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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상자|text=억눌린 우리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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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터져나온 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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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후반에 들어선 박정희 정권은 한계에 봉착하기 시작했다. 유신 헌법 제정 이후 학생 운동, 시민 운동이 거세지자 정부는 이를 탄압하고 있었고, 미국의 지미 카터 대통령은 박정희 정부의 이러한 인권 탄압 문제를 심히 비판하고 압박하는 등 한미 관계 또한 좋지 못했다.
매운 연기 칼바람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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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성소리 드높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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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1차 오일쇼크로 물가상승률이 크게 늘어나면서 경제위기에 봉착했지만 중동에서의 대규모 건설사업 수주를 통해 매년 수십억의 외화를 벌어들이고 있었고 급속히 늘어난 수출도 대한민국의 고도성장에 한몫을 했다. 그러나 이런 중동붐은 투자조정에 실패하며 한국 경제에 큰 타격을 입혔다. 이후  1978년에 건설주 파동으로 주식시장의 거품이 꺼지기 시작하면서 경제에 다시금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고 비슷한 시기에 2차 오일쇼크가 닥치며 물가상승률은 2년만에 8%p가 오르기도 했다.
동트는 새벽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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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이 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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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공업의 중심이었던 부산, 마산의 중소업체들은 이런 경제 타격에 직격탄을 맞았다. 당시의 경기 불황과 부가가치세 정책 신설 등의 여파로 인해 박정희 정권에 대한 경남 지역 민심은 크게 악화되고 있었고, 이런 요인은 이후 시민들이 학생들에게 호응하는 원인 중 하나로 작용한다.
핏발 선 가슴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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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개==
살아오는 십 일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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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동지여 전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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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학도여. 지금 너희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의 조국은 심술궂은 독재자에 의해 고문받고 있는데도 과연 좌시할 수 있겠는가. 이 땅의 위정자들은 흔히 민족을 외치고 한국의 장래를 운운하지만 진실로 이 나라 이 민족의 영원한 미래를 위하여 신명을 바칠 이 누구란 말인가. 청년학도여! 최근에 일어난 일련의 사태를 돌이켜보게나... (중략) 소위 유신헌법을 보라! 그것은 법이 아니다. 그것은 국민을 위한 법이라기보다는 한 개인의 무모한 정치욕을 충족시키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정당한 비판과 오류의 시정을 요구하는 순수한 의지를 반민족적 행위 운운하면서 무참히 탄압하는 현정권의 유례없는 독재. 이러고도 우리 젊은 학도들은 작금에 벌어지고 있는 사회 문제에 방관만 하고 있을 것인가! 너희들의 정열은 어디 있는가... (중략)
깨치고 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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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학도여! 부디 식어가는 정열, 잊혀져 가는 희미한 진실, 그리고 이성을 다시 한번 뜨겁게 정말 뜨거웁게 불태우세! 혼탁한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지성인으로서의 사명감, 그리고 책임감으로 우리 모두 분연히 진리와 자유의 횃불을 밝혀야만 하네! (중략) 모든 효원인들이여 드디어 오늘이 왔네! 1979년 10월 16일 10시 도서관으로!''' <small> - 1979년 10월 16일 부산대학교 교정에 뿌려진 「선언문」</samll>
뜨거운 가슴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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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내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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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5일, 공대생 이진걸이 '민주선언문'을, 법대생 신재식이 '민주투쟁선언문'을 각각 뿌리면서 오전 10시에 도서관에 모일 것을 호소하였다. 시간이 되도록 학생들이 모이지 않자 주동자들은 실패한 것으로 생각하여 해산하였고, 정작 10시 40분쯤 되어서 모인 수백 명의 학생들은 주동자가 나타나지 않아 해산하고 말았다. 이에 큰 좌절감이 교정을 휩쓸었으나 교내의 각 동아리와 학생들은 시위 준비를 멈추지 않았다. 이중 상대생 정광민이 나서서 '선언문'을 작성하고 16일 인문대 학생들에게 유인물을 뿌리며 "저 유신독재정권에 맞서 우리 모두 피 흘려 투쟁하자"고 선동하였다. 이에 수십 명의 학생들이 호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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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광민이 인솔하는 시위대가 도서관 앞에 이르자 수백 명으로 불어났고 곧 시위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교직원들이 이들을 말리려 했지만 시위대의 숫자는 점점 늘어나기만 했다. 2,000여 명 정도로 불어난 시위대는 운동장을 한 바퀴 돈 뒤에 교문으로 나아가 시내 진출을 시도하였다. 전경은 최루탄을 쏘며 교내로 진입했는데 여기에 분노하여 교내의 다른 학생들까지도 시위대에 합류하였다. 오전 11시경 5,000명 가량의 학생들은 세 갈래로 나뉘어 각각 대학 담벼락을 무너뜨리고 진압부대를 격파하여 마침내 시내로 진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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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3시부터는 부산대 학생들의 소식을 들은 고신대학교와 동아대학교 학생들의 합류로 더욱 시위 규모가 커지기 시작했다. 