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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 8일 (금) 17:13 판

보안회 (保安會)

정의

1904년 7월 13일, 서울 종로 백목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로, 일본의 황무지 침탈을 저지하기 위해 창립된 단체이다.
회(會)의 명칭은 ‘보국안민(輔國安民)’을 뜻한다. [1]


설립 배경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일어난 뒤 전세가 일본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자 일본은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 체결을 강요하고, 이어서 각종 이권을 탈취하는 등 경제적 침탈을 강화하였다.

6월에 나가모리(長森藤吉郎)가 어공원(御供院) 소관의 산림, 천택(川澤)과 황무지 개간권을 이양 받고자 일본공사를 통해 대한제국 정부에 압력을 가해왔다. 이에 유학(幼學)과 품관(品官)들은 반대 상소운동을 벌였고, 각 언론기관도 반대 사설을 실어 여론 형성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일제가 이 계획을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보다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반대운동을 벌여야 할 필요성을 느낀 송수만(宋秀萬), 심상진(沈相震)등이 1904년 7월 13일서울 종로 백목전(白木廛)에서 중민회의(衆民會議)를 열어 보안회를 발기하였다.



활동

  • 1904.07.13
1. 종로 백목전에 모인 100여 명의 시민들 앞에서 송수만은 황무지를 일본에게 차여(借與)함은 불가하며 황무지 차여에 중개 역할을 한 국내 인사들을 성토하자는 요지의 연설을 했다.
2. 대한 제국 경위원(警衛院)과 경무청에서 경찰관을 파견하고, 일본 헌병사령부에서는 헌병을 파견하여 집회를 감시하고 참석자들을 해산시켰다.
  • 1904.7.14
- 100여 명이 백목전에 모여, 일본의 요구를 철폐시킬 때까지 매일 집회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송수만, 심상진 등은 전국에 통문을 발하고 정부의 각 부서와 대관들의 집에 공함(公函)을 보내어, 보안회 임시회의소에서 회동할 것을 요구했다.
  • 1904.07.16
- 집회에서는 회장에 신기선(申箕善), 부회장에 송인섭(宋寅燮)을 천거하고, 회의를 주재하는 대변회장(代辯會長)에 송수만을 선출했다. 이날 회의가 진행되고 있을 때, 일본 경찰이 시민들의 격렬한 저항을 무릅쓰고 송수만과 송인섭을 붙잡아 갔다. 대한 제국 외부에서는 일본공사에게 송수만과 송인섭을 붙잡아 간 것에 대해 항의하고, 두 사람의 신병을 한국 관아로 인도할 것을 요청했다.
  • 1904.07.17
- 고종은 경무청에 칙령을 내려 보안회의 집회를 금지&해산하게 했다. 이에 보안회는 7월 17일부터 전동(典洞)의 한어학교(漢語學校)로 회의 개최 장소를 이전하고 일본공사관에 구속된 송수만 대신 원세성을 대변회장으로 선출했다. 그리고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와 송수만·송인섭 등의 체포에 대해 격렬히 성토하는 운동을 계속해 나갔다.
  • 1904.07.20~21
- 한어학교에서 또다시 대규모 시민 대회를 개최했다. 이 대회에는 회원뿐만 아니라 수천 명의 서울 시민들이 모여들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시민 대회의 연단에 오른 연사들은 일본의 대한 제국 산림·천택·원야·진황지 개간 이권 요구를 격렬하게 성토하고, 송수만과 송인섭을 일본 측에서 부당하게 체포 구금하고 있는 것을 강력하게 규탄했다.
  • 1904.07.22
- 한어학교의 시민 대회 도중 일본 경찰이 들어와 보안회원들을 총으로 위협하며 원세성, 심상진 등 회원들을 체포했다. 일본군이 무력을 이용하여 한어학교를 완전히 폐쇄하였으나, 보안회원들은 이에 굴복하지 않고 종로로 나와 시민들과 함께 가두 투쟁을 시작했다. 일본 기마헌병대들이 권총과 일본도를 휘두르며 위협하였으나 보안회 회원들과 시위 군중들은 전혀 해산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더욱 분노하여 격렬한 가두 투쟁을 계속했다.
- 결국 이날 밤 11시가 되자 일본 헌병대는 수백 명의 무장한 헌병들을 추가로 출동시켰고, 보안회는 어둠 속에서 무장한 일본 헌병대와 충돌하면 살상자가 발생할 것을 염려하여 일단 해산을 결정했다. 7월 22일 오전 9시부터 밤 11시까지 이어진 집회와 시위, 가두 투쟁은 보안회의 민족 운동이 절정을 이룬 것이었으며, 또 일본군 정면으로 가장 격렬하게 대치한 운동이었다.

해산

일본의 황무지 점탈 계획이 저지당한 뒤, 일본군은 회장 원세성과 회원 신형균·이범석 등을 다시 체포하는 등 보안회에 대한 보복을 자행했다. 또한 한국 국민들을 위협할 목적으로 8월 1일 저녁 서울 시내 중요한 거리에 일본군 병참사령부 표목을 박았다. 이는 서울이 일본군 지배하에 있음을 한국 국민들에게 상기시키고, 한일의정서에 따라 일본군이 군사상 필요한 토지를 수용할 수 있다고 위협하기 위한 행위였다.


보안회 회원들은 일제의 황무지 침탈을 저지하는 목적을 달성했으므로 창립 당시 강령에 따라 보안회를 사실상 해체하여 종결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이 원세성 등을 체포하고 석방하지 않는 것을 보고, 보안회의 속개를 준비했다.


8월 29일 전동의 입전 도가(立廛 都家)에서 약 70여 명의 속개 준비 회원들이 모여 이건석(李建奭)을 회장을 선출하며 보안회를 다시 열었다. 그러자 곧바로 일본 헌병대와 경관들이 와서 회장 이건석을 체포하였다. 일본군 헌병사령관은 새로운 회명을 짓고 사전허락을 받을 것을 요구했고, 회원들은 새로운 출발의 의미로 9윌 11일에 회의 명칭을 ‘협동회(協同會)’로 개칭하여 운동을 계속하기로 결의했다. 협동회의 활동은 일제의 견제를 받아 점차 위축되었다.


역사적 의의


  • 보안회에서 벌인 황무지개척 반대운동은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를 방불하게 하는 민중 구국운동이었다. 이로 인해 일제는 1908년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설치될 때까지 황무지개척권에 관한 거론을 유보하게 되었다.


황무지 개간 반대 운동 사진이다.
황무지 개간 반대 운동을 주도한 보안회의 신문 기사 사진이다.



  • 창립 이후 단 1개월 정도의 짧은 기간 동안 활동했음에도 민중의 폭넓은 지지를 얻으며 일제의 무력 위협에 대항했다.
    보안회의 민족 운동은 대한 제국 정부를 움직여 결국 일제의 황무지 침탈을 저지하는데 성공했다.


  • 보안회가 대한 제국 정부의 금령과 일제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성공함으로써, 그 뒤를 이어 애국계몽운동 단체들이 연달아 창립되고 구국 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각주

  1. “나라 일을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뜻으로 최제우(崔濟愚, 1824~1864)가 동학을 창도할 때에 외세로부터 국권을 지킬 것을 강조한 계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