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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윤덕영 매입: 1910년 | + | # 윤덕영 매입:윤덕영의 1910년 옥인동 47번지 매입 배경에는 한일강제병합의 공로자로 총독부에서 받은 공채증권 46만원의 역할이 컸다. 한일강제병합의 큰 공으로 다른 공로자보다 은사금을 더 받았다. 은사금은 보편적으로 3만원이었는데 그는 15배가 넘는 금액을 받은 것이다. 이 은사금은 옥인동 47번지로 일대를 매입하는 자금이었다. 윤덕영은 1910년이후 지속적인 부지 면적 증가를 하였다. 1917년 순종의 도쿄방문 추진 성공으로 하세가와 총독에게 사례금을 받았고 1919년에는 윤덕영과 민병석이 덕수궁과 영성문 안쪽을 팔아서 이득을 챙겼다. 사례금으로 1917년 16,628평으로 그해 옥인동 전체 토지면적인 총 33,583평의 49.5%를 매입하였다. 1921년에는 부태묘 문참봉 사건과 1924년에는 왕가에게 주는 친용금 횡령을 통해 돈을 모았다. 이처럼 옥인동 일대의 실질적인 부지 확장이 된 시기는 윤덕영이 불미스러운 사건에 거론되는 동안 계속 진행되었다. 1925년에는 중추원 고문으로 복직하여 정치적 재기를 노렸고 1927년에는 더욱 증가된 19,467.8평으로 옥인동 전체 총 36,361.83평인 53.54%를 소유하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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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 5일 (화) 00:04 판
벽수산장
공간 형성과정
- 윤덕영 매입:윤덕영의 1910년 옥인동 47번지 매입 배경에는 한일강제병합의 공로자로 총독부에서 받은 공채증권 46만원의 역할이 컸다. 한일강제병합의 큰 공으로 다른 공로자보다 은사금을 더 받았다. 은사금은 보편적으로 3만원이었는데 그는 15배가 넘는 금액을 받은 것이다. 이 은사금은 옥인동 47번지로 일대를 매입하는 자금이었다. 윤덕영은 1910년이후 지속적인 부지 면적 증가를 하였다. 1917년 순종의 도쿄방문 추진 성공으로 하세가와 총독에게 사례금을 받았고 1919년에는 윤덕영과 민병석이 덕수궁과 영성문 안쪽을 팔아서 이득을 챙겼다. 사례금으로 1917년 16,628평으로 그해 옥인동 전체 토지면적인 총 33,583평의 49.5%를 매입하였다. 1921년에는 부태묘 문참봉 사건과 1924년에는 왕가에게 주는 친용금 횡령을 통해 돈을 모았다. 이처럼 옥인동 일대의 실질적인 부지 확장이 된 시기는 윤덕영이 불미스러운 사건에 거론되는 동안 계속 진행되었다. 1925년에는 중추원 고문으로 복직하여 정치적 재기를 노렸고 1927년에는 더욱 증가된 19,467.8평으로 옥인동 전체 총 36,361.83평인 53.54%를 소유하게 되었다.
특징
- 벽수산장의 건축양식은 석재혼입의 벽돌 2층으로 프랑스 계통의 르네상스 스타일이다. 석재는 각 독립주, 건물각부의 귓돌, 창호 주변에 사용되어 이외의 부재에 사용된 붉은 벽돌과의 조화를 이루는 형태이다. 벽수산장은 내외부의 화려함으로 한양의 아방궁이라 불렸다. 철재와 장식품, 타일 등을 독일에서 구입하는 등 외국 건축 자재만을 썼고 보일러 시설을 갖추었다. 응접실 천장에는 두꺼운 대형유리로 수족관을 만들어 금붕어를 기르기도 하여 ‘금붕어 집’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윤덕영의 친일 행각으로 벽수산장에 대한 당시 미디어의 기사는 사치스러운 건물이라는 부정적 표현을 사용되었다.
『조선일보』 1926년 5월 31일자 “매도설이 훤전(喧傳)되는 송석원 양관 내력담” : 집 한채를 14, 5년이나 두고 건축하고도 오히려 필역(畢役)치 못하였다 하면 누구나 경이의 눈을 뜰 것이다. 그러나 그 건물은 삼십여만의 경성시민이 날마다 치어다 보는 한양의 서편 인왕산 아래에 있는 다갈색 연화제의 삼층양관이 그것이니 이 양관은 일국 부원군의 형님인 윤덕영 자작의 송석원이 그것이다. 세상에서는 이 건물이 송석원이라는 이름을 가졌으되 통칭 ‘한양 아방궁’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부르게 되었는데 이것만으로는 능히 이 건물이 얼마나 윤환미를 다 하였는 것을 엿볼 수 있는 것인바이다.