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10월 9일, 평안북도 의주부 광성면 민포동(現 신의주시 민포동)[6]에서 아버지 손인석(孫仁錫)과 어머니 김복녀 사이의 3형제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나[7] 고향에서 소년기를 보냈다. 위로 맏형 손기만(孫基萬)과 둘째 형 손기용(孫基用)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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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시절 조선의 평안북도 의주부 광성면 민포리에서 출생<ref>1938년 평안북도 신의주부 남민포동으로 편입</ref>하여 성장했다. 보통학교 5학년이었던 1926년에 해일이 발생해 동네가 바닷물에 잠겨 학업을 중단하고 장사에 나섰다. 14세의 나이로 참외장사, 각설탕 장사, 군밤장사 등을 했다. 덕분에 2학기부터 약죽보통학교에 다시 다닐 수 있었으나, 6학년 졸업을 할 때까지 낮에는 학교에 가고 저녁에는 장사해야 하였다. 손기정은 집에서 학교까지 약 2킬로미터의 자갈길을 항상 뛰어다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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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당시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그랬듯이 매우 가난했는데, 그래서 손기정은 학비와 용돈을 벌기 위해 길거리에서 옥수수나 참외 장사를 하기도 하고 우동집에서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손기정은 이 당시에 호떡을 매우 좋아했으나, 당시 호떡이 꽤 비싸서(5전) 많이 사 먹을 수가 없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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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정은 양정고등보통학교에서 공부하였는데, 개신교 사상가인 김교신 선생이 교사로 일한 학교였으므로 김교신 선생과 교사와 제자로서의 친분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36년 하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후 인촌 김성수의 권유로 보성전문학교 상과에 입학하지만, 일제의 감시로 자퇴했다. 그 후 다시는 육상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1940년에 일본의 메이지 대학에 입학하여 법학부를 졸업했다. 그는 중학교 시절부터 육상 선수로 활약했으며, 1933년부터 1936년까지 마라톤 대회 13개에 참가했고 그 중 10개에서 우승했다. 그는 1935년 11월 3일에 2시간 26분 42초의 비공인 세계 신기록을 세웠으며, 이 기록은 1947년까지 유지되었다. 개인 최고 기록은 이보다 더 좋은데, 표준 마라톤보다 더 긴 코스(42.715 km)에서는 2시간 25분 14초, 더 짧은 코스에서는 2시간 24분 51초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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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과 학교가 2km 거리에 있었는데 어린 시절부터 그 거리를 매일 달려 다녔고, 심지어 노는 시간에도 압록강변을 달려 다녔을 정도로 뛰는 것을 좋아했는데, 이 때 막연하게 운동 선수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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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이후 간혹 방송과 인터뷰에 참여하였다. 2002년 11월 15일에 지병이던 만성 신부전증과 폐렴으로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에서 향년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사후 체육훈장 청룡장이 추서되었다. 서울역 서부 출구에서 멀지 않은 그의 모교가 있었던 자리에는 손기정공원과 손기정 기념관이 만들어졌다. 손기정 기념관은 나라를 잃은 어려운 시절, 세계를 재패해 우리 민족의 긍지를 높여준 손기정 선수<ref>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ref>의 뜻을 기리고, 국제적인 스포츠 관광자원으로 개발하고자 1918년 만리동에 건립된 손기정 선수<ref>21회 졸업</ref>의 모교인 양정의숙 건물을 리모델링 하여 손기정 탄생 100주년인 2012년 10월 14일에 개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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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정의 모친 김복녀 여사는 어린 아들이 운동보다는 공부로 성공하길 바랐고, 아들이 달리지 못하도록 잘 벗겨지는 여아용 고무신을 신겨보기도 했다. 그럼에도 손기정은 고무신을 새끼줄로 묶어서 달렸고, 새끼줄에 발목이 쓸려서 피가 나도 아랑곳하지 않고 달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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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 및 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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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하계 베를린 올림픽과 일장기 말소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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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손기정의 재능을 눈여겨본 당시 담임교사였던 이일성이 손기정에게 육상 선수가 될 것을 권유했고, 약죽보통학교 5학년 때부터 육상선수로 활약했다. 고향 신의주에서 열린 육상대회 장거리 종목에서 1, 2위를 다툴 정도로 실력 있는 선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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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베를린 올림픽의 마라톤 경기<ref>1936년 8월 9일</ref>는 우승 후보로 꼽히던 아르헨티나의 후안 사발라와 손기정의 다툼이었다. 