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서울"의 두 판 사이의 차이

dh_edu
이동: 둘러보기, 검색
 
(같은 사용자의 중간 판 10개는 보이지 않습니다)
1번째 줄: 1번째 줄:
 +
[[파일:주간서울.jpg|섬네일|오른쪽|『주간서울』 반민특위 공판기사]]
 
==개요==
 
==개요==
[[파일:주간서울.jpg|100픽셀|center|『주간서울』 반민특위 공판기사]]
 
 
1947년 8월 5일에 해방공간에 발행된 민족주의적 성향의 종합 시사주간지인 『주간서울』을 설명하는 페이지이다.</br>
 
1947년 8월 5일에 해방공간에 발행된 민족주의적 성향의 종합 시사주간지인 『주간서울』을 설명하는 페이지이다.</br>
 
『주간서울』은 광복 이후에 창간되어 해방공간에 가장 오랜 기간 발행된 본격적인 주간지였다. 많은 부분이 유실되어 총 93호 중 59호만이 남아 있으며, 1949년 제33호에서 [[이육사]] 시인의 유시 세 편 '산', '화제', '[[잃어진 고향]]'을 간행한 바 있다.
 
『주간서울』은 광복 이후에 창간되어 해방공간에 가장 오랜 기간 발행된 본격적인 주간지였다. 많은 부분이 유실되어 총 93호 중 59호만이 남아 있으며, 1949년 제33호에서 [[이육사]] 시인의 유시 세 편 '산', '화제', '[[잃어진 고향]]'을 간행한 바 있다.
  
 
==의의==
 
==의의==
 +
상당 부분이 유실되긴 했지만,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라는 혼란한 시기와 6.25 전쟁을 겪은 것에 비해 유의미한 자료를 많이 담고 있다는 점에서 굉장히 중요한 사료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주간서울』은 사실상 광복 이후 최초의 시사주간지였기에 당시 시대상을 온전하게 담고 있으며 정부수립 이후 6.25 전쟁 사이의 사료라는 중대한 의의를 지닌다.
 +
 +
게다가 『합동통신』에서 근무하던 유재명, 설국환 등을 중심으로 발행된 『주간서울』은 당시 일간 신문에 비해 깊이 있는 기사들로 지면을 장식했다. 제10호부터는 『서울신문』을 인수해 당시 국내 최대의 인적 자원을 갖추기도 했다.
 +
 +
『주간서울』의 자료가 남은 덕분에 우리는 이육사 시인이 사망한지 59년이 지났음에도 그의 작품을 새롭게 향유할 수 있게 되었다. 『주간서울』에 실린 이육사 시인의 세 작품은 그 시풍(詩風) 때문에 바로 이육사의 작품임이 밝혀졌고, 이 작품들은 어렵던 당시 상황을 타개하려던 이육사 시인의 숭고한 정신을 엿볼 수 있게 해주었다.
  
 
==제33호==
 
==제33호==
 +
1949년 4월 4일 발행된 『주간서울』 제33호는 가장 최근인 2002년 11월에 발굴되어 엄청난 관심을 모았다. 해당 작품들은 이육사의 동생 '원조'가 간행한 전집에도 빠져 있는 작품들이었다는 점에서 더 큰 의미를 가졌다. 기존 유시들은 동생이나 조카들에 의해 간행되었지만, 해당 작품들은 누가 어떤 경위로 기고했는지 알 수 없다. 작품들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
 +
===산===
 +
바다가 수건을 날여 부르고</br>
 +
난 단숨에 뛰여 달여서 왔겠죠</br>
 +
</br>
 +
천금(千金)같이 무거운 엄마의 사랑을</br>
 +
헛된 항도(航圖)에 역겨 보낸날</br>
 +
</br>
 +
그래도 어진 태양(太陽)과 밤이면 뭇별들이</br>
 +
발아래 깃드려 오고</br>
 +
</br>
 +
그나마 나라나라를 흘러 다니는</br>
 +
뱃사람들 부르는 망향가(望鄕歌)</br>
 +
</br>
 +
그야 창자를 끊으면 무얼하겠오
 +
 +
===[[잃어진 고향]]===
 +
제비야</br>
 +
너도 고향(故鄕)이 있느냐</br>
 +
</br>
 +
그래도 강남(江南)을 간다니</br>
 +
저노픈 재우에 힌 구름 한쪼각</br>
 +
</br>
 +
제깃에 무드면</br>
 +
두날개가 촉촉이 젓겠구나</br>
 +
</br>
 +
가다가 푸른숲우를 지나거든</br>
 +
홧홧한 네 가슴을 식혀나가렴</br>
 +
</br>
 +
불행(不幸)이 사막(沙漠)에 떠러져 타죽어도</br>
 +
아이서려야 않겠지</br>
 +
</br>
 +
그야 한떼 나라도 홀로 높고 빨라</br>
 +
어느때나 외로운 넋이였거니</br>
 +
</br>
 +
그곳에 푸른하늘이 열리면</br>
 +
엇저면 네새고장도 될법하이.
 +
 +
===화제(畵題)===
 +
도회(都會)의 검은 능각(稜角)을 담은</br>
 +
수면(水面)은 이랑이랑 떨여</br>
 +
하반기(下半旗)의 새벽같이 서럽고</br>
 +
화강석(花崗石)에 어리는 기아(棄兒)의 찬꿈</br>
 +
물풀을 나근나근 빠는</br>
 +
담수어(淡水魚)의 입맛보다 애닲어라</br>
  
