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미사변"의 두 판 사이의 차이
Dreamingjoe (토론 | 기여) |
Dreamingjoe (토론 | 기여) |
||
33번째 줄: | 33번째 줄: | ||
[[분류:근대역사인물]] | [[분류:근대역사인물]] | ||
− | [[분류:고종훈]] | + | [[분류: 고종훈 ]] |
2023년 12월 7일 (목) 20:31 판
개요
을미사변은 1895년 10월 8일 새벽 일본낭인들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사건이다.
원인
러시아와의 전쟁을 준비하던 일본은 조선과 러시아의 관계의 핵심에 명성황후가 있다고 생각하고, 조선에서의 러시아의 주도권을 빼앗기 위해서 명성화후 시해를 계획한다.
진행
주한영국공사의 보고문
“ 건청궁의 앞뒷문을 통해 일본군의 엄호하에 침입한 민간인 복장의 일본인들은 한 무리의(조선군 복장을 한)군인들과 함께 일본군 장교와 사병들이 경비를 서 주었다. 그들은 곧바로 왕과 왕후의 처소로 돌진하여 몇몇은 왕과 왕태자의 측근들을 붙잡았고, 다른 자들은 왕후의 침실로 향하였다. 이 때 궁내에 있던 궁내부대신 이경직(李耕稙)은 서둘러 왕후에게 급보를 전하였고, 왕후와 궁녀들이 잠자리에서 뛰쳐나와 숨으려던 순간이었다. 그 때 흉도들이 달려 들어오자 이경직은 왕후를 보호하기 위해 두 팔을 벌려 가로막았다. 흉도들 중 하나가 왕후를 찾아내기 위해 왕후의 사진을 손에 지니고 있었던 데다, 그의 그러한 행동은 오히려 흉도들에게(왕후를 알아보게 하는) 용이한 단서가 되었다. 이경직은 내려친 칼날에 양팔목을 잘려 중상을 입고 쓰러져 피를 흘리며 죽었다. 왕후는 뜰 아래로 뛰쳐나갔지만 곧 붙잡혀 넘어뜨려졌다. 그 뒤 흉도들은 왕후의 가슴을 짓밟으며 일본도를 휘둘러 거듭 내려 쳤다. 실수가 없도록 확실히 해치우기 위해 그들은 왕후와 용모가 비슷한 몇몇 궁녀들까지 함께 살해하였다. 그 때 왕후의 의녀(女侍醫)가(가까스로 용기를 내어) 앞으로 나아가 손수건으로 왕후의 얼굴을 가려 주었다. 한 둘의 시신이 숲에서 불태워 지고, 나머지는 궁궐밖으로 옮겨가 처리되었다”(『주한영국영사의 보고문』).
서양선교사들의 '북화첩보'
다만 상해에서 서양의 선교사들이 발간한 ‘북화첩보’(北華捷報: The North China Herald)에서는 조선과 일본주재 통신원의 다양한 보고를 토대로 이렇게 보도하였다.
“사건의 주모자는 이노우에이며, 미우라가 조선공사로 임명될 때 이미 그가 이노우에의 희생양이라는 것이 잘 알려져 있었다. …… 이 사건은 미우라가 일본을 떠나오기 전에 계획된 것이다.”
결국 사건의 지휘계통은 ‘이토내각(배후)->이노우에(중개역)->미우라(하수역)’였다는 뜻이다.
영향
친러파의 몰락, 친일파의 득세
다시 흥선대원군에게 주도가 잡히고 3차 김홍집 내각이 출범된다.
내각은 친미파,친러파는 대거 해임되고 친일파위주의 내각으로 이루어진다.
을미의병
황후의 죽음으로 전국의 유생들의 상소가 빗발치고 전국에서 자결을 하거나 단식을 하는 경우가 일어난다.
결국 이것은 친일내각타도를 위한 의병활동[1] 으로 이어지게 된다.
아관파천
아관파천(俄館播遷)은 1896년 2월 11일, 고종과 측근 인사들의 요청에 러시아공사가 동의하여 고종과 왕세자가 비밀리에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사건이다. 을미사변 이후 신변의 위협을 느끼던 고종과 측근 인사들의 요청에 러시아공사 베베르가 동의하여 비밀리에 고종과 왕세자가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사건이다. 아관파천으로 인해 친일 내각이 무너졌고, 고종은 경운궁 환궁 전 1년 동안 러시아공사관에 머물렀다.
- ↑ 을미의병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