결국 후반의 막바지 코스인 비스마르크 언덕에서 손기정이 앞서 가던 사발라를 추월하면서 손기정의 우승으로 결판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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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보통학교 졸업 후 생계가 막막해져서 육상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는데, 1932년 이일성 선생이 그를 일본에서 학업과 일을 병행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고된 노동으로 도저히 학업을 이어갈 수가 없게 되자, 6개월 만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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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어느 회사의 점원으로 취직하여 학업과 육상을 병행할 수 있었는데, 그 회사의 사장은 당시 신의주시에서 동익상회를 하던 공정규로, 안과의사 겸 국어학자 공병우 박사의 부친이었다. 손기정은 이곳에서 일을 하며 쉬는 날에는 압록강변을 달리며 연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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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경성부에서 열린 제 2회 동아 마라톤에 출전했는데 서울의 복잡한 지리를 몰라서 삼각지 로터리에서 길을 잃었고 아쉽게 2위를 했다. 그러나 이 경기 이후 인생이 바뀌었는데, 당대의 걸출한 마라토너들이 배출된 양정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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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양정고등보통학교 육상부 중장거리팀은 한반도 내에서만 유명했지만, 기록만 보면 세계적 수준이었다고 한다. 운동에 전념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자, 더욱 마라톤 훈련에 매진했고, 그 결과 이듬해 제3회 동아 마라톤에서는 우승을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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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도쿄 메이지 신궁대회에서 마라톤 풀코스에 처음 출전하여, 2시간 26분 42초이라는 비공인 세계 신기록으로 우승을 차지한다. 공식 세계신기록으로 인정받지는 못했는데, 당시 비서구권에서 열린 대회는 대회 운영이나 코스 길이를 신뢰할 수 없었던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비공인이긴 하지만, 세계적으로 마라톤 풀코스에서 최초로 2시간 30분의 벽을 깬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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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듬해 열린 조선육상경기대회에서도 역시 1위를 차지하며 단번에 장거리 육상의 기대주로 떠올랐다. 이 당시 13개의 대회에 출전하여 10번의 우승을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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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으로 메이지 신궁대회 마라톤 종목은 손기정을 시작으로 이후 3개 대회 연속으로 한국인들이 1위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1935년 손기정-1937년 유장춘-1939년 오동우가 그 주인공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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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베를린 올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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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936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 동갑내기이자 양정고등보통학교 동기였던 남승룡과 베를린 올림픽 대표 선발전에 참가했다. 일본 육상계에서는 당연히 순수 일본인을 뽑고 싶어했겠지만, 실력자라는 것에 이견이 없는 손기정과 남승룡을 떨어뜨리기엔 눈치가 보여서[10] 대표팀으로 발탁한다. 헌데 일본 육상계는 4년 전 1932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당시 일본 국적으로 출전했던 조선인 선수 김은배, 권태하가 일본 선수의 페이스 메이커를 해주려던 전략을 무시하고 각각 6위, 9위에 랭크되었던 악몽이 있어서, 일본 육상팀은 이 대회에서는 반드시 일본 선수를 많이 뽑으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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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대표 선발전에서 1위에 남승룡, 2위에 손기정이 랭크되자, 일본 대표팀은 억지를 부려서라도 이 둘을 탈락시키려는 속셈으로 수작을 부렸다. 현지에서 컨디션 조절을 하고 쉬어도 모자랄 판에, 그렇게 일본 육상팀의 억지로 전대미문의 2차 선발전 현지 테스트가 열렸고, 이것도 모자라 일본 측에서는 이 둘을 탈락시키기 위해 일본 선수 스즈키 히로시게, 타마오 시와쿠를 후보로 추가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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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렇게 꼼수를 부리고도 레이스 내내 일본 선수 2명이 이 둘을 따라잡지 못하자 일본 선수들은 몰래 코스를 이탈하면서 지름길로 가는 반칙까지 저질렀고, 이를 본 손기정과 남승룡은 분노하며 반드시 이기자고 다짐하고 달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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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2차 선발전에서도 손기정과 남승룡은 사이좋게 1, 2위를 나눠 가졌다.