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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서울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로, 회(會)의 명칭은 ‘보국안민(輔國安民)’을 뜻한다. <ref>“나라 일을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뜻으로 최제우(崔濟愚, 1824~1864)가 동학을 창도할 때에 외세로부터 국권을 지킬 것을 강조한 계책이다.</ref></br>
 
1904년 서울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로, 회(會)의 명칭은 ‘보국안민(輔國安民)’을 뜻한다. <ref>“나라 일을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뜻으로 최제우(崔濟愚, 1824~1864)가 동학을 창도할 때에 외세로부터 국권을 지킬 것을 강조한 계책이다.</ref></br>
창립 이후 단 1개월 정도의 짧은 기간 동안 활동했음에도 민중의 폭넓은 지지를 얻으며 일제의 무력 위협에 대항했다. 보안회의 민족 운동은 대한 제국 정부를 움직여 결국 일제의 황무지 침탈을 저지하는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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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 이후 단 1개월 정도의 짧은 기간 동안 활동했음에도 민중의 폭넓은 지지를 얻으며 일제의 무력 위협에 대항했다.</br>보안회의 민족 운동은 대한 제국 정부를 움직여 결국 일제의 황무지 침탈을 저지하는데 성공했다.
  
 
===설립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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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 황무지개간반대운동.png|400px|center|황무지 개간 반대 운동 사진이다.]]
 
 
 
 
 
 
[[파일:밤송이.jpg|300픽셀]]
 
 
 
 
 
  
  

2023년 12월 6일 (수) 15:30 판

보안회 (保安會)

정의

1904년 서울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로, 회(會)의 명칭은 ‘보국안민(輔國安民)’을 뜻한다. [1]
창립 이후 단 1개월 정도의 짧은 기간 동안 활동했음에도 민중의 폭넓은 지지를 얻으며 일제의 무력 위협에 대항했다.
보안회의 민족 운동은 대한 제국 정부를 움직여 결국 일제의 황무지 침탈을 저지하는데 성공했다.

설립 배경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일어난 뒤 전세가 일본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자 일본은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 체결을 강요하고, 이어서 각종 이권을 탈취하는 등 경제적 침탈을 강화하였다.

6월에 나가모리(長森藤吉郎)가 어공원(御供院) 소관의 산림, 천택(川澤)과 황무지 개간권을 이양 받고자 일본공사를 통해 대한제국 정부에 압력을 가해왔다. 이에 유학(幼學)과 품관(品官)들은 반대 상소운동을 벌였고, 각 언론기관도 반대 사설을 실어 여론 형성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일제가 이 계획을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보다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반대운동을 벌여야 할 필요성을 느낀 송수만(宋秀萬), 심상진(沈相震)등이 1904년 7월 13일서울 종로 백목전(白木廛)에서 중민회의(衆民會議)를 열어 보안회를 발기하였다.



활동

역사적 의의

  • 보안회에서 벌인 황무지개척 반대운동은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를 방불하게 하는 민중 구국운동이었다. 이로 인해 일제는 1908년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설치될 때까지 황무지개척권에 관한 거론을 유보하게 되었다.


황무지 개간 반대 운동 사진이다.



각주

  1. “나라 일을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뜻으로 최제우(崔濟愚, 1824~1864)가 동학을 창도할 때에 외세로부터 국권을 지킬 것을 강조한 계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