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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미술관은 서울 성북구 성북로에 위한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 미술관으로,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이 수집한 고미술품을 정리, 연구, 전시하여 일제에 의해 왜곡된 우리의 역사를 바로잡고 민족문화의 자긍심을 되찾고자 설립하였다. | 간송미술관은 서울 성북구 성북로에 위한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 미술관으로,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이 수집한 고미술품을 정리, 연구, 전시하여 일제에 의해 왜곡된 우리의 역사를 바로잡고 민족문화의 자긍심을 되찾고자 설립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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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미술문화재단, "미술관 소개", http://kansong.org/museum/museum_info/ | 간송미술문화재단, "미술관 소개", http://kansong.org/museum/museum_info/ | ||
</br>"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 - 한민족문화대백과",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0539</ref> | </br>"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 - 한민족문화대백과",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0539</ref> |
2023년 12월 7일 (목) 20:52 판
목차
개요
간송미술관은 서울 성북구 성북로에 위한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 미술관으로,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이 수집한 고미술품을 정리, 연구, 전시하여 일제에 의해 왜곡된 우리의 역사를 바로잡고 민족문화의 자긍심을 되찾고자 설립하였다.
==연혁==[2]
- 간송 전형필은 한국 최초의 근대 건축가 박길룡에게 미술관 건축을 의뢰하였고, 박길룡의 설계를 바탕으로 보화각(葆華閣)1938년 완공되었다.
- 1962년 전형필이 사망하자 아들인 전성우(全晟雨)와 전영우(全暎雨) 등이 1966년 보화각을 '간송미술관'으로 개칭하고 한국민족미술연구소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1971년 유물들이 일반에 공개되었다.
- 이때 간송미술관은 미술관은 한국민족미술연구소의 부설기관으로 되어 있어 미술관은 미술품의 보관, 전시 업무를, 연구소는 이를 바탕으로 한 연구 사업을 맡고 있다.
주요 소장품
『훈민정음(해례본)』 (국보 제70호)
- 시대: 조선 세종 28년(1446)
- 이 책은 새로 창제된 훈민정음을 왕의 명령으로 정인지 등 집현전 학사들이 중심이 되어 세종 28년(1446)에 만든 한문해설서이다. 책이름을 글자이름인 훈민정음과 똑같이 ‘훈민정음’이라고도 하고, 해례가 붙어 있어서 ‘훈민정음 해례본’또는 ‘훈민정음 원본’이라고도 한다. 전권 33장 1책의 목판본이나, 앞 2장은 1940년경에 복원된 부분이다.
- 구성을 보면 총 33장 3부로 나누어, 제1부는 훈민정음의 본문을 4장 7면으로 하여 면마다 7행 11자씩, 제2부는 훈민정음해례를 26장 51면 3행으로 하여 면마다 8행 13자씩, 제3부는 정인지의 서문을 3장 6면에 1자 내려싣고, 그 끝에 ‘정통 11년’(1446)이라 명시하고 있다.
- 『세종실록』에 의하면 훈민정음은 세종 25년(1443)에 왕이 직접 만들었으며, 세종 28년(1446)에 반포한 것으로 되어있는데, 이 책에서 서문과 함께 정인지가 근작(謹作)하였다는 해례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또한 한글의 제작원리도 확연하게 드러났다.[3]
청자 상감운학문 매병 (국보 제68호)
- 시대: 고려시대(12세기 후반)
- 고려 매병(梅甁)은 중국 송(宋)나라 매병에서 유래된 것이지만, 12세기경에 이르러서는 고려만의 풍만하면서도 유연한 선의 아름다움이 나타난다. 이러한 고려 매병의 양식은 이 작품에서 세련미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 높이 42.1㎝, 입지름 6.2㎝, 밑지름 17㎝의 크기의 매병의 구연부는 작고 낮으며 밖으로 살짝 벌어져 있다. 어깨는 넓고 당당한 모습을 보여준다. 구연부의 아랫부분에는 꽃무늬를 둘렀으며 굽 위로는 연꽃무늬를 둘렀다. 몸통 전면에는 구름과 학을 새겨 넣었는데, 흑백상감한 원 안에는 하늘을 향해 날아가는 학과 구름무늬를, 원 밖에는 아래쪽을 향해 내려가는 학과 구름무늬를 새겼다.
- 학의 진행방향을 다르게 표현한 것은 도자기 표면이라는 일정한 제약을 넘어 사방으로 공간을 확산시켜 짜여진 구획으로부터의 자유로움을 추구한 듯하다. 이같은 표현상의 변화 추구와 함께 문양처리의 능숙함에서 고려 도자기의 우수함과 고려인의 창의력을 엿볼 수 있다.[4]
금동계미명삼존불입상 (국보 제72호)
신윤복 필 미인도 (보물 제1973호)
각주
- ↑ [사진 출처: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 - 한민족문화대백과]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0539
- ↑ 참고문헌:
간송미술문화재단, "미술관 소개", http://kansong.org/museum/museum_info/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 - 한민족문화대백과",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0539 - ↑ 문화재청,"국보 훈민정음 (訓民正音)",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VdkVgwKey=11,00700000,11&pageNo=1_1_1_0.
- ↑ 문화재청, "국보 청자 상감운학문 매병 (靑磁 象嵌雲鶴文 梅甁)",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jsessionid=f1lOWsLb6aJg9mmycm2EfZaEvayhda4Wa81y2E5rcfy73GTGniEgOUANwPxsPNy3.cpawas_servlet_engine1?pageNo=1_1_2_0&ccbaCpno=111110068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