[한편] 여담으로 지름길로 왔으면서도 늦게 들어온 일본 선수들에게 남승룡은 뺨따귀까지 날리며 격분했다고. 시원시원하고 활발한 손기정에 비해 남승룡은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이었다고 전해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렇게까지 했을 정도면 화가 얼마나 났을지 짐작할 수가 있다. 어쨋건 2차 예선에서 현지 적응에 실패하여 컨디션 난조를 보인 스즈키[12]가 기권하며 1936년 일본 대표팀 마라톤 출전선수 손기정, 남승룡, 타마오 시와쿠 3인으로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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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일본에서는 "조선인들이 대일본제국의 대표라는 것이 말이 되느냐?"라는 반발의 목소리가 있었지만, 이 둘이서 별 말 없이 실력으로 찍어내려 주니 그런 의견은 쏙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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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손기정.pngl200pxlcenterl1936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출발 사진. 맨 왼쪽에서 달리는 382번 선수가 손기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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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8월 9일 열린 올림픽 본선 경기에서 '2시간 29분 19초'로 당시 올림픽 신기록을 기록하며 금메달을 획득했다. 같이 출전한 남승룡은 동메달을 획득했다. 사실, 손기정의 금메달에 가려져 있기는 하지만 남승룡도 막판에 스퍼트를 내면서 무려 30명을 추월하여 3위로 골인하는 대단한 모습을 보여줬다. 한편 대표팀으로 함께 출전한 유일한 일본인이었던 타마오 시와키는 현지 트레이닝 도중 생긴 물집으로 인해 완주에 실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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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손기정2.pngl골인 직후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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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손기정3.pngl손기정이 받은 1936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등록문화재 제48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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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육인으로서는 최고의 영광이라 할 수 있는 올림픽 금메달을 땄지만, 그가 올림픽 경기 직후 친구에게 보낸 엽서에는 "슬프다"(당시 한글 표기로는 '슬푸다')라는 석 자가 쓰여 있어, 많은 한국인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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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손기정슬프다.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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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상식 사진을 보면 1위와 3위로 각각 단상에 올라선 손기정과 남승룡 모두 어두운 표정을 지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손기정은 묘목으로 가슴의 일장기를 가리고 있다. 남승룡은 어떻게 해서든 바지를 명치까지 끌어올려 일장기를 가리고자 했다. 인생에서 가장 기뻐해야할 날에 오히려 슬픔에 사무친 나라 잃은 두 청년의 감정이 그대로 전해져 오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콧날이 시큰해질만한 사진이다. 은메달을 수상한 뒤의 영국 선수의 밝은 표정과 대조적이다. 동메달을 차지했던 남승룡은 훗날, "기정이가 우승해서 금메달을 땄다는 사실보다, 묘목을 받아 그것으로 일장기를 가릴 수 있다는 것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라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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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에 있는 일장기를 삭제한 사진을 실어서 동아일보가 정간당한 일장기 말소사건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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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일장기말소.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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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판국이니 조선총독부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조선총독부는 엄중한 통제와 감시 속에 그를 귀국시켰고, 이 탓에 올림픽 영웅에 걸맞는 환영 인파는 찾아볼 수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손기정이 정말로 찬밥 대우를 받은 것은 절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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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정은 42.195km를 2시간 29분 19.2초에 주파해 당시 올림픽 신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땄다. 1936년 당시에는 대한제국이 일본의 지배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그는 일본 대표팀에서 뛰어야 했고, 이름의 로마자 표기도 일본식으로 읽은 손 기테이(Son Kitei, そん きてい)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하지만 손기정은 한국어 이름으로만 서명했으며 그 옆에 한반도를 그려 넣기도 했다. 