시위 대열은 부산 국제시장 일대에서 게릴라식으로 전개되었다. 여기에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학생들을 응원해주었다. 시민들은 박수를 치고 경찰의 진압 작전을 방해하며 쫓기는 학생을 숨겨주는가 하면 빵이나 김밥과 같은 먹을거리, 물수건 등을 던져주며 열렬히 호응하고 시위대를 격려했다. 퇴근 시간에 가까운 오후 6시부터는 회사원, 노동자, 상인들도 시위에 합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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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7시 '''5~7만여 명'''의 인파가 부영극장 앞 간선도로를 꽉 메운 채 시위의 물결을 이루었다. 시위의 주역인 대학생들 무리에 퇴근길의 회사원과 재수생, 교복 입은 고등학생, 심지어 상인과 노동자, 접객업소 종업원들까지 가세하였다. 이 시점부터 시위는 단순한 학생시위를 넘어 도시 하층민까지 포괄하는 민중항쟁의 성격을 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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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들은 "유신철폐", "독재타도", "언론자유", "김영삼 총재 제명 철회" 등을 외치며 부산 시내를 쏘다녔다. 밤이 깊을수록 시위는 민중의 격렬한 저항으로 바뀌어갔다. 시위대는 새벽까지 부산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보이는 파출소마다 공격하여 남포, 부평, 보수, 중앙 등 총 11곳의 파출소가 파괴되었고, 파출소마다 걸려 있던 박정희 사진도 철거되어 태워졌다. 시위대는 이를 보며 함성을 지르고 박수를 쳤으며 애국가를 부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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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7일, 이날부터 부산대는 임시휴교에 들어갔지만 시위는 멈추지 않았다. 부산대 교정에서 다시금 수천 명의 시위대가 경찰과 충돌하다가 시내로 진출했다. 저녁이 되자 전날과 똑같은 양상으로 시위가 펼쳐졌다. 이날의 시위로 중구, 서구, 동구 지역 내의 거의 모든 파출소, 경찰서, 공공기관이 공격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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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부산에서 집계한 자료에는 부상자는 16일 하루 동안에만 학생 5명, 일반 시민 10명, 경찰 95명 등 총 110명으로서 그 가운데 중상자는 18명이었다. 그러나 시민들로선 자진 신고를 기피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 상황을 감안할 때 실제 피해는 그보다 훨씬 컸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울러 고문 피해자들도 양산되었던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부산의 시위 확산을 막기 위해서 박정희 정권은 18일 새벽 0시를 기해 이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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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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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8일 경남대학교 학생 1,000여 명이 기동 경찰 300여 명과 대치하다 투석전을 벌였고 3·15 의거탑에서는 1,000여 명이 스크럼을 짜 유신 철폐와 독재 타도 및 언론 자유를 요구하는 시위를 전개하는 등 시내 곳곳에서 대규모 시위가 전개되었다. 그날 저녁부터 학생들과 시민 수천 명이 시내 중심가를 메우고 경찰과 투석전을 벌이는 대규모 군중 시위를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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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의 시위는 한층 더 격화되면서 민주공화당의 당사, 파출소, 방송국이 불타고 파괴되었다. 이에 인근의 창원출장소, 진해시, 함안군 등지에서 경찰 병력이 넘어오고 2개 중대의 군인까지 투입되어 시위대를 진압하였다.  19일 학생들과 시민들의 공권력에 대한 저항이 계속되었다. 마산의 항쟁이 노동자와 고교생까지 합세하여 더욱 확산될 조짐을 보이자 정부는 10월 20일 0시를 기해 마산시와 창원출장소 일원에 위수령을 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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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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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마항쟁은 학생 운동이나 소수 명망가들에게 국한되어 있던 70년대의 그 어떤 반독재 민주화운동보다 정권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다. 단순히 소수 명망가와 지식인적인 학생들의 참여를 넘어 대중들이 광범위하게 개입하는 거대 사건이었다. 이는 부마항쟁의 주 참여층이 하층 도시민, 이를테면 중국집 배달원, 술집 종업원, 노동자, 구두닦이였고 수출지대의 노동자들의 참여였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가진다. 이로써 답보 상태에 처해있던 70년대 학생 및 재야 중심 민주화운동의 한계를 단숨에 뛰어넘어 노동자와 시민 참여라는 커다란 의의를 가진 운동이다. '''이는 4.19 혁명에 이어 민주주의 성취를 위한 대규모 항쟁이었으며, 이러한 항쟁의 역사는 후에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6월 항쟁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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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에의 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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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의미가 큰 민주화운동임에도 4.19 혁명, 5.18 민주화운동, 6월 항쟁에 비하면 대중적으로 언급되는 빈도가 굉장히 낮은 편이다. 그러나 '''부마민주항쟁은 4.19 혁명 이후 다시 일어난 대규모 민주화 운동이자 5.18 광주 민주화운동과 6월 항쟁으로 연결되는 민주화 대장정의 큰 줄기를 맡고 있는 항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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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혁명이 당시 김주열 열사에 대한 언론 보도로 전국적인 규모로 커진 데다 결국 이승만의 하야를 직접적으로 이끌어냈으므로 당연히 전 국민이 다 알았던 것과 달리 부마항쟁은 정권의 언론 통제로 인해 그 당시나 직후에 부산, 마산 바깥에는 크게 알려지지 못했다. 그래서 당시에 보통은 경상도 일부 지역에서의 민주주의 운동, 작은 소요사태 정도로 알려졌고, 아예 알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2023년 12월 5일 (화) 19:11 판

