. 시상식 때도 태극기가 아닌 일장기가 올라오는 것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그는 경기 후 일본 선수단이 여는 축하 파티에 참석하지 않고 베를린의 조선인 두부공장에서 열린 우승을 축하하는 모임에 참석하였다.

당시 조선중앙일보와 동아일보가 그의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워서 기사를 게재한 일장기 말소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동아일보 사회부장이었던 현진건이 1년간 감옥에서 복역하는 등 언론노동자들이 탄압을 당했으며, 체육계에서 나름 입김이 있었던 인사이자 손기정과 친분이 있었던 여운형 조선중앙일보 사장도 고초를 겪었다. 손기정도 조선으로 귀국할 당시 환영 대신 경찰들로부터 연행 대우를 받았고, 전차를 타는 것조차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아야 했다.

손기정은 유럽 여러 나라와 인도를 거쳐 싱가포르에 도착했을 때 그는 선배로부터 “주의하라. 본국에서 사고가 나서 일본인들이 너희를 감시하라는 전문이 선수단에 들어왔다”는 얘기를 들었다. 동아일보가 손기정 가슴의 일장기를 지워 게재한 사실 때문이라고 했다. 신문이 정간되고 많은 기자가 복역을 하는 등 고초를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손기정은 ‘다시는 마라톤을 하지 말아야겠다’고 재차 다짐했다. 가는 곳마다 일본경찰이 손기정을 감시했다. 마치 사상범을 다루듯 몸을 검색하기도 했다. 그는 “마라톤 우승을 반납하고 싶다”고까지 말했다.

광복 이후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대한체육회 부회장, 1963년에 대한육상경기연맹 부회장을 역임했으며, 1966년 아시안 게임에서 한국 대표단장으로 참가하였다. 1971년에는 올림픽 위원회(KOC) 위원, 1981년부터 1988년까지는 서울 올림픽 조직 위원을 역임하였고, 1988년 서울 올림픽 개회식에서 성화 봉송 최종 주자로 나섰다. 각각 1947년과 1950년에 코치직으로 활동하여 보스턴 마라톤에서 우승한 마라토너 서윤복과 함기용의 코치로 활동해 이들을 훈련시켰고,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황영조는 손기정이 자신의 정신적 지주였다고 밝혔다. 1983년 《나의 조국 나의 마라톤》 자서전을 통해 당시 상황과 심정을 밝혔다. 고려대학교에서 경영학과 명예졸업장을 전달다.


수상

  • 1936년 1936년 하계 올림픽대회 육상 남자 마라톤 금메달
  • 1957년 대한민국 체육상
  • 1963년 혁명정부 문화공로상
  • 1967년 바킬라아베베상
  • 1967년 서울신문사 체육상
  • 1968년 국제육상경기연맹 공로상
  • 1970년 국민훈장 모란장
  • 1982년 국제육상경기연맹 창립 70주년 특별기념상
  • 2002년 체육훈장 청룡장

관련 동영상


관련 서적

  • <나의 조국 나의 마라톤>, 손기정 저. 한국일보사.

  1. 상과
  2. 법학과
  3. 1938년 평안북도 신의주부 남민포동으로 편입
  4.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5. 21회 졸업
  6. 1936년 8월 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