인터뷰에서도 그는 자신의 모국이 대한민국이라고 밝혔다. 시상식 때도 태극기가 아닌 일장기가 올라오는 것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그는 경기 후 일본 선수단이 여는 축하 파티에 참석하지 않고 베를린의 조선인 두부공장에서 열린 우승을 축하하는 모임에 참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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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정은 일련의 사건을 통해 일제 치하 조선의 대중들에게 암묵적으로 큰 인기와 존경을 얻었으며, 이 당시 국내의 신문광고, 특히 의약품, 식품 광고는 손기정의 올림픽 금메달을 축하하는 메시지를 담는 광고가 많았다. 특히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과자 광고에는 '이 과자를 먹고 쑥쑥 커 손기정과 같은 사람이 되겠다'라는 식의 카피라이트가 유독 많았다. 손기정의 마라톤 우승은 당시 일본 식민지 치하 조선인들에게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고, 시골 아낙들도 올림픽이 무엇인지 알 정도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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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조선중앙일보와 동아일보가 그의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워서 기사를 게재한 일장기 말소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동아일보 사회부장이었던 현진건이 1년간 감옥에서 복역하는 등 언론노동자들이 탄압을 당했으며, 체육계에서 나름 입김이 있었던 인사이자 손기정과 친분이 있었던 여운형 조선중앙일보 사장도 고초를 겪었다. 손기정도 조선으로 귀국할 당시 환영 대신 경찰들로부터 연행 대우를 받았고, 전차를 타는 것조차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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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상록수》의 저자 심훈은 손기정의 우승을 찬양하며 "오오 조선의 남아여!"라는 시를 짓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이 시는 심훈이 같은 해인 1936년 9월 갑작스럽게 장티푸스에 걸려 병사하면서 그의 마지막 시가 되었다. 시의 전문은 심훈 문서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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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정은 유럽 여러 나라와 인도를 거쳐 싱가포르에 도착했을 때 그는 선배로부터 “주의하라. 본국에서 사고가 나서 일본인들이 너희를 감시하라는 전문이 선수단에 들어왔다”는 얘기를 들었다. 동아일보가 손기정 가슴의 일장기를 지워 게재한 사실 때문이라고 했다. 신문이 정간되고 많은 기자가 복역을 하는 등 고초를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손기정은 ‘다시는 마라톤을 하지 말아야겠다’고 재차 다짐했다. 가는 곳마다 일본경찰이 손기정을 감시했다. 마치 사상범을 다루듯 몸을 검색하기도 했다. 그는 “마라톤 우승을 반납하고 싶다”고까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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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손기정은 스포츠 영웅이 되어 금의환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상술된 사건 때문에 떳떳이 활동할 수 없었다. 일장기 말소사건을 통해 조선 민중의 민족의식 강화를 바짝 경계하던 조선총독부는 아무 죄 없는 손기정에게 사복경찰을 붙여서 감시했고, 손기정은 심적으로 무척 괴로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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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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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대한체육회 부회장, 1963년에 대한육상경기연맹 부회장을 역임했으며, 1966년 아시안 게임에서 한국 대표단장으로 참가하였다. 1971년에는 올림픽 위원회(KOC) 위원, 1981년부터 1988년까지는 서울 올림픽 조직 위원을 역임하였고, 1988년 서울 올림픽 개회식에서 성화 봉송 최종 주자로 나섰다. 각각 1947년과 1950년에 코치직으로 활동하여 보스턴 마라톤에서 우승한 마라토너 서윤복과 함기용의 코치로 활동해 이들을 훈련시켰고,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황영조는 손기정이 자신의 정신적 지주였다고 밝혔다. 1983년 《나의 조국 나의 마라톤》 자서전을 통해 당시 상황과 심정을 밝혔다. 고려대학교에서 경영학과 명예졸업장을 전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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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문에 따르면 의지의 승리를 찍은 영화 감독 레니 리펜슈탈과 심지어 아돌프 히틀러까지도 손기정에게 상당히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손기정이 우승했음에도 불구하고 경박하게 굴지 않고 일견 우울한 듯 보일 정도로 과묵한 태도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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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피아에서 손기정이 꽤 비중을 차지하는 것으로 보았을 때 리펜슈탈이 이 동양인 선수에게서 정말로 깊은 인상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둘은 1956년에 다시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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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아돌프 히틀러가 손기정을 '동맹인 일본의 국민'으로 간주해서 좋은 인상을 받았다는 말도 있는데, 사실 이는 잘못된 정보이다. 