배경

1970년대 후반에 들어선 박정희 정권은 한계에 봉착하기 시작했다. 유신 헌법 제정 이후 학생 운동, 시민 운동이 거세지자 정부는 이를 탄압하고 있었고, 미국의 지미 카터 대통령은 박정희 정부의 이러한 인권 탄압 문제를 심히 비판하고 압박하는 등 한미 관계 또한 좋지 못했다.

한국은 1차 오일쇼크로 물가상승률이 크게 늘어나면서 경제위기에 봉착했지만 중동에서의 대규모 건설사업 수주를 통해 매년 수십억의 외화를 벌어들이고 있었고 급속히 늘어난 수출도 대한민국의 고도성장에 한몫을 했다. 그러나 이런 중동붐은 투자조정에 실패하며 한국 경제에 큰 타격을 입혔다. 이후 1978년에 건설주 파동으로 주식시장의 거품이 꺼지기 시작하면서 경제에 다시금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고 비슷한 시기에 2차 오일쇼크가 닥치며 물가상승률은 2년만에 8%p가 오르기도 했다.

경공업의 중심이었던 부산, 마산의 중소업체들은 이런 경제 타격에 직격탄을 맞았다. 당시의 경기 불황과 부가가치세 정책 신설 등의 여파로 인해 박정희 정권에 대한 경남 지역 민심은 크게 악화되고 있었고, 이런 요인은 이후 시민들이 학생들에게 호응하는 원인 중 하나로 작용한다.