 
==여담==
 
==여담==
 +
* 『주간서울』이 『서울신문』을 인수한 뒤에는 기자들의 현지 취재 기사와 시사가 많이 실리게 되었다. 특히 광복 이후에 창간된 신문인 만큼 남북 통일문제나 중국의 정치 상황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다.
 +
* 정치, 사회적 분위기에 따라 친일파 처단 문제가 거의 매호 기사로 실렸는데, 시기가 시기인 만큼 항상 많은 관심이 쏠렸다.
 +
* 이육사 시인의 작품 뿐만 아니라 월북 문인들의 시도 다수 실려 있어 문학과 문학가 연구 자료로 활용된다.
 +
* 6.25 전쟁 발발 직전인 1950년 5월 1일에 85호를 마지막으로 발행했다.
 +
 +
[[분류:영]]

2023년 12월 7일 (목) 20:07 기준 최신판

『주간서울』 반민특위 공판기사

개요

1947년 8월 5일에 해방공간에 발행된 민족주의적 성향의 종합 시사주간지인 『주간서울』을 설명하는 페이지이다.
『주간서울』은 광복 이후에 창간되어 해방공간에 가장 오랜 기간 발행된 본격적인 주간지였다. 많은 부분이 유실되어 총 93호 중 59호만이 남아 있으며, 1949년 제33호에서 이육사 시인의 유시 세 편 '산', '화제', '잃어진 고향'을 간행한 바 있다.

의의

상당 부분이 유실되긴 했지만,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라는 혼란한 시기와 6.25 전쟁을 겪은 것에 비해 유의미한 자료를 많이 담고 있다는 점에서 굉장히 중요한 사료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주간서울』은 사실상 광복 이후 최초의 시사주간지였기에 당시 시대상을 온전하게 담고 있으며 정부수립 이후 6.25 전쟁 사이의 사료라는 중대한 의의를 지닌다.

게다가 『합동통신』에서 근무하던 유재명, 설국환 등을 중심으로 발행된 『주간서울』은 당시 일간 신문에 비해 깊이 있는 기사들로 지면을 장식했다. 제10호부터는 『서울신문』을 인수해 당시 국내 최대의 인적 자원을 갖추기도 했다.

『주간서울』의 자료가 남은 덕분에 우리는 이육사 시인이 사망한지 59년이 지났음에도 그의 작품을 새롭게 향유할 수 있게 되었다. 『주간서울』에 실린 이육사 시인의 세 작품은 그 시풍(詩風) 때문에 바로 이육사의 작품임이 밝혀졌고, 이 작품들은 어렵던 당시 상황을 타개하려던 이육사 시인의 숭고한 정신을 엿볼 수 있게 해주었다.

제33호

1949년 4월 4일 발행된 『주간서울』 제33호는 가장 최근인 2002년 11월에 발굴되어 엄청난 관심을 모았다. 해당 작품들은 이육사의 동생 '원조'가 간행한 전집에도 빠져 있는 작품들이었다는 점에서 더 큰 의미를 가졌다. 기존 유시들은 동생이나 조카들에 의해 간행되었지만, 해당 작품들은 누가 어떤 경위로 기고했는지 알 수 없다. 작품들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바다가 수건을 날여 부르고
난 단숨에 뛰여 달여서 왔겠죠

천금(千金)같이 무거운 엄마의 사랑을
헛된 항도(航圖)에 역겨 보낸날

그래도 어진 태양(太陽)과 밤이면 뭇별들이
발아래 깃드려 오고

그나마 나라나라를 흘러 다니는
뱃사람들 부르는 망향가(望鄕歌)

그야 창자를 끊으면 무얼하겠오

잃어진 고향

제비야
너도 고향(故鄕)이 있느냐

그래도 강남(江南)을 간다니
저노픈 재우에 힌 구름 한쪼각

제깃에 무드면
두날개가 촉촉이 젓겠구나

가다가 푸른숲우를 지나거든
홧홧한 네 가슴을 식혀나가렴

불행(不幸)이 사막(沙漠)에 떠러져 타죽어도
아이서려야 않겠지

그야 한떼 나라도 홀로 높고 빨라
어느때나 외로운 넋이였거니

그곳에 푸른하늘이 열리면
엇저면 네새고장도 될법하이.

화제(畵題)

도회(都會)의 검은 능각(稜角)을 담은
수면(水面)은 이랑이랑 떨여
하반기(下半旗)의 새벽같이 서럽고
화강석(花崗石)에 어리는 기아(棄兒)의 찬꿈
물풀을 나근나근 빠는
담수어(淡水魚)의 입맛보다 애닲어라

여담

  • 『주간서울』이 『서울신문』을 인수한 뒤에는 기자들의 현지 취재 기사와 시사가 많이 실리게 되었다. 특히 광복 이후에 창간된 신문인 만큼 남북 통일문제나 중국의 정치 상황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다.
  • 정치, 사회적 분위기에 따라 친일파 처단 문제가 거의 매호 기사로 실렸는데, 시기가 시기인 만큼 항상 많은 관심이 쏠렸다.
  • 이육사 시인의 작품 뿐만 아니라 월북 문인들의 시도 다수 실려 있어 문학과 문학가 연구 자료로 활용된다.
  • 6.25 전쟁 발발 직전인 1950년 5월 1일에 85호를 마지막으로 발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