전쟁 당시 동맹국이란 것만 알고 있으면 나오는 오류로, 올림픽 당시에는 독일에겐 일본은 적국이었다.[21] 히틀러는 그의 성격상 단순히 체력과 정신력을 많이 소모하는 근본있는 메인 종목에서 약자들을 찍어누르고 승리한 가장 강인한 인간에 대한 존경심 정도만을 가졌을 확률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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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대전의 일본 제국은 승전국 포지션으로 이것저것 뜯어갔기 때문에 공산주의와 일본을 견제한다고 중국 국민당군을 정예화 시켜놓은게 독일이다. 이 군사적 지원 때문에 중일전쟁 초기에 질질끌리게 된 원인 중 하나이니 말 다한 셈이다. 다만 올림픽 이후 방공협정을 맺어 동맹을 맺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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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히틀러는 출전 소속만 일본으로 되어 있을 뿐 손기정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주지하고 있었다.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이 우승하자 독일 방송들은 이렇게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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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 der Japanische Sieger Son kommen muss, der Koreanische Student, er hat die Streitmacht der Welt zertrummert, mit asiatischer Fähigkeit und Energie ist der Koreaner durch 일본의 우승자 손기정이 옵니다, 조선 대학생 손기정은 전세계의 경쟁자들을 아시아의 능력과 에너지로 눌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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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 베를린 올림픽 우승 이후 일본에서 우승 소감을 녹음한 내용이 레코드로 남아 있는데, 들어보면 손기정의 고향인 신의주 억양이 배어나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이 내용은 손기정의 자발적인 발언이 아닌 일본에 의해 미리 준비된 원고를 읽는 것에 불과했기에, 손기정의 진심이 담겨 있다고 보긴 어렵다. 심지어(아래에서는 생략했지만) 누군가가 옆에서 끼어들어 '크게 해라'고 협박하는 것도 고스란히 녹음되어 녹음 당시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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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rame width="640" height="360" src="https://www.youtube.com/embed/DORlbxFcdN8" title="손기정 선수 올림픽 마라톤 우승 제패 소감 육성(1936년 녹음) Kijung Son: The winning comment of olympic marathon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 allowfullscreen></ifr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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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정: 저는 손기정입니다. 24년 간의 숙망을 달성하려고 우리들은 중대한 책임을 지고, 8월 9일 오후 3시에 스타트에 나섰습니다. 이때 나는 신궁대회 때 스타트와 같은 가벼운 기분이었습니다. 이 정도이면 반드시 우승하리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쟈바라가 먼저 뛰어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내 페이스대로 달렸습니다. 나는 침착한 태도로 달리었습니다. 그러면서 앞에서 달리고 있는 외국인들을 따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영국인 하파가 곧 내 앞에서 달리고 있었습니다. 32km를 앞두고 하파와 함께 전 회의 우승자인 아루젠친[24]의 쟈바라를 따라버리었습니다. 그리고 하파와 함께 나는 한동안 똑같이 달리고 있었습니다. 하파를 따라버리기에는 무한히 어려웠습니다. 내 전신에 아직도 힘이 가득하였으므로 능히 우승할 자신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인제 즉 문제의 언덕에 다다르니 우리나라 일장기가 나를 응원하여 주는 것이 보이었습니다. 좌등 코취 역시 응원 중의 한 사람이 되어 큰 기를 흔들면서 '인제는 6km가 남았다' 고 큰 고함을 지르는 소리에 일층 더 나는 용기를 내었습니다. 2번째 언덕에 도달하였을 때도 역시 이곳에 나를 응원하여 주는 우리나라 일장기가 날리고 있었습니다. 이때 수많은 응원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인제는 1km 반이 남았다'고 고함치는 소리가 내 귀를 울려주었습니다. 나는 무의식 중에서 죽을 힘을 다 하여 더 뛰기 시작하였습니다.그리하여 나는 이기었습니다. 기록의 시간은 2시간 29분 19초 2의 올림픽 신기록이었습니다. 하파가 나보다 2분 4초 지나치어 들어왔습니다. 그 뒤를 이어 남 군이 원기있게 달려들어왔습니다. 이때의 반가움은 내 입으로서는 형언할 수 없습니다. 오후 6시 15분 나는 하파와 남 군과 함께 표창대에 올랐습니다. 장엄한 우리나라 국가가 엄숙하게 내 귀를 울려줄 뿐이었습니다. 이때의 기쁨은 내 일생을 통하야 잊히지 않을 것입니다.