전개

부산

청년학도여. 지금 너희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의 조국은 심술궂은 독재자에 의해 고문받고 있는데도 과연 좌시할 수 있겠는가. 이 땅의 위정자들은 흔히 민족을 외치고 한국의 장래를 운운하지만 진실로 이 나라 이 민족의 영원한 미래를 위하여 신명을 바칠 이 누구란 말인가. 청년학도여! 최근에 일어난 일련의 사태를 돌이켜보게나... (중략) 소위 유신헌법을 보라! 그것은 법이 아니다. 그것은 국민을 위한 법이라기보다는 한 개인의 무모한 정치욕을 충족시키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정당한 비판과 오류의 시정을 요구하는 순수한 의지를 반민족적 행위 운운하면서 무참히 탄압하는 현정권의 유례없는 독재. 이러고도 우리 젊은 학도들은 작금에 벌어지고 있는 사회 문제에 방관만 하고 있을 것인가! 너희들의 정열은 어디 있는가... (중략)

청년학도여! 부디 식어가는 정열, 잊혀져 가는 희미한 진실, 그리고 이성을 다시 한번 뜨겁게 정말 뜨거웁게 불태우세! 혼탁한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지성인으로서의 사명감, 그리고 책임감으로 우리 모두 분연히 진리와 자유의 횃불을 밝혀야만 하네! (중략) 모든 효원인들이여 드디어 오늘이 왔네! 1979년 10월 16일 10시 도서관으로! - 1979년 10월 16일 부산대학교 교정에 뿌려진 「선언문」</samll>

10월 15일, 공대생 이진걸이 '민주선언문'을, 법대생 신재식이 '민주투쟁선언문'을 각각 뿌리면서 오전 10시에 도서관에 모일 것을 호소하였다. 시간이 되도록 학생들이 모이지 않자 주동자들은 실패한 것으로 생각하여 해산하였고, 정작 10시 40분쯤 되어서 모인 수백 명의 학생들은 주동자가 나타나지 않아 해산하고 말았다. 이에 큰 좌절감이 교정을 휩쓸었으나 교내의 각 동아리와 학생들은 시위 준비를 멈추지 않았다. 이중 상대생 정광민이 나서서 '선언문'을 작성하고 16일 인문대 학생들에게 유인물을 뿌리며 "저 유신독재정권에 맞서 우리 모두 피 흘려 투쟁하자"고 선동하였다. 이에 수십 명의 학생들이 호응하였다.

정광민이 인솔하는 시위대가 도서관 앞에 이르자 수백 명으로 불어났고 곧 시위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교직원들이 이들을 말리려 했지만 시위대의 숫자는 점점 늘어나기만 했다. 2,000여 명 정도로 불어난 시위대는 운동장을 한 바퀴 돈 뒤에 교문으로 나아가 시내 진출을 시도하였다. 전경은 최루탄을 쏘며 교내로 진입했는데 여기에 분노하여 교내의 다른 학생들까지도 시위대에 합류하였다. 오전 11시경 5,000명 가량의 학생들은 세 갈래로 나뉘어 각각 대학 담벼락을 무너뜨리고 진압부대를 격파하여 마침내 시내로 진출하였다.

오후 3시부터는 부산대 학생들의 소식을 들은 고신대학교와 동아대학교 학생들의 합류로 더욱 시위 규모가 커지기 시작했다. 시위 대열은 부산 국제시장 일대에서 게릴라식으로 전개되었다. 여기에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학생들을 응원해주었다. 시민들은 박수를 치고 경찰의 진압 작전을 방해하며 쫓기는 학생을 숨겨주는가 하면 빵이나 김밥과 같은 먹을거리, 물수건 등을 던져주며 열렬히 호응하고 시위대를 격려했다. 퇴근 시간에 가까운 오후 6시부터는 회사원, 노동자, 상인들도 시위에 합류했다.

저녁 7시 5~7만여 명의 인파가 부영극장 앞 간선도로를 꽉 메운 채 시위의 물결을 이루었다. 시위의 주역인 대학생들 무리에 퇴근길의 회사원과 재수생, 교복 입은 고등학생, 심지어 상인과 노동자, 접객업소 종업원들까지 가세하였다. 이 시점부터 시위는 단순한 학생시위를 넘어 도시 하층민까지 포괄하는 민중항쟁의 성격을 띠었다.

시민들은 "유신철폐", "독재타도", "언론자유", "김영삼 총재 제명 철회" 등을 외치며 부산 시내를 쏘다녔다. 밤이 깊을수록 시위는 민중의 격렬한 저항으로 바뀌어갔다. 시위대는 새벽까지 부산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보이는 파출소마다 공격하여 남포, 부평, 보수, 중앙 등 총 11곳의 파출소가 파괴되었고, 파출소마다 걸려 있던 박정희 사진도 철거되어 태워졌다. 시위대는 이를 보며 함성을 지르고 박수를 쳤으며 애국가를 부르기도 했다.