이 승리는 결코 내 개인의 승리가 아니라 전 우리 일본 국민의 승리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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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게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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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승리야말로 내 개인의 달린 힘보담도 우리나라 동포 여러분들의 열렬한 응원의 결정(結晶)인줄 생각하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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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메달 획득 소감. 일본 당국이 써 준 대본을 그대로 읽은 것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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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피아슈타디온 베를린의 수상자 명패에는 '손기정' 대신 '손 기테이(SON, Kitei)'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와 관련된 사건으로 1970년에 신민당 제7대 국회의원이었던 박영록이 야간에 베를린 올림픽 기념관에 불법 침입하여 기념비에 새겨져 있던 손기정의 국적을 훼손하여 불법 침입, 절도 및 공공재산파손혐의로 체포영장이 발부되었으나 체포되기 전에 한국으로 도망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박 의원이 무엇을 훔쳤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서독 경찰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JAPAN이라는 글자를..." 국적을 한국(KOREA)으로 고치기 위해 이 5개 문자를 다른 우승비에서 떼어모았으니 명백한 기물파손이며 도려낸 일본(JAPAN)의 문자는 그대로 들고 도망갔으므로 절도 혐의도 적용됐지만 시대가 시대이다 보니 송환되어 처벌을 받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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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올림픽 위원회는 선수 시절과 은퇴 후의 국적이 달라졌다고 해서 이름이나 국적을 은퇴 후 기준으로 수정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식민지 출신 선수가 종주국 대표로 나와서 메달 딴 건 손기정, 남승룡 말고도 많으며, 그들 역시 종주국 선수로 기록에 남아있다. 혹시라도 은퇴 전에 독립해서 독립국 선수로 나오는 경우도, 독립 전후의 국적을 다르게 기록할 뿐이다. 민족, 출신지, 정체성, 올림픽 이후의 활동 다 필요 없고 오직 대회 당시 소속 하나만 보는 것이다. 이런 사례를 공식 인정할 경우 국적 변경을 요구하는 다른 사례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고, 각국은 외국 대표 선수라도 조금이라도 자기 나라와 관련이 있는 선수는 자기 나라로 고쳐 달라고 요구할 가능성이 높으며, 이럴 경우 국적 분류가 완전히 흔들리기 때문이다.[29] 한 번 기록되면 평생 정도가 아니라 영원토록 남는 것이다. 그 때문에 현재 IOC에서는 공식적으로 'Kitei Son, Japan'으로 기록하고 있다. 대신 약력에는 당시 일제 치하에 있던 한국인 출신이었음이 강조되며, 후일 일어난 일장기 말소사건까지 기록되어 있다. 2011년 12월 9일에 국제올림픽위원회는 손기정의 '대한민국' 국적은 인정했지만, 역사 왜곡(Historical Distortion)을 방지하기 위하여 약력에 있는 국적 자체를 바꾸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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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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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양정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보성전문학교 상과(商科)에 입학했다. 당시 보전에는 재정학을 가르치는 홍성하(洪性夏) 교수가 체육부장을 맡고 있었다. 홍 교수는 뜨거운 민족주의자여서 학교 스포츠를 장려해 학생들의 사기를 진작시키자는 지론을 갖고 있었다. 그 지론으로 김성수(金性洙) 교장을 설득, 1937년에 전조선의 중등학교를 졸업하는 우수 운동선수 다수를 뽑아 상과에 수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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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정은 보성전문학교 육상부를 대표해 1937년 봄에 조선학생육상연맹이 주최하는 2개 대회에 출전, 보성전문의 우승에 기여했다. 그 대회 중 하나는 4월 25일에 거행된 조선학생 수원~경성간 역전경주대회.[31] 당시의 학제는 3월 졸업, 4월 입학이었으니까 입학한 지 며칠 되지 않아 5명이 이어 달리는 보전팀 최종 주자로 시흥~서울운동장 간을 역주, 7개 팀 중 최선두를 달려 보전을 우승하게 했던 것이다. 그리고 6월 5~6일에는 서울운동장에서 조선학생육상대회가 거행되었는데 첫날엔 1,500m, 이튿날엔 5,000m에서 우승했다. 당시 보전엔 박찬규, 백승욱, 인강환 등 장사들이 즐비했다. 이들이 포환, 원반, 해머던지기 등에 활약한 데다 손기정의 장거리 우승을 더하여 보전은 종합 우승을 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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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손기정이 보전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치자, 조선총독부는 이를 골치 아프게 생각했다. 당시 1930년대 중반에 조선인 학생이 진학할 수 있는 고등교육기관 가운데 조선인이 교장인 학교는 보전뿐이었고, 교수들 가운데엔 창문을 닫게 하고 한국어로 강의하는 이도 있었다. 그런 학교에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손기정이 재학하면서 육상대회에서 활약하자 그는 하루 아침에 영웅이 되어 보전에는 그를 중심으로 서클이 형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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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는 손기정이 보전에 다니는 것을 꺼렸고 조선에 있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총독부의 관헌은 손기정을 주야로 감시했고 이를 견디다 못한 손기정은 1937년 2학기에 반강제로 보성전문을 중퇴하고 일본 내지로 건너가 도쿄의 메이지대학 전문부 법과에 편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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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도쿄에서도 일본 관헌은 손기정이 마라톤을 달리고 육상경기대회에 출전하는 것을 막았다. 해마다 양력 정초엔 도쿄~하코네 간 대학대항역전대회가 거행되었다. 손기정을 맞은 메이지대학은 그 역전에서 성적을 올리게 되었다고 좋아했으나 그는 달릴 수가 없었다. 일본 관헌이 공중 앞에서 손기정이 달리는 것을 금지했던 것이다. 결국 손기정은 메이지대학 전문부를 졸업한 후 1944년까지 조선저축은행에서 은행원으로 일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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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 및 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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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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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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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1936년 하계 올림픽대회 육상 남자 마라톤 금메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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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대한민국 체육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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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혁명정부 문화공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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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바킬라아베베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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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서울신문사 체육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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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국제육상경기연맹 공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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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국민훈장 모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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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국제육상경기연맹 창립 70주년 특별기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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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체육훈장 청룡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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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동영상'''===
==='''관련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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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ml><iframe width="656" height="369" src="https://www.youtube.com/embed/1P_5aicCuL0" title="광복절 다시 보는 손기정의 질주"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 allowfullscreen></iframe></html>
일제 강점기 시절 조선의 평안북도 의주부 광성면 민포리에서 출생[3]하여 성장했다. 보통학교 5학년이었던 1926년에 해일이 발생해 동네가 바닷물에 잠겨 학업을 중단하고 장사에 나섰다. 14세의 나이로 참외장사, 각설탕 장사, 군밤장사 등을 했다. 덕분에 2학기부터 약죽보통학교에 다시 다닐 수 있었으나, 6학년 졸업을 할 때까지 낮에는 학교에 가고 저녁에는 장사해야 하였다. 손기정은 집에서 학교까지 약 2킬로미터의 자갈길을 항상 뛰어다녔다고 한다.
손기정은 양정고등보통학교에서 공부하였는데, 개신교 사상가인 김교신 선생이 교사로 일한 학교였으므로 김교신 선생과 교사와 제자로서의 친분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36년 하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후 인촌 김성수의 권유로 보성전문학교 상과에 입학하지만, 일제의 감시로 자퇴했다. 그 후 다시는 육상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1940년에 일본의 메이지 대학에 입학하여 법학부를 졸업했다. 그는 중학교 시절부터 육상 선수로 활약했으며, 1933년부터 1936년까지 마라톤 대회 13개에 참가했고 그 중 10개에서 우승했다. 그는 1935년 11월 3일에 2시간 26분 42초의 비공인 세계 신기록을 세웠으며, 이 기록은 1947년까지 유지되었다. 개인 최고 기록은 이보다 더 좋은데, 표준 마라톤보다 더 긴 코스(42.715 km)에서는 2시간 25분 14초, 더 짧은 코스에서는 2시간 24분 51초를 기록했다.