10월 17일, 이날부터 부산대는 임시휴교에 들어갔지만 시위는 멈추지 않았다. 부산대 교정에서 다시금 수천 명의 시위대가 경찰과 충돌하다가 시내로 진출했다. 저녁이 되자 전날과 똑같은 양상으로 시위가 펼쳐졌다. 이날의 시위로 중구, 서구, 동구 지역 내의 거의 모든 파출소, 경찰서, 공공기관이 공격당했다.

당시 부산에서 집계한 자료에는 부상자는 16일 하루 동안에만 학생 5명, 일반 시민 10명, 경찰 95명 등 총 110명으로서 그 가운데 중상자는 18명이었다. 그러나 시민들로선 자진 신고를 기피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 상황을 감안할 때 실제 피해는 그보다 훨씬 컸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울러 고문 피해자들도 양산되었던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부산의 시위 확산을 막기 위해서 박정희 정권은 18일 새벽 0시를 기해 이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마산

10월 18일 경남대학교 학생 1,000여 명이 기동 경찰 300여 명과 대치하다 투석전을 벌였고 3·15 의거탑에서는 1,000여 명이 스크럼을 짜 유신 철폐와 독재 타도 및 언론 자유를 요구하는 시위를 전개하는 등 시내 곳곳에서 대규모 시위가 전개되었다. 그날 저녁부터 학생들과 시민 수천 명이 시내 중심가를 메우고 경찰과 투석전을 벌이는 대규모 군중 시위를 전개하였다.

마산의 시위는 한층 더 격화되면서 민주공화당의 당사, 파출소, 방송국이 불타고 파괴되었다. 이에 인근의 창원출장소, 진해시, 함안군 등지에서 경찰 병력이 넘어오고 2개 중대의 군인까지 투입되어 시위대를 진압하였다. 19일 학생들과 시민들의 공권력에 대한 저항이 계속되었다. 마산의 항쟁이 노동자와 고교생까지 합세하여 더욱 확산될 조짐을 보이자 정부는 10월 20일 0시를 기해 마산시와 창원출장소 일원에 위수령을 발동하였다.

의의

부마항쟁은 학생 운동이나 소수 명망가들에게 국한되어 있던 70년대의 그 어떤 반독재 민주화운동보다 정권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다. 단순히 소수 명망가와 지식인적인 학생들의 참여를 넘어 대중들이 광범위하게 개입하는 거대 사건이었다. 이는 부마항쟁의 주 참여층이 하층 도시민, 이를테면 중국집 배달원, 술집 종업원, 노동자, 구두닦이였고 수출지대의 노동자들의 참여였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가진다. 이로써 답보 상태에 처해있던 70년대 학생 및 재야 중심 민주화운동의 한계를 단숨에 뛰어넘어 노동자와 시민 참여라는 커다란 의의를 가진 운동이다. 이는 4.19 혁명에 이어 민주주의 성취를 위한 대규모 항쟁이었으며, 이러한 항쟁의 역사는 후에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6월 항쟁으로 이어진다.

대중에의 인지도

역사적 의미가 큰 민주화운동임에도 4.19 혁명, 5.18 민주화운동, 6월 항쟁에 비하면 대중적으로 언급되는 빈도가 굉장히 낮은 편이다. 그러나 부마민주항쟁은 4.19 혁명 이후 다시 일어난 대규모 민주화 운동이자 5.18 광주 민주화운동과 6월 항쟁으로 연결되는 민주화 대장정의 큰 줄기를 맡고 있는 항쟁이다.

4.19 혁명이 당시 김주열 열사에 대한 언론 보도로 전국적인 규모로 커진 데다 결국 이승만의 하야를 직접적으로 이끌어냈으므로 당연히 전 국민이 다 알았던 것과 달리 부마항쟁은 정권의 언론 통제로 인해 그 당시나 직후에 부산, 마산 바깥에는 크게 알려지지 못했다. 그래서 당시에 보통은 경상도 일부 지역에서의 민주주의 운동, 작은 소요사태 정도로 알려졌고, 아예 알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