1990년대 이후 간혹 방송과 인터뷰에 참여하였다. 2002년 11월 15일에 지병이던 만성 신부전증과 폐렴으로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에서 향년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사후 체육훈장 청룡장이 추서되었다. 서울역 서부 출구에서 멀지 않은 그의 모교가 있었던 자리에는 손기정공원과 손기정 기념관이 만들어졌다. 손기정 기념관은 나라를 잃은 어려운 시절, 세계를 재패해 우리 민족의 긍지를 높여준 손기정 선수[4]의 뜻을 기리고, 국제적인 스포츠 관광자원으로 개발하고자 1918년 만리동에 건립된 손기정 선수[5]의 모교인 양정의숙 건물을 리모델링 하여 손기정 탄생 100주년인 2012년 10월 14일에 개관하였다.
독립운동 및 업적
1936년 하계 베를린 올림픽과 일장기 말소 사건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의 마라톤 경기[6]는 우승 후보로 꼽히던 아르헨티나의 후안 사발라와 손기정의 다툼이었다. 결국 후반의 막바지 코스인 비스마르크 언덕에서 손기정이 앞서 가던 사발라를 추월하면서 손기정의 우승으로 결판이 났다.
손기정은 42.195km를 2시간 29분 19.2초에 주파해 당시 올림픽 신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땄다. 1936년 당시에는 대한제국이 일본의 지배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그는 일본 대표팀에서 뛰어야 했고, 이름의 로마자 표기도 일본식으로 읽은 손 기테이(Son Kitei, そん きてい)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하지만 손기정은 한국어 이름으로만 서명했으며 그 옆에 한반도를 그려 넣기도 했다. 인터뷰에서도 그는 자신의 모국이 대한민국이라고 밝혔다. 시상식 때도 태극기가 아닌 일장기가 올라오는 것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그는 경기 후 일본 선수단이 여는 축하 파티에 참석하지 않고 베를린의 조선인 두부공장에서 열린 우승을 축하하는 모임에 참석하였다.
당시 조선중앙일보와 동아일보가 그의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워서 기사를 게재한 일장기 말소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동아일보 사회부장이었던 현진건이 1년간 감옥에서 복역하는 등 언론노동자들이 탄압을 당했으며, 체육계에서 나름 입김이 있었던 인사이자 손기정과 친분이 있었던 여운형 조선중앙일보 사장도 고초를 겪었다. 손기정도 조선으로 귀국할 당시 환영 대신 경찰들로부터 연행 대우를 받았고, 전차를 타는 것조차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아야 했다.
손기정은 유럽 여러 나라와 인도를 거쳐 싱가포르에 도착했을 때 그는 선배로부터 “주의하라. 본국에서 사고가 나서 일본인들이 너희를 감시하라는 전문이 선수단에 들어왔다”는 얘기를 들었다. 동아일보가 손기정 가슴의 일장기를 지워 게재한 사실 때문이라고 했다. 신문이 정간되고 많은 기자가 복역을 하는 등 고초를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손기정은 ‘다시는 마라톤을 하지 말아야겠다’고 재차 다짐했다. 가는 곳마다 일본경찰이 손기정을 감시했다. 마치 사상범을 다루듯 몸을 검색하기도 했다. 그는 “마라톤 우승을 반납하고 싶다”고까지 말했다.
광복 이후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대한체육회 부회장, 1963년에 대한육상경기연맹 부회장을 역임했으며, 1966년 아시안 게임에서 한국 대표단장으로 참가하였다. 1971년에는 올림픽 위원회(KOC) 위원, 1981년부터 1988년까지는 서울 올림픽 조직 위원을 역임하였고, 1988년 서울 올림픽 개회식에서 성화 봉송 최종 주자로 나섰다. 각각 1947년과 1950년에 코치직으로 활동하여 보스턴 마라톤에서 우승한 마라토너 서윤복과 함기용의 코치로 활동해 이들을 훈련시켰고,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황영조는 손기정이 자신의 정신적 지주였다고 밝혔다. 1983년 《나의 조국 나의 마라톤》 자서전을 통해 당시 상황과 심정을 밝혔다. 고려대학교에서 경영학과 명예졸업장을 전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